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상으로 복귀하기 전, 알려 주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어 왔네.”484화
농담으로 인해 부드럽게 풀어졌던 분위기가 일순 조용해졌다. 키시아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집중하는 단원들의 면면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마병단에 임시 단원이 둘 더 늘었네. 서부에 다녀온 이들은 이미 안면이 어느 정도 있을 이들이지. 그리고 앞으로 마병단 내에서 의료부와 함께 여러 가지 연구를 해 줄 이도 한 사람 더. 셋 모두 이곳으로 나와 주겠나?”
말이 끝나자마자 뒷문 안에서 고양이를 품에 안은 프루엘레와 헬렘이 걸어 나왔다. 여유로운 얼굴의 헬렘과 달리 프루엘레는 미소 너머로 다소 긴장이 엿보였다.
“마법사 헬렘이라고 합니다. 본디 주군의 영지인 펠레타에서 지내다 이번 서부행을 계기로 마병단에 합류하게 되었지요.”
“제 이름은 프루엘레 반 타인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요. 그리고 이 아이는 제 동생인 니폴렌으로, 고양이로 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평소에는 거의 이 모습으로 지냅니다.”
프루엘레의 이름을 들은 단원들이 놀라자, 그의 얼굴 위로 조금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 놀라시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만, 마병단에서의 저는 이 이름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편히 엘레라고만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도 떼고, 이름도 줄여 평민이나 다름없이 대해 달라는 말에 웅성거림이 조금 더 커졌다. 하지만 마병단원들은 이미 레블린 샨 아페토의 경우를 보았기에 이내 나름대로 납득하고 곧 조용해졌다.
놀라움이 조금 가라앉고 나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키시아르가 말을 이었다.
“프루엘레 공자, 아니. 엘레는 레블린을 보고서 힘을 얻어 우리를 찾아왔네. 타이누에서 그가 주었던 진심 어린 도움들이 없었다면 모든 일이 이토록 잘 마무리될 수는 없었을 테지.”
키시아르는 프루엘레가 서부에서 해 주었던 일들을 더함도, 덜함도 없이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타고난 병증 때문에 부모에게조차 인지되지 못한 채 형제들의 손에서 몰래 자라난 니폴렌과,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마병단을 도운 프루엘레의 이야기에 감정이 풍부한 몇몇 단원들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니폴렌은 아까 말한 이유 때문에 고양이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 인간 모습보다 편안함을 느낀다고 하더군. 그래도 같은 각성자들 앞에서는 형제들과 있을 때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니 모두 이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게.”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세 사람은 들어가도록.”
인사를 마친 헬렘과 프루엘레, 니폴렌이 키시아르의 곁을 떠나 단원들 곁에 섰다. 프루엘레의 품에 안긴 조그만 아기 고양이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이 여기저기서 목을 쭉 뺐다.
“두 번째로 알려 줄 사항은 얼마 후 실행될 2차 마병단원 모집에 관해서라네.”
새로운 임시 단원보다 더 놀라운 소식에 단원들이 또다시 숨을 삼켰다.
“자네들은 그간 노력과 기대에 걸맞은 눈부신 성과를 보여 주었지. 하지만 서부를 시작으로 앞으로 생겨날 지역별 지부를 생각하면 300명의 인원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야. 때문에 예정보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2차 마병단원 모집을 겨울이 지나기 전에 시작하기로 했네.”
“그러면… 이번에는 처음부터 각 지역별로 모집하시려는 것입니까?”
스티버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래. 동부, 서부, 북부, 남부, 그리고 중부를 포괄할 수도. 이렇게 총 5지역에서 모집할 생각이고, 입단 시험을 칠 장소와 일정 등은 곧 확정하여 안내할 생각이네.”
“설마 단장님께서 그곳들을 다 돌아다니시며 뽑으시는 건가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다른 단원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빙긋 웃었다.
“좋은 질문이군. 물론 내가 모든 곳을 다 돌아다닐 수는 없지. 나는 중부만 맡을 생각이고, 서부는 서부 지부에게 맡길 생각이네. 그리고 나머지는 자네들 중에서 일정 인원을 뽑아 맡기게 될 거야. 부단장들과 보좌도 많이 바빠지겠지.”
키시아르는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듯 명확한 태도로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중부와 서부를 제외한 북부, 남부, 동부의 2차 마병단원 모집 시험은 1기 마병단원 중 실력이 뛰어나며 해당 지역의 사정에 밝은 이들을 뽑아 맡길 예정이었다.
