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저, 디아카 경. 오늘 분의 치료가 다 끝난 모양입니다만…….”
키올레의 불쾌한 회상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 다른 기사들 때문에 갑자기 끝이 났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황태자의 침실 안쪽에서 정중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오는 중이었다.
그는 얼음 같은 표정으로 문을 열도록 명했다. 안에서 빠져나온 반백의 중년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늘 이리 배려하여 주시니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오늘 황태자 전하의 상태는 어떻지?”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오늘은 거울을 보여드려도 깨트리지 않으시더군요.”
그 증거로 사내는 올 때마다 소지하고 들어오던 작은 나무 손거울 하나를 들어 보여 주었다. 바로 전에 왔을 때까지는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던 물건이 오늘은 멀쩡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심성이 본디 홀로 우뚝 선 나무처럼 강인하시다 보니 외부의 치료가 잘 들지 않는 체질이셨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확연한 차도가 있었으므로 저녁 식사도 무리 없이 하실 수 있으실 듯합니다. 시종께서 말씀을 올리신 파티 이야기도 침착하게 들어주시더군요.”
“…….”
그 말이 정말이라면 짧은 시간 내에 정말로 대단한 변화를 일군 셈이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내심 놀라는 기색을 보였으나 키올레만은 코웃음을 쳤다.
“하! 진짜 그럴지 아닐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허풍은 누구나 떨 수 있으니 말이다.”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오늘도 전하께 이전에 말했던 것과 같은 치료를 했나?”
“그렇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촛불을 켜 두고 중얼대는 짓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욕설만 하지 않았을 뿐 아슬아슬하게 폭언에 가까운 발언에도 중년 사내는 그저 인자한 웃음만 지었다.
그가 한다는 ‘치료’는 신력도, 의술도, 마법도 아니었다. 어두운 곳에서 좋은 향이 나는 향초를 몇 개 켜 두고, 아픈 사람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이마나 몸을 문지르고 대화를 나누는 게 치료의 전부라고 들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치료가 정말 효과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황태자가 실제로 차도를 보인 건 사실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물론 디아카 경께는 그리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말은 때로는 그 어떤 신력보다도 좋은 치료가 되는 법입니다. 저는 어떤 말이 어떤 분들께 도움이 되는지를 조금 더 잘 알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 그 대단한 말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군.”
“제가 황태자 전하께 드리는 말씀은 늘 하나뿐입니다. 궁금하시다면 치료에 함께 참여해 보시겠습니까? 다음부터라면 그분께서도 허락하실 것 같습니다만.”
‘이 미천한 놈이…… 치료에 악영향을 미칠까 출입조차 하지 못하는 나를 지금 비웃는 건가?’
“…….”
키올레는 목 끝까지 올라온 닥치라는 말을 삼킨 다음 중년 사내를 노려보다 몸을 홱 돌려 앞서 걸어 나갔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서도 치료사들을 인정할 수 없으며 몹시 더럽게 여기고 있다는 마음이 아주 확실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인사도 없이 치료사들을 궁 밖에 밀어내고 나서 바로 돌아서 버리는 키올레를 보며 중년 사내를 따르던 젊은이 중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요, 현자님. 디아카 공작의 약속을 믿고 왔는데 정작 디아카 가의 자제가 저희를 저리 괄시하니……. 일이 잘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차라리 조금 들킬 위험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도 능력을 써 보는 게 어떨지…….”
다른 젊은이들이 모두 그 말에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현자라 불린 중년 사내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디아카 경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심상치 마십시오. 오늘 황태자 전하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그분께서 낫는 일만 생각합시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치료사들이 돌아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키올레는 카치안 황태자가 자신과 시종들을 부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위기사 임명 이후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한 황태자는 어두워진 안색에 유독 눈동자만 붉게 빛나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한참 미쳐 날뛸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본래 이런 분이었던가? 키올레가 막 그리 생각했던 순간, 황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치료사가 다녀가니 여러모로 머리가 맑아지는군. 마치 악몽 속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이야. 모두… 그간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겠군.”
아닙니다. 시종들이 제각기 입을 모아 한뜻으로 답했다. 메마른 입술 끝을 올린 황태자가 깊이 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리 나를 도와준 디아카 공작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않을 수 없겠지. 아직 몸을 움직이기는 조금 어려우나, 곧 열린다는 파티에는 반드시 참석하고 싶다. 그러니 디아카 공작께 준비를 도와 달라 전해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더불어 오늘은 식당에서 저녁을 들고 싶군. 제대로 준비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시종들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반색했다. 키올레 또한 명을 받들겠다는 뜻으로 경례를 한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정말 모든 게 치료사가 장담한 대로 되었다. 키올레는 여전히 그들을 인정할 수 없어 화가 났으나, 전할 소식은 전해야 했으므로 곧장 디아카 공작가 본저로 향했다.
