488화
결정은 빨랐다. 키시아르는 유더의 능력을 믿고 건네준 임명권이니만큼 활동할 때마다 따로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 주었다.
“속도와 은밀함이 생명인 정보 조사 활동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받길 원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지. 중간 보고는 최대한 줄이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편히 지원을 요청하게.”
“알겠습니다.”
“사고를 치는 건 괜찮지만 다치지는 말고.”
그 말이 지목하는 상대가 유더라는 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빈틈없는 웃음을 짓고 있던 키시아르의 눈썹이 그제야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유더가 나가기 전, 그러고 보니 막 생각났다는 듯 추가 소식 하나를 더 전해주었다.
“아까 소식이 하나 날아왔었는데, 사라인 대삼림에서 네가 잡아 넘겼던 암살자들을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했다. 넬라른의 2왕자, 에제인을 노리고 왔다가 상대를 잘못 고른 바람에 탈탈 털려 잡혀간 놈들 아니던가.
“예. 그자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배후 조사 결과가 나왔다더군. 별로 놀랍지는 않은 결과지만 말이야.”
암살자들은 에제인 왕자 측에서 예상했던 대로 에릴 출신이었다. 에릴은 에제인의 가장 큰 적, 3왕자의 모친이 자란 모국으로, 누가 보아도 그쪽의 사주를 받아 온 게 확실하다 여겨지는 정황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대충 그 정도만 파악한 뒤 진작에 에제인 왕자 측에 넘겼겠으나, 여태까지 그들을 붙잡아 조사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자들이 넬라른 3왕자 측의 사주를 받고 제국으로 들어올 때, 제국 내부에서 도움을 준 이들의 존재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네. 어느 대단한 제국 귀족 측에서 3왕자의 승리를 돕기 위함이라며 그들의 밀입국을 돕고 정보를 제공했다더군.”
“정말 놀랍지 않은 결과군요.”
“그래. 꼬리를 워낙 잘 자른 덕에 정확한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자들이 자신들의 출신국도 아닌 오르 제국 내에서 에제인 왕자를 이리 쉽게 추적할 수 있었던 건, 조력을 준 이들의 힘과 위치가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럴 동기가 있는 이는 얼마 없었다.
‘4공작들 중 누군가겠지. 정확히는… 그럴 만한 정신이 없는 아페토를 제외한 셋 중 하나인가.’
에제인 왕자가 수확철 축제 사신 노릇 따위를 핑계 삼아 오르 제국으로 향한 진짜 이유를 넬라른에 있는 그의 적들이 몰랐을 리 없다. 에제인이 제국에서 위기를 타파할 방법을 찾으려 했듯, 에제인의 적들 또한 그를 막기 위해 제국의 손 닿는 고위 귀족들에게 손을 내밀었으리라.
그 손을 잡았을 이의 생각은 불을 보듯 뻔했다. 참으로 썩어 빠진 일이나 제 정체만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쪽에서는 잃을 것이 없고, 미래의 왕위에 오를 자에게 은혜를 하나쯤 입혀 두어 나쁠 일도 없으니 여러모로 남는 장사라 여겼을 것이다.
‘그냥 타국의 뒷배 없는 왕자 하나를 제거하는 일만 도우면 되니 별것 아니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2왕자는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 일을 도운 건 마병단이지만, 마병단이 서부에 몬스터 토벌 임무를 떠난 시기와 에제인 왕자의 귀환이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걸 인상 깊게 여긴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왕자가 고국으로 향하기 전 각성을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 또한 아직은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로 유지되는 중이었다.
“에제인 왕자 쪽에서도 무사히 귀환했다는 연락이 얼마 전 황궁에 도착했다더군. 아직은 상황이 심각해 앞으로 나설 수 없는 모양이지만, 이번 일로 주변을 재정비했으니 전과는 다르겠지. 각성한 능력도 몸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테고 말이야.”
거기에 케일루사 황제 측의 도움도 약속받았으니 이전처럼 힘들게 견제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유더는 에제인 왕자의 미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되었군요.”
“그걸로 끝인가?”
어쩐지 키시아르가 다른 답을 바랐던 듯한 반문을 했다. 유더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되물었다.
