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80화 (480/805)

480화

‘저 녀석을 마주칠 때면 늘 일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가 키올레를 개인적으로 마주쳤을 때는 나한 때문에 팔을 다치거나, 혹은 갑자기 예기치 못한 2성 발현이 시작되는 등의 난감한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게다가 키올레도 몸을 사려야 했던 황궁과 달리, 이곳은 디아카 가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가게 안이었다. 제 영역이라 여기는 곳에서는 겁쟁이 개도 갑자기 용맹한 사자가 되는 법이다.

‘하지만 나보다 저 녀석의 운이 더 나빠지게 만들어 주면 되니 상관없지.’

어차피 키올레가 카치안의 호위기사가 된 정황을 알아보려 생각도 했었으니 여기서 마주친 게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가장 확실하게 정보를 캐내는 방법으로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좋은 건 없으니까.

“일단 조용히 해. 너와 내가 아는 사이라고 이곳의 모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침착하게 대꾸하자 키올레가 몹시 놀라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혹여나 제가 지른 소리를 듣고 누가 올까 걱정되었는지 주변을 세차게 둘러보는 모습이 몹시 바보 같았다.

이를 빠드득 간 키올레가 유더의 소매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끌어당겼다. 어딜 가나 했더니 계단 아래의 작은 창고였다. 사람은 없지만 먼지 없이 깔끔한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다시 목소리를 죽여 소리를 쳤다.

“진짜로 여기 왜 온 거냐, 이 마병단 놈. 너 같은 가난ㅂ……가난한 사람이 여길 올 수 있을 리 없잖아. 설마… 벌써 뭔가를 느끼고 온 거냐?”

가난뱅이라고 말하려 했던 듯했는데 재빨리 단어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그간 겪었을 언어 교정의 효과가 톡톡히 느껴졌다.

‘그간 서약의 인이 시도 때도 없이 뜨끈해지던 걸 참아 준 보람이 있군.’

붉은 돌의 힘 때문에 생긴 반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하찮기는 하지만, 키올레가 서약을 어길 뻔할 때마다 그 힘은 유더에게도 전해져 아주 약간의 영향을 미치고 사라지고는 했다. 아주 살짝 뜨끈해졌다 가라앉는 정도라 솔직히 말해 햇볕을 받았을 때 느끼는 따뜻함과 구분이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여기 혼자 올 이유는 없지. 단장님께서 볼 일이 있다고 하셔서 따라왔을 뿐이다.”

“펠레타 공작? 그분께서 여기에 와 계신다고? 어디?”

“대기실에.”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키올레가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고는 도로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런데 너는 왜 혼자 어슬렁대며 돌아다니냐고! 여기가 어딘지 몰라?”

“고작해야 수선 가게 아닌가? 너도 혼자 돌아다니는데 내가 혼자 돌아다니지 못할 이유는 뭐지? 설마 화장실도 가지 말라는 건 아닐 테고.”

“이……!”

입술을 씰룩거리며 쉭쉭 숨을 고르던 키올레가 주먹을 꽉 쥐고는 분노를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화장실 가려고 나온 거라고?”

“아니.”

“지금 나를 놀리는 거냐!”

“내가 왜 나왔는지 네게 말해 줄 이유가 없으니까.”

키올레의 표정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욕을 하고 싶어 죽겠는데 그럴 수 없어 고통스러운 심경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유더는 그를 놀리는 건 그쯤 해 두기로 하고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컥 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가까이 끌어당기자 키올레가 발버둥을 쳤다.

“뭐, 뭐야! 왜 이래!”

“조용히 하고 기왕 마주쳤으니 몇 가지 좀 물어보자.”

“싫어!”

“너와 나의 서약 세 번째 항목을 그사이 잊어버렸나 본데. 다시 상기시켜 줄까.”

“차라리 잊었으면 속이나 편했겠지. 그 웃기지도 않은 항목 때문에 내가 이번에도……!”

억울하게 소리치던 키올레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는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이번에도? 뭐.”

“……됐어. 뭘 물어볼 건지나 말해.”

이런 식으로 갑자기 고분고분하게 구는 건 이전에 했던 말속에 확실히 뭔가가 숨겨져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유더는 그 바보 같음은 나중에 지적하기로 하고 일단 제 용건부터 채우기로 했다.

“너, 황태자의 호위기사로 보직이 바뀐 것 같던데.”

“그게 뭐?”

“기어이 황궁기사단 상급기사 자리에서 잘린 건가?”

“잘리다니! 공식적으로는 승진이다! 모두가 그곳을 맡을 사람은 나뿐이라 했다고! 나도 아주 좋아서 맡은 게 아니야!”

“아, 그래. 그러면 그곳에 대해 잘 알고 있겠군. 요즘 여기서 일하는 이들이 광휘궁에 자주 드나든다던데, 누군지 알아?”

“…그건 왜?”

키올레가 미심쩍고도 불길한 얼굴로 반문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만나 보려고.”

“거짓말하지 마라. 황태자 전하의 치료 소식을 캐내려고 온 거구나, 역시!”

이것 봐라. 역시 조금만 찔러도 알아서 정보를 토해 주는 놈다웠다.