몇몇 귀족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디아카 공작은 키올레가 가져온 소식에 놀라움을 표했다.
“정말이냐, 키올레? 그분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예.”
“그 치료사들이 정말 물건은 물건이군요. 기어이 황태자 전하마저 고치는 데 성공하다니…….”
디아카 공작의 곁에 있던 귀족들이 웅성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맨 처음에 그들에게 편두통을 치료받았던 뒤르망 남작도 있었다. 뒤르망 남작은 그 이후 지금도 그자들과의 연락을 도맡는 중이었는데, 황태자를 고치는 업적을 이루어냈다는 소식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처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소? 대단한 자들이라니까. 껄껄. 내 편두통을 고쳐 주었던 놈은 정신의 병을 고치기 어렵다 하여 빠졌다지만…… 새로 온 자가 실력은 더 대단하다고 들었소이다. 결국 해냈군.”
“하지만 아직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건 아니지. 안심하기는 일러.”
빠르게 기쁨을 가라앉힌 디아카 공작의 한마디에 귀족들이 일제히 웃음을 거두었다. 디아카 공작의 말에는 아무리 가볍다 해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이번 파티에서 마병단에게 주기로 한 ‘선물’은 잘 준비되고 있나?”
‘선물?’
키올레가 낯선 말에 의문을 느끼는 동안 얼굴이 익은 귀족 하나가 고개를 주억이며 ‘예. 문제없습니다.’ 하고 답했다. 디아카 공작은 옆에 내려두었던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여상히 입을 열었다.
“몬스터를 잘 잡아 그토록 기고만장해졌다니, 이쪽도 그에 걸맞는 선물을 주어야겠지. 꼬리를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 순간, 공작의 옆에 있던 키올레가 갑자기 눈에 띄게 움찔하며 스스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키올레?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만 들어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이전부터 오자마자 들어가지만 말고 이 아비가 하는 일을 좀 더 지켜보라 말하였던 것 같은데…….”
“압니다. 오늘까지만 그리하겠습니다.”
키올레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이제 보니 정말 피로했던 듯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기는, 그토록 싫어하던 평민 놈들을 오늘도 상대했을 테니 기분이 나쁘기도 할 터였다.
디아카 공작은 혀를 쯧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은 이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하였겠지. 들어가 쉬거라.”
키올레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물러나자, 공작의 곁에 있던 다른 귀족들이 앞다투어 그를 칭찬하였다.
“키올레가 요즘 철이 다 들었다더니 완전히 멋진 기사가 되었군요. 공작께서는 뒷일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으시겠습니다. 하하.”
“아직 멀었지. 더러운 것들을 참아내기 어렵다며 떼를 쓰는 녀석이 무얼.”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디아카 공작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귀족들은 눈치 빠르게 키올레의 칭찬을 하며 그의 기분을 돋우었다.
한편 키올레는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손목을 걷었다. 그가 급작스레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그곳에 찍힌 계약의 인에서 올라오는 미묘한 통증과 급격히 밀려올 듯 말 듯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졸음 때문이었다.
그간 수도 없이 영원한 잠에 빠질 뻔하는 위기를 겪으며 말수가 급격히 적어진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건 계약을 어길지도 모르는 위험 상황에서 오는 신호였다.
‘대체 왜지? 이번에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 흔적이 남겨졌을 때 서약했던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에게 유더 아일과 계약한 내용을 말한 적도 없고, 아버지나 귀족들 중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명령이나 폭언을 가한 적 또한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세 번째뿐이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는 앞으로 스스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유더 아일을 돕는다.’
“…….”
설마. 키올레의 머릿속에서 불길한 생각이 치솟음과 동시에 방금 들었던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몬스터를 잘 잡아 그토록 기고만장해졌다니, 이쪽도 그에 걸맞는 선물을 주어야겠지…….’
아무리 저 하고 싶은 대로 검만 휘두르며 살아온 인생이라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버지는 마병단에게, 정확히는 그 뒤에 있을 펠레타 공작과 황제에게 경고의 의미로 슬슬 한 방을 날릴 셈인 듯했다. 했던 말을 미루어 보아서는 아무래도 마병단에서 몬스터를 가장 잘 잡아 공을 크게 세운 이를 대상으로 삼으려 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문제였는데, 그의 손목에 남겨진 계약은 거기까지 생각해 버린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런 젠장……!’
들리지 않는 욕설이 비명처럼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왜 그러지, 유더? 누가 부르기라도 했나?”
“…아뇨.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휴가가 벌써 절반을 넘긴 현재, 그들이 와 있는 곳은 4벽에 위치한 칼 로르윅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