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전설적인 상인, 칼 로르윅의 이름을 붙여 형성된 화려한 거리에서는 대륙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어렵지 않게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곳을 일컬어 황금과 비단의 거리라고도 불렀다.
유더는 보석상에 진열된 반짝이는 목걸이와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귀한 천, 타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물건을 진열해 둔 유명한 상단들의 간판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오직 즐거운 얼굴로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키시아르 라 오르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유행에 제법 변화가 있긴 했군.”
“그렇습니다. 여러 색의 천을 덧대고 자수와 보석을 단 전통식 예복이야 언제나 인기가 있었습니다만, 요즘은 반대로 흰 장미처럼 깨끗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원하시는 분들도 많으십니다.”
“그런 의상에 색이 들어간 보석을 조금 첨가하면 오히려 색이 많이 들어간 옷보다 더 시선을 끌게 마련이지요. 얼마 전 열린 안테이뉴 백작가의 자선 파티에서 체힐레 남작 부인이 입으셨던 이 드레스처럼 말입니다.”
상인이 가리켜 보인 예복은 주변에 전시된 다른 옷과는 느낌이 다소 달랐다. 강렬한 색을 마음껏 사용하여 만든 화려한 옷 사이에서 재질이 다른 흰 천들만을 사용하여 형태를 잡고 푸른 보석을 가슴 부근에 달아 놓은 드레스와 로브는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눈에 띄었다.
“체힐레 남작 부인은 그 파티에서 가슴의 푸른 보석과 똑같은 색의 끈을 허리에 묶고 나타나 일약 화제가 되셨죠. 고작 보석 하나와 끈 하나만으로 사교계 최고의 명사들이 입은 의상보다도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으신 겁니다. 그리고 그 옷을 준비해 드린 게 바로 저희 가게였지요.”
“훌륭하군. 감각이 몹시 좋아.”
“과찬의 말씀을요.”
키시아르의 칭찬을 들은 상인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웃었다.
“이와 비슷한 의상을 더 보여 줄 수 있겠나?”
“예. 물론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들이 유행하는 의상 예시를 몇 가지 더 보여 주기 위해 잠시 소란해진 사이,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하여 장난스레 물었다.
“혹시 내 보좌는 이전에 수확철 파티가 열리던 날,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그가 무슨 소리를 하기 위해 말을 걸었는지 드레스 디자인을 보고 짐작한 바였으므로, 유더는 조용히 대답했다.
“전 대륙에 단장님 취향의 새로운 예복 유행이 퍼질 날을 기대해도 되겠다고 하셨었지요.”
“그래. 내 말이 맞았지?”
그때, 키시아르는 유더를 포함한 마병단원들의 예복을 상당히 파격적으로 만들었다. 무조건 다양한 색을 써서 화려하게 만들던 예복에 대부분 흰색만을 쓰고, 금과 은을 쓴 단추와 자수 이외에 아무런 보석도 붙이지 않은 건 귀족들 사이에서는 본디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보통 그렇게 남다른 시도는 다른 이들에게 비웃음을 받거나 꺼려지게 마련이나 그 예복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예복들 사이에서 적당히 어우러지면서도 충분히 고급스러워 300명의 단원들이 단체로 입어도 조금도 우스워 보이지 않았었다.
상인이 보여 준 드레스는 그때 마병단원들이 입었던 예복의 형태와 몹시 느낌이 흡사했다. 누가 보아도 그 예복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솔직히 놀랍습니다. 그 파티 때는 아무도 저희의 예복에 관심을 두지 않는 줄 알았는데요.”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다네. 유행이란 본디 그렇게 시작되는 거야.”
상인들이 아예 유행이라고 확언할 정도라면 그런 옷을 지금 한두 명만 입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서부에서 열렸던 몇 번의 파티 때는 마병단 예복의 영향력을 느낀 적이 없어 조금 얼떨떨했으나, 키시아르는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제국의 모든 유행은 칼 로르윅과 수도에서부터 시작되지. 이곳에서 막 퍼지기 시작한 유행이 전 제국에 널리 퍼지려면 몇 년은 걸려.”
“그렇군요.”
“여기, 말씀드린 옷들을 더 가져왔습니다.”
그때, 무거워 보이는 옷과 그것을 받쳐 전시해 둘 기둥 형태의 옷걸이를 들고 나타난 상인들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잠시 멎었다. 키시아르는 한결같이 마병단 예복의 영향을 깊이 받은 의상들을 흡족하게 구경한 뒤 그중 하나를 짚어 주문하겠노라 말했다.
“치마 뒤쪽에 잡은 주름 폭을 좀 더 줄이고, 상의 위에 단 금색 천은 떼어내게. 새벽궁으로 보낼 생각이니 조금이라도 허투루 작업하지 말도록.”
