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키시아르의 엄숙하고도 장난스러운 명에 따라 나단 주커만이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어깨 위에 올렸다. 검이 아닌 악기를 든 모습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 모습은 생각 외로 몹시 안정적이고 익숙해 보였다.
유더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키시아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놀랐나? 반주를 도와줄 이가 나단이라서.”
유더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저었다.
“신경 쓰지 말게. 내가 가르쳤으니 굳이 이리저리 지시할 필요 없이 가장 편하게 호흡이 맞을 것 같아서 연습 반주를 부탁했을 뿐이니까. 평소에는 잘 연주하지 않지만 어지간한 음악가들보다는 나단이 더 잘하거든.”
“…단장님이 주커만 경께 바이올린도 직접 가르치셨습니까?”
“그래.”
“검을 배울 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며 가르치셨죠.”
활을 쥔 나단 주커만이 한숨을 작게 내쉬며 대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혼자 연습하기가 싫으셔서 가르치신 것뿐이었습니다만.”
“무슨 섭섭한 소리를. 바이올린 연주는 팔의 근력을 기르고 손에 들어가는 힘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키시아르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사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반주를 도와주러 왔다는 사실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전 생에도 키시아르에게 춤을 배울 때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때의 분위기는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나단 주커만이 바이올린을 배운 이유를 듣지도 못했다.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할 만한 여유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나단 주커만 쪽도 어쩐지 그때보다 지금이 덜 심란해 보이는 것도 같고.’
휴가가 끝나자마자 주군의 춤 상대가 멀쩡한 사내놈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을 텐데도 나단 주커만의 표정은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 듯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키시아르에게 뭔가 말을 들었나.’
“자, 그러면 자리를 잡아 볼까. 단복 겉옷은 벗고 이쪽으로.”
먼저 단복 겉옷을 벗어 둔 키시아르가 소파와 테이블을 밀어내어 넓혀 둔 빈 공간에 섰다. 유더는 겉옷을 벗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늘의 이 자리는 춤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파티에서 춤을 출 상대의 기준을 바꾸겠다는 계획을 이야기한 뒤 키시아르가 춤을 어느 정도 출 줄 아느냐고 물었을 때, 필요한 만큼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만큼이라. 그게 어느 정도일지 궁금한걸.’
키시아르는 이미 춤을 배운 적이 있었는지, 배웠다면 누구에게, 어디까지 배웠는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 ‘필요한 만큼’의 춤 수준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리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전통적으로 귀족들의 파티에서 춤을 출 때는 대부분 4박자로만 이루어지는 ‘란차’ 형식의 춤곡을 선택하지. 속도가 느려 많은 이들이 동시에 추어도 떠들썩하지 않고 우아해 보이니까.”
유더를 마주한 키시아르가 보이지 않는 상대와 함께 선 듯한 자세를 취하며 간단히 몇 동작을 시연했다. 혼자서 음악도 없이 움직이는데도 우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능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아비탄’ 형식으로 만들어진 곡을 첫 곡으로 택할 거야. 이유를 짐작하겠나?”
란차는 귀족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했던 춤곡이고, 아비탄은 반대로 평민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발전한 춤곡 형식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나 몇 년이 지난 뒤에는 영원히 지지 않을 듯했던 란차의 인기가 사그러지는 때가 온다. 반복되는 자연재해 속에서 현실을 잊을 만큼 더 자극적이고 즐거운 요소를 찾게 된 젊은 귀족들이 아비탄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때와 같은 상황이 오지 않았는데도 아비탄을 택하겠다는 건…….
“춤의 기원 때문입니까? 단원들이 배우기도 란차보다는 더 쉬울 테니까요.”
“그것도 있지. 하지만 내가 아비탄을 택한 이유는, 아비탄에는 남성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춤 형식이 본래부터 존재하기 때문이라네.”
키시아르가 방금과 다른 자세를 취했다. 란차 때와 달리 보이지 않는 상대를 안은 팔이 훨씬 위로 올라온 상태였다. 그가 가볍게 눈짓을 하자 나단 주커만이 활을 바이올린 위에 올렸다.
곡이 시작됨과 동시에 키시아르가 몸을 움직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전보다 훨씬 속도가 빠른데도 움직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유더는 그와 함께 춤추고 있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누구인지 불현듯 깨달았다.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어떤가?”
