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유더의 손에서 쪽지를 낚아챈 키올레가 마구 소리쳤다. 이젠 밖에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조차 없어진 듯했다.
유더는 제가 알아낸 정보를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무슨 소문?”
“네가 펠레타 공작 전하와 서부에서 온갖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소문 말이다!”
‘아, 그거 말이군.’
아무리 퍼져도 좋다고 내버려 둔 소문이라지만 설마 키올레까지 그것에 대해 언급할 줄이야. 하지만 고작 안주머니 좀 뒤졌다고 진짜 파렴치한 게 뭔지도 모를 놈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조금 우습기는 했다.
유더는 무시할까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반문했다.
“글쎄. 어떨 것 같은데?”
“뭐?”
“만약 내가 단장님과 파렴치한 짓을 했든 말든, 그게 너와는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이냐니. 네가 지금 내 몸을 만졌잖아! 설마 처음부터 그런 쪽에 관심을 두고 마병단에 들어간 거냐? 그래서 감히 내 제안도 거절하고……!”
“거기까지만 해. 더 들어주기 힘들군.”
망상과 비약도 이쯤 되면 신기에 가까웠다. 단호한 답에 찔끔하여 입을 다문 키올레가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사이, 유더는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난 누구에게도 관심 없어. 마병단에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갔고, 단장님의 곁에 있고 싶어서 있을 뿐이지. 네 우스운 영입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그때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그게……!”
“그게 파렴치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래. 뭐 그런 걸로 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그건 너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키올레.”
그 목소리 속에 담긴 싸늘함은 누구의 침범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키올레는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가, 영문을 알 수 없이 치미는 울컥함에 입을 열어 소리쳤다.
“이… 이 자식, 잘난 척하지 마라! 그래서, 맞다는 거냐고 아니라는 거냐고!”
이쯤 말했는데도 결국 돌아오는 답이 이거라니. 유더는 여태껏 저 바보 멍청이를 가르치려 노력했을 모든 이들이 느꼈을 감정을 함께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스스로 판단해. 그쯤은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이, 빌…….”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을 퍼부으려 했던 키올레가 순간적으로 찾아드는 졸음에 휘청이다가 벽에 부딪혔다. 그는 혹이 솟은 옆머리를 감싸 쥐고 이를 갈며 외쳤다.
“난, 정말, 네놈이 싫어!”
“듣던 중 고마운 소리군. 적어도 아까처럼 펄펄 뛰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너…! 너어……!”
“재미없는 얘기는 그쯤 해 두고,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화제를 돌린 유더는 분노로 새빨갛게 변한 키올레의 얼굴을 무시하며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키올레, 너도 이번 파티에 오겠지?”
“……그게 뭐!”
“그때 나와 한 번 더 만나.”
“또 무슨 악마 같은 짓을 하려고!”
“오늘처럼 그냥 몇 가지 좀 물어볼 거야. 얌전히 협력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내가 어떻게 파티 도중에 널 만나?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빠져나올 방법은 네 쪽에서 잘 생각해 내야지. 적당히 신호를 줄 테니 알아서 나와.”
“내가 그걸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너, 또 황태자 전하의 치료사들에 대해 물어보려고 날 이용하려는 거잖아!”
“맞아. 그런데 사실 너도 그놈들이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유더의 대답에 키올레가 순간 눈에 띄게 움찔했다.
아무튼 디아카 공작가 정도 되는 가문의 자제답지 않게 좋고 싫은 감정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놈이었다.
‘보통 목숨이 오가는 위기를 겪고 나면 싫어도 사람이 바뀌게 마련인데, 이놈은 그런 면에선 텄어.’
“치료 효과가 정말 있든 없든, 수상한 건 수상한 거지. 아무리 너라도 디아카 가 측에서 정말 그 치료사들을 온전히 믿기 때문에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라 생각지는 않겠지?”
“…….”
“그걸 내가 파헤쳐 주겠다면 네 쪽에서는 오히려 환영할 일 아닌가? 그자들이 정말 사기꾼이라면 말이야.”
디아카 공작 측이 치료사들의 정체를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유더의 생각대로 그자들이 각성자일 경우에도 디아카 공작과 황태자 측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여러 변수가 생길 수 있었다.
그리고 키올레는 그 변수를 줄일 가장 탁월한 정보 제공처였다.