“뭔가 더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래도 내 보좌가 왕자와 친우 사이가 되었으니 그의 안부를 좀 더 궁금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제가 바란 적은 없는 자리입니다. 왕자님의 안부는 지금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하고요.”
몸을 지키는 능력으로는 최고라 할 만한 힘을 각성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에제인이 전처럼 위험해질 일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아마 이제부터는 왕자의 안부 걱정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빨리 넬라른의 왕위쟁탈전을 끝내고 내부의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나 생각해 보는 게 더 건설적일 것이다.
유더의 답을 들은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알겠네.”
“네. 그러면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유더는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그리고 막 문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유더.”
갑자기 이름을 불러 고개를 돌리니, 햇빛이 들어오는 창 앞에서 눈부시도록 환한 빛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휴가는 끝났지만, 이곳 문은 늘 열려 있다는 걸 잊지 말게.”
“…….”
“언제나.”
아무래도 사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유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나섰다. 몸 안쪽 어딘가에서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
다시 돌아간 훈련장에서, 유더는 제가 찾던 이들을 골라내어 따라오라고 말했다. 가케인과 엘더 남매는 자신들이 왜 불렸는지 짐작한 듯 그리 놀라지 않았으나 데브란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뭐야? 나는 왜 불러? 내가 여기 낄 이유가 있었…나?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야.”
유더는 그를 안심시킨 뒤 그들을 이끌고 의료부로 향했다.
“다른 한 사람을 데려가야 하니까 잠깐 문 앞에 있어.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다음에 할 테니까.”
“여기서 부를 사람이 또 있어?”
데브란의 불안감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유더는 의료부의 문을 두드렸다.
“어서 오세요! 혹시 훈련하다 다치셔서 오신 건가요?”
밝은 얼굴을 한 루산이 그를 반겼다.
“아닙니다. 이논은 어디 있습니까?”
“아, 이논 님이라면…….”
“난 왜 찾아?”
환자용 침대의 커튼 하나가 슥 걷히며 불퉁한 얼굴이 드러났다.
“왜 거기 누워 있어?”
“긴 여정에 강제로 끌려갔다 돌아오니 이제야 피로가 몰려와서 누워 있는 중이다. 왜. 누우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문밖에 끌고 온 다른 사람들은 뭔데?”
“너랑 같은 이야기를 들을 사람들.”
그 말에 무엇을 예감했는지, 이논이 무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난 안 한다.”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뭔지는 몰라도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하는 냄새가 나. 난 여기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하니까 더는 안 해.”
“이논 님. 그래도 유더 님의 말은 좀 들어 보시고 결정하시지 그러세요…….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사이에 낀 루산이 싱글거리며 말을 보탰다. 이논이 투덜대는 게 진짜로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그도 아주 잘 알게 된 듯했다. 유더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린 이논을 바라보다 작게 숨을 내쉬었다.
“자, 받아.”
품에서 꺼내 던진 것을 반사적으로 잡아챈 이논이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샛노란 레몬이 상큼한 향을 내며 손안에서 싱그럽게 빛나는 중이었다.
‘이럴 줄 알고 훈련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식당에 들러서 한 알 챙기길 잘했군.’
“그거 먹으면 가는 거다.”
“너 이 자식… 서부에서 돌아오더니 영악함만 아주 늘어서…….”
이논이 투덜거리며 짜증을 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켜 그것을 한 입 씹어먹었다. 찡그렸던 눈썹이 펴지며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하아. 그래, 간다 가. 별거 아니면 듣다가 그냥 나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으름장을 놓으며 다가온 이논이, 문득 가까이서 본 유더의 얼굴을 향해 뭔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 휴가 사이에 뭐 했어?”
“그건 왜.”
“뭔가가…….”
무어라 말하려던 이논이 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루산을 눈치챈 듯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일단 이야기 끝나고 보자.”
유더는 이논과 함께 의료부를 나섰다. 문밖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네 사람이 레몬을 씹고 있는 이논을 보고는 가지각색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 모였으니 올라가자.”
유더는 그들을 휴게실로 데려가 자리를 잡았다. 단원들 모두가 훈련 일과 중이었기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선 여기에 너희를 모은 이유부터 말해야겠지. 아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으니까.”
유더는 데브란과 이논의 얼굴을 살피며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