“새벽궁 말씀이십니까?”
황후가 머무는 궁의 이름을 들은 상인들이 예상치 못한 이름이라는 듯 잠시 머뭇대다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 황후 폐하께 드릴 선물을 서부에서 따로 마련하지 못했으니, 이곳에서라도 마련할 생각이라네. 파티보다는 평소에 편히 입으실 수 있는 용도가 되었으면 좋겠군. 옷과 어울릴 만한 모자와 신발, 양말도 책임지고 함께 제작하여 마병단으로 소식을 보내게.”
“아…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황후에게 줄 선물 구매를 끝낸 키시아르는 다른 물건을 더 살피는 척을 하다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기 안쪽에 쪽지를 붙인 옷들은 전부 이번에 열릴 파티를 위하여 준비 중인 옷인가?”
“예. 그렇습니다.”
“정말 많군. 이 정도라면 내가 주문한 옷을 받으려면 몇 주 정도는 기다려야겠는걸.”
키시아르의 시선이 그 옷들에 붙은 쪽지를 한 번 가볍게 훑었다.
“아닙니다. 여기 있는 옷들은 전부 마무리 단계라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하겠사오니 염려 마십시오.”
“그렇다면 믿겠네. 아,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단추와 핀은 지금 바로 사고 싶은데 포장하여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은 단추와 셔츠 자락에 끼울 남성용 보석 핀을 함께 산 키시아르는 가게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그것을 유더에게 건네주었다.
“받게.”
“…이런 건 타이누에서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까 다른 가게에서도 주시더니 왜 또 사신 겁니까.”
“하나 정도로 되겠나? 나를 아는 이들이 오늘 우리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만들려면 지금보다 적어도 열 배 정도는 더 사야 할 텐데.”
“하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보자마자 너와 너무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쩔 수 없었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계속 그 생각만 들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고개를 기울이는 사내의 얼굴에서 뻔뻔한 즐거움의 감정이 빛처럼 뿜어져 나왔다.
유더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키시아르가 준 물건을 받았다.
이전에 받은 물건들도 언제 다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데 거기서 더 늘다니.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해도 이렇게 혼자만 뭔가를 계속 받는 일이 알려지면 마병단 전체 사기에 그리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듯해 조금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키시아르가 그 정도쯤을 생각지 않고 움직일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제게 무언가를 줄 때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 같아 도무지 강하게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타이누에서 애인 행세를 하며 선물 공세를 받던 때와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때와 지금은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즐거워하고, 더 난감하게 여겨질 수 있는 건 역시 그때와는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리라.
황제의 명을 수행할 겸, 그리고 파티 준비도 할 겸 칼 로르윅 거리로 온 이후 그들은 벌써 몇 군데의 가게를 돌았다. 따르는 이 하나 없이 단둘이서만 움직였지만 칼 로르윅에는 여흥 삼아 혼자서 구경을 나오는 귀족들도 많았기에 그것이 그리 이상하게 비치지는 않았다.
물론 키시아르의 눈에 띄는 외모를 알아본 귀족들이 간간이 가던 길을 멈추고 인사를 하거나, 상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펠레타 공작의 돈을 받아내고 싶어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은 방탕한 펠레타 공작이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돈을 탕진하러 이곳에 온 모양이라 생각했고, 키시아르의 곁을 따르는 유더를 그의 호위기사나 혹은 시종 정도로만 짐작했다. 그의 얼굴이 아직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가게에서는 어떠셨습니까.”
“파티에 참석할 옷을 주문한 이들 중 디아카 측과 연관된 가문의 이름도 제법 보인다는 수확을 얻었지. 우리 쪽에서 흘러나온 유행이라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야.”
짧은 사이 가게의 옷들에 붙여진 쪽지 속 정보를 모두 훑어 기억한 키시아르가 미소를 흘리며 답했다.
그는 가게에 들를 때마다 무언가를 주문하면서 곧 열릴 파티와 관련한 화제를 꺼내며 가게 상인들의 반응과 예약 준비 상황 등을 간략하게 알아내는 중이었다.
어찌나 화제를 잘도 돌려 가며 훑는지, 상인들은 자신들의 고객 정보가 어떤 식으로 이쪽에 파악되는 중인지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참석자들의 동향은 대충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이제 진짜를 들으러 가 볼까.”
“이번에는 어딜 가 보실 생각이십니까.”
“음. 디아카 가에서 대대로 의상 수선과 구매를 맡기는 곳이 있다네. 거길 가 볼 생각이야.”
그곳은 칼 로르윅 거리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을 통째로 차지한 ‘다 피엘’이라는 이름의 가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