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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79화 (479/805)

479화

어디서든 눈에 띄는 가게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을 향하여 시선이 몰렸다.

유더는 몇 번을 겪어도 그다지 익숙해지지 않는 그 눈빛들을 키시아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싱글싱글 잘도 웃어넘겼다.

“어서 오십시오, 펠레타 공작 전하. 외람되오나 혹 저희 가게에 미리 방문 예정 소식을 전해 주셨었는지요? 저희 측에는 들어온 소식이 없어…….”

서둘러 달려온 상인 한 명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눈치를 보는 척하고 있으나 말을 요약하자면 예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거물급 손님에 대한 간접적 힐난이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런 걸 하는 사람이던가? 하하하. 모처럼 놀러 나와 걷다 보니 이곳까지 발이 닿았을 뿐이네.”

물론 그따위 힐난에 굴할 이가 아닌 키시아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리 연락을 해야만 올 수 있는 곳이던가, 이곳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전하께서 원하시는 사항을 저희가 맞추어 준비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괜찮네, 괜찮아. 원하는 게 없다고 한들, 그 정도도 기다리지 못할 이로 보이나? 그것도 또 하나의 재미지!”

결국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진 이는 상인 쪽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면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저희 가게는 의상 재단과 수선을 기본적으로 다루고 있는지라 다른 곳처럼 이미 만들어진 옷들을 보여 드리기가 어렵다는 점을 부디 너그러이 양해하여 주십시오.”

“그런 건 다른 곳에서 이미 실컷 보았으니 걱정 말게.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이것 때문이니까.”

키시아르가 걸치고 있던 긴 코트 자락을 가리켜 보였다. 오늘 밖에 나갈 준비를 하며 그가 걸친 겉옷은 평소 자주 입던 사복들보다 훨씬 화려한 생김새였다. 가장자리마다 금실로 자수를 놓고 보석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마치 은하수를 보는 듯 빛나는 검은색 겉감에, 안감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짙은 붉은색. 길이도 길어 키가 그토록 큰 이가 걸쳤음에도 끝자락이 발목에 닿을 정도였다.

보통 남자들이 걸치는 코트보다는 귀부인들이 자주 걸치는 겨울용 외투처럼 자락이 풍성했음에도 그에게는 그 옷이 조금도 우습지 않게 잘 어울렸다.

“이건 돌아가신 선대 황후 폐하의 겨울 드레스를 고쳐 만든 옷이네. 하지만 생각보다 잘 입게 되지 않아서 말이야. 조금 더 수선하여 이번 파티에서 입어보려 하는데, 기한 내에 가능하겠나?”

예상보다 훨씬 엄청난 주문에 상인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유더 또한 내심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조금 특이한 형태의 옷이라 생각했더니, 선대 황후의 드레스를 고쳐 만든 옷이었다고?

겨우 정신을 차린 상인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일단… 공작 전하께서 어떤 방식으로 수선하시기를 바라시는지 말씀해 주셔야 답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 많은 걸 바라지는 않네. 여기 붙은 장식들을 다 떼어내고, 예복에 맞게 옷깃을 좀 더 세워 덧대어 주게. 그리고 허리 아래쪽 밑자락은 안감을 분리하여 같은 검은색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군. 분리한 안감은 버리지 말고 다시 따로 가져오고.”

“보석 장식들을 다 떼어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목깃의 진주부터 끝자락의 사파이어까지 전부 다.”

“그러면… 의상이 너무 허해지지 않겠는지요. 장식을 잘 떼어낸다 해도 붙어 있던 흔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괜찮네. 괜찮아. 그 문제는 걱정 말고, 그래서 할 수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정말 그대로만 하시겠다면… 몇 시간 내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답은 해 주었으나 상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키시아르가 원하는 대로 수선을 끝낸 옷이 파티용 예복으로 적절할 것 같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과연 마도구 사용에 능하다는 다 피엘의 재단사들답군. 내 이곳의 주인 슈피엘의 실력을 전부터 눈여겨보아 한 번쯤 꼭 만나 보고 싶었는데, 혹 지금 만나볼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슈피엘 님께서는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 예약 부름을 받아 외출 중이십니다.”

“슈피엘이 직접 부름을 받아 외출을? 디아카 공작이나 카치안 황태자께서 직접 부르기라도 했나?”