유더는 온 세상 사람들이 키올레 다 디아카처럼 쉬웠다면 일이 얼마나 빨라졌을지 생각하며 대꾸해 주었다.

“그래. 맞아. 그래서, 누군지 알고 있기는 한가 보지?”

“비열하게 그분의 치료를 방해할 셈이냐? 내가 네놈과 서약을 했다지만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네가 보기에도 치료가 아주 잘되어 가고 있나 보군. 실력이 정말 좋은 이들인가 본데. 어디서 그런 자들을 찾았을까.”

유더의 질문에, 무어라 소리치려던 키올레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악문 턱이 잘게 떨린 뒤, 키올레는 아주 힘겹게 대꾸했다.

“……아니야.”

“뭐가?”

“내가 보기에는 아니니까 그 사기꾼 같은 치료사들의 실력이 좋은지 아닌지 나한테 묻지 말라고!”

“사기꾼?”

“신성력도, 마법도, 의술도 아닌 것을 그러면 뭐라고 하지? 난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아!”

이건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다.

‘신성력도, 마법도, 의술도 아니다……. 하지만 효과가 있었으니 그 의심 많은 카치안도, 디아카 공작도 묵인하고 신분 위장까지 도와주며 치료를 승인한 거겠지.’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뿐이다.

‘각성자.’

“그리고 그자들은 여기에 없어! 이름만 여기에 두었을 뿐이지 나도 어디서 오는지 모르니까 그것도 묻지 마!”

“흐음. 그래. 알겠다. 여기 없다니 아쉽게 됐군.”

물론 속내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유더의 입가에 떠오른 수상하고도 차가운 미소를 본 키올레가 진저리를 쳤다. 그는 제 멱살을 잡은 유더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며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께 헛짓을 할 생각이라면 관둬. 서부에서 공을 좀 세웠다고 기고만장해서 보이는 게 없나 본데, 무슨 짓이라도 하려 든다면 내가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다! 아버지께 모든 걸 고백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서약을 해제하고……!”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쯤 해 둬.”

유더의 한마디에 키올레가 입을 다물었다.

“너는 스스로에게 불리한 사항을 고백하면서까지 서약을 해제하려 노력할 사람이 아니야. 그럴 수 있었다면 진작 했겠지. 네가 정말로 황태자의 호위기사라는 자각이 있었다면 광휘궁을 떠나 여기까지 안 왔을 테고, 마지막으로 내가 관심이 있는 건 황태자가 아니라 그 치료사들 쪽이야.”

“…아니야. 난 네게 비열한 협박을 당해서……! 그래서 여태까지…….”

어떻게든 반박하려 노력하던 키올레는 이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전보다 기가 꺾이는 속도가 빨라진 걸 봐서, 유더가 말한 사항에 대한 자각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던 듯했다.

“…….”

“너. 오늘은 여기 왜 왔어?”

유더는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키올레를 향해 화제를 돌려 물었다.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답이 들려왔다.

“아버지께서 주문 사항을 전달하고 오라고 시키셔서 온 것뿐이야.”

“왜 하인이 아니라 널 보내지? 집에서 그런 잡일을 자주 도맡아 하나?”

“우습게 보지 마! 아래 녀석들만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을 시킬 때만 나를 보내시는 거다! 대가도 받는 중요한 일이야!”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키올레가 발광했다.

“대가?”

“그래. 지금 쓰는 검보다 더 좋은 검을 받기로 했다! 너는 상상도 못할 명검이지!”

‘고작 수선 가게 심부름 따위에 검을 준다……. 아무래도 의상 수선 관련 심부름 따윈 절대 아닐 거란 냄새가 나는군.’

재단사와 보석상으로 위장하여 드나드는 치료사들. 디아카 가의 오래된 단골 가게. 그리고 그곳에 공작의 심부름을 직접 전달하러 온 키올레.

이 사이에 연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바보다.

“그래서, 그 전달 심부름은 이미 끝냈고?”

“전달하려고 기다리는 중에 네가 나타났잖아!”

“잘됐군. 그거, 나도 좀 보자.”

“뭐가 잘 돼? 내가 그걸 네게 왜……!”

“네 말대로 의상 수선 관련 심부름일 뿐이라면 봐도 문제없잖아.”

“그러니까 그걸 왜 보려고 하냐고! 아악, 만지지 마! 어디에 손을 넣어!”

또다시 멱살이 잡힌 키올레가 발버둥을 치든 말든, 유더는 손쉽게 그의 가슴 안쪽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키시아르처럼 온갖 마도구를 자연스레 소지하고 다니는 기인이 아닌 이상, 평범한 귀족 사내들이 귀중품을 넣어 둘 장소란 뻔하기 그지없었다.

곧 손끝에 바스락대는 종이 하나가 걸려 나왔다. 망설임 없이 그것을 펼친 유더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후 하고 숨을 흘렸다.

‘주문 사항은 무슨. 암호로 적어 둔 일정과 주소, 금액명이잖아.’

이전 생에서 카치안 황제의 곁에 있는 동안 질리도록 사용했던 암호 형식 중 하나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이, 이 파렴치한 놈……! 소문이 정말이었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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