묘한 기분을 느끼는 동안 너무나 빠르게 춤이 끝나고, 숨 하나 차지 않은 상태의 키시아르가 싱글거리며 물었다. 유더는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린 반응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제가 알던 아비탄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남자끼리 추는 형식이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키시아르가 웃음을 흘렸다.
“아비탄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고도 넓어. 몇백 년 전에는 아비탄의 원형이 되는 춤을 황궁에서 추기도 했었다지. 기록에 명확히 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오르 건국 초기의 시대에 황제께서 추었던 춤도 이 형식에서 기반한 게 아닐까 하는 게 제법 신뢰성 있는 추측이니 말이야.”
그리고 키시아르는 그러한 기록을 근거로 삼아 아비탄을 황궁 파티에서 연주하게 만들 셈이었다.
“어차피 지금도 타국에서는 아비탄 쪽을 더 선호하고 있다네. 제국 북부에서도 규모가 큰 파티가 아니면 대개는 아비탄을 자주 추는데 황궁이라고 그걸 해서는 안 될 금기로 여길 이유는 없지. 첫 곡 선택권까지 받은 이번이라면 더더욱.”
“…….”
“자. 해 볼 수 있겠나?”
유더는 웃음과 함께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는 그에게 란차와 아비탄, 둘 모두를 가르쳤다. 그때는 남자 쪽 춤만을 배웠는데, 남자끼리 추는 형식도 있다는 말은 해 주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해도 굳이 그것까지 배우려고 하진 않았겠지만…….’
같은 성별끼리 추는 춤은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취해 버린 평민들의 술자리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형식이랄 것도 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추는 춤이 대다수였다. 그런 춤을 귀족들의 우아한 파티에서 춘다는 건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대체 이런 게 있다는 건 어디서 찾아오신 겁니까.”
“처음 춤을 배울 때 말이야, 가르쳐 준 선생이 제법 괴짜였거든.”
키시아르가 악동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내가 하루 만에 여자 쪽 춤까지 모두 익혀서는 황제 폐하… 아니, 그 당시엔 1황자 전하셨지. 아무튼 그분의 상대를 멋지게 해내 버렸더니 박수를 치면서 이것까지 알려 주었어. 옛날엔 친우끼리 제법 추었던 모양인데 낯부끄러워서 그런지 이제는 사라지고 춤을 보존하기 위해 배우는 자들 사이에서만 내려오고 있었다더군.”
“…….”
“물론 부황과 모후께선 기가 막혀 하셨지만.”
덧붙인 말까지 아주 기가 막혔다.
필요한 만큼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지만, 이건 예상치 못했다. 유더는 그의 손을 잡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건 새로 배워야겠군요.”
키시아르는 원하던 답을 얻어낸 이다운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런. 안타깝군. 그렇다면 처음부터 한번 시작해 볼까.”
유더는 키시아르의 손을 잡고 그가 시키는 대로 등과 허리 사이에 다른 한 손을 얹었다. 키시아르 또한 같은 자세를 취했다.
나단 주커만이 키시아르의 눈짓에 따라 또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기본적으로는 기존의 아비탄과 같아. 단지 두 사람의 동작이 맞물리는 느낌이 조금 색다를 뿐이지.”
키시아르가 손을 끌어당기며 발을 움직였다. 기본 동작은 그의 말대로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기존과 다른 건 크게 보면 하나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였을 때 대등하게 맞물려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게 그것이었다.
기존의 남자 쪽 동작을 두 사람이 동시에 한다면 몸이 계속 부딪혔겠지만, 키시아르가 가르치고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그 부분이 신기할 정도로 매끄럽게 상쇄되었다. 마치 맞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블록 두 개가 놀랄 만큼 잘 맞물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니 기존의 아비탄이 지닌 관능적이면서도 자극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감각들이 생겨났다.
이럴 수 있는 건 키시아르 쪽에서 유더를 그만큼 잘 이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
집무실을 몇 바퀴쯤 돌고 나서 유더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졌을 때, 키시아르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눈을 들어 연주 중인 나단 주커만을 보았다. 충직한 기사는 무표정하게 활 끝만을 보고 있었다.
“…예. 생각보다는 쉽군요.”
“이전에 남자 쪽 춤만 배웠다면 이건 색다른 기회가 될 테니 잘 즐겨 보게.”
유더는 순간 잠시 걸음을 흐트러뜨릴 뻔하다 낮게 물었다.
“…제가 여자 쪽 춤도 같이 배웠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