“아닙니다. 그… 뒤르망 남작님께서 연락을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여기에 오시는 줄 아셨다면 당연히 뒤로 미루었을 것입니다마는…….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뒤르망 남작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상인의 눈동자가 문득 무언가 찔리는 듯 옆으로 굴렀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건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 중 하나였다.

‘뒤르망 남작이라. 늙은 디아카 공작의 수족으로 유명했던 자 중 하나였었던가. 디아카 공작이 불렀다면 굳이 저런 식으로 찔려 할 이유가 없으니 진짜로 불려간 건 카치안 황태자 쪽이겠군.’

그렇다면 키시아르가 이곳에 와서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도 짐작이 되었다.

‘이곳의 주인을 카치안에게 보낸 건 디아카 공작이겠지.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오래된 황태자의 준비를 돕기 위해 보낼 정도로 믿고 있는 이라면… 진짜 재단사가 아닌 이들도 여기에서 위장을 시켜 보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케일루사 황제는 어제 식사 자리에서 카치안 황태자의 궁에 드나든다는 위장 치료사들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했다. 키시아르는 재단사와 보석상으로 위장하여 다닌다는 그자들을 찾기 위한 실마리가 아마 이곳에 있으리라 짐작한 듯했다.

“그래. 아쉽게 되었군. 옷을 고쳐 만드는 일이 몇 시간이면 끝난다니 그동안 나는 이곳에서 천천히 기다려도 되겠나? 오래 돌아다녔더니 팔다리가 상당히 아프군.”

키시아르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한 얼굴로 슬쩍 약한 척을 했다.

“이럴 때 누군가 주물러 주면 좀 나아질 것도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기왕이면 검은 머리칼의 미인이 돌봐 주기를 바란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는 말이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이어지자, 상인이 기겁하여 주변을 두리번대다가는 재빨리 안쪽에 위치한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따, 따라오십시오. 쉬실 만한 곳으로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

유더에게 보란 듯 기댄 사내가 상인이 보지 못할 웃음을 흘렸다. 유더는 그가 병약함을 어필하는 광경을 마병단원들이 보았다면 아마 모두 타이누에서보다 더욱 힘들게 웃음을 참았을 듯하다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고급스러운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한 상인은 마실 것을 가져다준 뒤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부르면 오겠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주 강력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드디어 둘만 남았군.”

“이제 제가 단장님을 주물러 드리면 되는 겁니까?”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시간이 많지 않지.”

유더의 태연한 질문에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의 주인이 황태자의 파티 의상 준비를 돕기 위하여 자리를 비운 듯하니 우리에겐 지금이 기회야. 내가 이곳에서 시간을 끌 테니 나가서 황태자의 궁에 드나든다는 그 수상한 치료사들의 꼬리를 잡아볼 수 있겠나? 무리는 하지 말고.”

그럴 줄 알았다. 타이누에서 붉은사슴 상단에 찾아갔을 때 나단 주커만이 했던 역을 이제 제가 다시 맡는 셈이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여 알겠다고 답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만, 문제가 생긴다면 큰 소리를 내어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아니. 그건 이걸로 하게.”

키시아르가 손에 낀 반지 중 하나를 빼내 유더에게 내밀었다.

“신호용으로 사용 가능한 일회용 마도구야. 보석을 누르며 한 바퀴 돌리면 내가 낀 반지 쪽에서 빛이 나지.”

비싼 주제에 일회용이기까지 한 놈을 여기에 두 개나 끼고 오다니. 재력과 용의주도함이 엿보였다. 키시아르의 약지에 맞았던 반지를 중지에 끼운 유더는 그래도 헐렁하다는 사실에 내심 기막혀하며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휴게실이 있는 복도는 사람 없이 조용했다. 가게의 규모는 크지만 돌아다니는 이가 거의 없는 탓이었다. 유더는 소리 없이 걸어 일하는 이들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1층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 대부분인 듯하니 역시 2층이나 지하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생각을 정리하며 막 계단이 있을 중앙부 쪽으로 조심스레 몸을 옮겼을 때였다. 그사이 들어온 듯한 새로운 손님이 심드렁한 걸음으로 기둥을 돌아 걸어오다가, 우연히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이였다면 유더를 발견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겠으나 그 손님은 조금 달랐다. 그는 기절할 듯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유더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했다.

“너… 너……! 네가 여긴 왜……!”

“…….”

이것 참. 유더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차며 겉으로는 무표정을 지켰다. 하필 만날 이가 없어 키올레 다 디아카를 여기서 만나다니. 운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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