‘그러니 파티가 열리기 전까지 그 치료사들에 대해 우리 쪽에서 조사해 보고, 그걸 토대로 저놈에게 다시 한번 정보를 캐내면 되겠지. 표정을 보니 분명 그럴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물론 유더의 뜻을 모를 키올레는 정확히 예상한 대로의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자들이 사기꾼이란 사실을 밝혀낸다……. 듣고 보니 조금 쓸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와 황태자가 혹 그 사기꾼들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용당하는 중이라면, 키올레는 마땅히 그 사실을 밝혀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방법을 몰라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파티 때는 아버지께서도 마병단에게 무언가 하실 텐데… 목표가 진짜 저놈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만약 예상이 맞다면…….’
키올레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유더는 그 흔들림이 더 커지기 전에 빠르게 쐐기를 꽂았다.
“말하자면 공동의 적을 두고 쌍방 협조를 하자는 거지. 그러면 협력하는 걸로 알아두겠어.”
“잠깐만. 난 아직 한다고 말을…….”
“안 할 거냐?”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어둡고 깊은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영원한 잠 쪽을 원한다면 말하라’고 하는 듯이 키올레를 응시했다. 키올레는 결국 빠드득 이를 갈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파티 때까지는 오늘처럼 쓸데없이 돌아다니거나, 지나치게 솔직하게 굴어서 계획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짓은 하지 마.”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냐!”
“아까 우리의 서약 세 번째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보인 반응 같은 걸 두고 보통은 그렇게 말하지. 누가 봐도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어. 그 세 번째 사항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볼 일이 최근에 있었나 보지?”
“…….”
키올레는 아주 빠르게 침묵했다.
“뭐, 말할 생각이 없다면 됐어. 간다. 내가 나간 뒤 속으로 30까지 세고 나서 나와.”
“……자, 잠깐만.”
키올레가 쥐어짜듯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가 이러리라 예상하고 쉽게 돌아서는 척했던 유더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서, 서부에서 거대한 몬스터를 단신으로 잡았다는 마병단원. 그거 너지?”
“그런데.”
“아니. 사실은 너 말고 다른 사람이 한 거 아냐?…….”
“도움은 받았지만 숨통을 끊은 건 나 맞아. 그래서 뭐.”
조용해진 키올레의 머릿속에서 역시 저놈은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놈이었다는 확신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스스로도 이름을 다 모를 온갖 부정적 감정 속에서 갈등하다, 이내 양 주먹을 쥔 채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디아카 가 쪽으로 올 생각 없어?”
“없어.”
“이번 파티에서 상을 받고 나면 아버지께서도 네가 누군지 완전히 알게 되시겠지. 내가 그냥 추천만 해도 이미 좋게 봐 주실 텐데, 그 이후 합류하면 정도가 다른 대접을 받게 될 거란 말이야. 그런데도 진짜 싫다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키올레 다 디아카.”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 아버지께서 널 용서치 않으실 거라고 해도?!”
왈칵 화를 내며 소리친 키올레는 잠시 후 분노만큼 강렬한 후회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맛보았다.
결국 말해 버렸다. 말해 버리고 만 것이다. 아버지를 향한 죄책감과 눈앞의 상대를 향한 답답함과 짜증이 뒤섞여 용솟음쳤다. 그러나 정작 키올레에게 그런 감정을 안겨 준 사내는 미동도 없이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창백한 얼굴에 아주 소름 끼치는 미소를 띄우는 것이 아닌가.
‘아하……. 뭘 말하려고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나 했더니.’
유더는 그 한 마디로 키올레가 하고자 했던 말의 모든 이면을 눈치챘다.
“디아카 공작께서 마병단에게 슬슬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결심하신 모양이지? 누군가를 본보기로 삼겠다고 말하기라도 했나?”
“아, 아니야.”
대꾸하는 키올레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힘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서약 세 번째를 어기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거군. 살다 보니 이 녀석에게 진짜 도움을 받는 날이 다 있다니.’
그들이 사용할 방식이야 뻔하다. 굳이 특정한 누군가를 목표로 잡지 않은 상태라 하더라도, 의도를 알고 있는 이상 해결책은 만들면 그만이었다.
‘나를 진짜 목표로 삼아 준다면 그야말로 최고고.’
최고의 적은 늘 뱃속에 도사리고 있다더니, 키올레가 아버지의 계획을 이런 식으로 찌를 줄은 디아카 공작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너구리 같은 늙은 공작이 뒤로 넘어갈 생각을 하니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유더는 흡족한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키올레를 스치고 지나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든 상관없어. 너와 난 파티 때 만난다. 그것만 기억해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