시험관이 된 이들은 2차 마병단원 모집에 지원한 각성자들에게 직접 1차 시험을 하고 뽑을 자격이 생기며, 뽑힌 이들을 이후 수도까지 데려오는 임무를 맡게 된다. 키시아르는 그렇게 전국에서 걸러져 온 이들을 마지막으로 살피게 될 터였다.
“일단 지원자를 우선으로 할 예정이니 원하는 이들은 부단장들이나 보좌에게 미리 뜻을 밝혀 두도록.”
시험관으로 뽑힌 이들은 추후 해당 지역의 지부가 생겼을 때 우선 지원할 수 있으며, 임무 수행에 따른 상여금과 휴가를 받는다는 말에 단원들의 눈이 일제히 번득였다. 유더는 그 불타는 의지를 사방에서 느끼며 입술 끝을 희미하게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달콤한 휴가를 맛보고 돌아와 더 쉬고 싶다는 마음을 자극당한 직후에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지원하고 싶겠지.’
키시아르가 시작하기 전부터 휴가 이야기를 괜스레 꺼냈던 건 아마 지금과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으리라. 참으로 사람 마음을 잘 주무르는 화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곧 황궁에서 열릴 파티에 대해서다.”
키시아르는 분위기를 몰아 단원들이 내심 가장 기대했을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마병단을 직접 맞이하러 와 주실 만큼 이번 임무 성공에 기뻐하셨다는 사실은 모두 느꼈으리라 생각하네. 본래대로라면 치하만 받고 그대로 끝났을 자리가 황궁에서 열리는 큰 파티로 발전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이지.”
파티에는 마병단원들 뿐만 아니라 수도의 유력 귀족들이 다수 참여할 예정이었다. 단원들은 황궁 내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연회용 홀을 지닌 칸타메리아 궁에서 치하를 받게 될 것이며, 이후에는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파티의 주인공이 될 예정이라는 말에 놀람과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 열릴 파티는 이전에 참석했던 수확철 축제 때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존재해.”
들뜬 분위기 속에서 키시아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파티에는 춤을 추는 시간이 반드시 들어갈 예정이라네. 춤을 추지 않을 예정이라면 모르겠으나, 이번은 마병단을 위한 파티인 만큼 첫 곡은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질 예정이라서 말이지.”
“…….”
일순 심각해진 단원들의 얼굴을 보며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거기에서 춤을 출 짝의 기준을, 여태까지처럼 1성에 따른 기준만으로 제한하지 않을 생각이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단원들이 서로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조심스레 마주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아직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느 정도의 심각성을 지닌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잠시 후 손을 들어 입을 연 이는 본래 성을 물려받는 귀족 가문 출신인 가케인이었다.
“단장님. 저… 1성에 따른 기준만으로 제한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그러니까… 본래의 규칙대로 반드시 남자와 여자만 짝을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이해했네.”
그제야 단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음, 그래도 괜찮은 건가?”
“우리끼리 술 마시고 아무렇게나 춤출 때라면 모를까… 다른 곳도 아닌 황궁인데…….”
말은 그렇게 해도 짝을 정할 때는 아마 다들 익숙한 기준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키시아르 라 오르는, 바로 그 순간을 정확히 찌르듯이 입을 열었다.
“-때문에 나는. 유더 아일을 나의 짝으로 삼아 그때 함께할 생각이다.”
“…….”
웅성거리기는 해도 분위기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훈련장 내에서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단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방금 들은 충격적인 말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생각했다.
‘어어… 단장님이, 유더랑?’
‘이거 혹시 타이누에서 했던 그 연극을 계속 이어 나가시겠다는 뜻인가?’
‘여기서도 계속 그걸 할 필요가 있나?’
유더는 슬금슬금 저를 향해 날아오는 시선들 앞에서 고요히 침묵을 지켰다. 그의 시선은 오직 맨 앞에 선 키시아르에게만 닿아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처음에는 다들 그리 진지하게 믿지 않는군.’
파티에서 춤을 추는 상대의 전통적 기준을 바꾸어 유더를 함께 데려가겠다 말한 건 오늘이 오기 전 키시아르가 내놓은 생각이었다. 가장 확실하게 의도를 드러낼 수 있을 첫 발걸음으로 알맞은 계획에 유더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는 이의 기준을 바꾸는 것뿐이지만, 그것을 직접 체감할 이들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더는 혼란스러워하는 단원들의 시선을 받아 넘기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훈련장은 그 순간 소리 없이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