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76화 (476/805)

476화

“안녕하십니까, 디아카 경. 늘 노고가 많으시군요.”

“…….”

망토를 뒤집어쓴 인자한 인상의 중년 사내 한 사람이 광휘궁 입구에 선 키올레 다 디아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뒤를 따라온 세 명의 젊은이들도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태자가 머무는 광휘궁의 표식을 단 갑옷을 걸친 키올레는 제게 인사를 올리는 자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였으나 상대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언제까지라도 기분 좋게 기다릴 수 있다는 듯 그저 웃고만 있었다.

‘젠장.’

오늘도 결국 보이지 않는 기싸움에서 진 이는 키올레였다.

그는 미간을 구기며 어쩔 수 없이 그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광휘궁은 이름에 걸맞게 햇볕이 잘 들어오는 큰 창문이 수도 없이 많이 달려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대낮임에도 창을 온통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 두어 어두침침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입을 벌린 어둠 같은 복도 안쪽으로 들어서서 황태자가 머무는 침실로 향하였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키올레의 얼굴을 보고는 경례를 하며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났다.

키올레는 그곳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쪽에서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키올레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문을 열고 방문자들을 내려다보며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어가라.”

“오늘도 기분이 영 좋지 않으신가 봅니다. 허허. 잠시 후 다시 뵙겠습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웃음을 흘린 이가 안으로 먼저 들어서자, 그를 뒤따라온 이들 셋도 재빨리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여유가 넘치는 앞쪽 중년 사내와 달리, 키올레에게 주눅이 든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언제 봐도 하나같이 기분 나쁜 놈들.’

키올레는 닫힌 문 너머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혹 그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려 일부러 다른 곳을 보는 체했다.

그가 아버지의 명으로 근무지를 황궁기사단에서 이 광휘궁으로 바꾼 지도 벌써 며칠이 되었다. 오자마자 황태자의 가장 가까이에 갈 수 있는 호위 기사가 되었지만 키올레는 그것이 조금도 기분 좋지 않았다.

암살 시도를 당할 뻔한 이후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다던 카치안 황태자는 과연 그 말대로의 행동을 선보였다. 우선 광휘궁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 카치안 황태자가 뺨과 턱에 걸쳐 남아 있다는 ‘흉터’의 환상을 볼 때마다 발작하듯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유도 없이 수시로 불안해했고, 화를 내다가 혼자 틀어박히기를 반복했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도 안 되는 흉이 너무나 크고 선명하다고 말하니 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도 없이 별안간 욕설을 내뱉거나 식사를 거부하는 건 거의 일상이었다.

꼴이 이러하니 디아카 공작이 다른 이를 이곳의 호위기사로 삼지 않고 키올레를 보낸 것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황태자가 키올레를 그 누구보다도 격렬히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태자는 키올레를 볼 때마다 인사도 없이 제 방으로 도망쳐 문을 잠갔고, 키올레는 그때마다 은은한 짜증을 맛보았다. 멀쩡하던 시절 만났을 때는 잘도 웃으며 키올레에게 온갖 칭찬을 건네던 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격 같아서는 무어라 한마디 했겠지만 상대가 상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고역이었다.

키올레에게 어지간해서는 큰 벌을 내리지 않는 디아카 공작도 이 건만은 절대 마음대로 굴어서는 안 된다고 엄격하게 명했기에 바깥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점도 그의 답답함을 부추겼다. 몇몇 형제자매들은 키올레가 맡은 일이 몹시 중요한 일이라 여겨 얼굴만 마주치면 질시를 숨기지 않고 내보였는데, 실상이 이렇다는 걸 안다면 아마 ‘그러면 그렇지’하고 크게 비웃었을 터다.

그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아서 겉으로는 이 일에 아주 크게 만족하는 듯 당당하게 다녔으나 키올레는 정말로 이 일이 싫었다. 특히 방금 전처럼 정체 모를 평민 놈들을 안내하는 일은 더더욱.

황태자가 머무는 침실에 들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격을 얻은 그자들은, 키올레가 호위기사가 된 전후로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는 보석과 옷을 다루는 상인이라 말하였으나 사실 그자들은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입소문을 탄 ‘치료사’들이었다.

그자들은 디아카 공작과 절친한 뒤르망 남작의 편두통을 깨끗이 낫게 하면서 디아카 공작의 눈에 들었다. 공작은 본디 그런 사술을 믿지 않았으나 그자들만은 조금 다르다 여기는 듯했다.

키올레가 알기로 그자들이 처음 귀족들 사이에서 존재를 드러낸 건 아페토 가와 관련된 이들 몇의 병을 비슷하게 고쳤었던 때였다. 디아카 공작은 그들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뒤르망 남작과 비슷한 병을 앓는 이들을 몇 보내 보았는데, 그들조차도 치료사들의 실력을 크게 칭찬하자 마침내 정신의 병도 고칠 수 있는지 묻기 위하여 은밀하게 접선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평민 놈들이 정체를 숨기고 처음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키올레는 공기가 다 더러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특히 그자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는 키올레가 아무리 노려보아도 기가 죽지 않고 뻔뻔하기 그지없어 더욱 화를 자극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놀랍게도 그자들과 문을 사이에 두고 은밀하고도 짧은 대화를 나누어 본 이후 조금씩 접견을 허락했다.

이 키올레 다 디아카가 허락받지 못한 곳을 그자들은 마음대로 넘어 다닐 수 있다니.

그것도 모자라 이 치욕스러운 일을 다른 곳에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고, 그자들을 직접 데리고 오고 다시 내보내는 허드렛일마저 자신만 맡아서 해야 한다니.

평소라면 영광스럽게 여겼을 아버지와 황태자의 명이 이토록 싫었던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떻게 제가 감히 평민들이나 데리고 다닐 수 있겠느냐며 아무리 꺼리는 티를 내도 디아카 공작은 완강했다.

‘물론 더럽겠지만, 그자들이 효과를 보인 이상 어쩔 수 없다. 만약 효과를 보이지 못하는 것 같다면 그때는 네가 바로 그놈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너를 그곳에 보낸 것이다, 키올레.’

황태자가 디아카 가문에게 내보이는 감정을 가라앉히게 만들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정신이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치료를 하려면 그런 수라도 내어야 한다고 디아카 공작은 냉정하게 말하였다.

하지만 그놈들이 매일같이 황태자의 침실 안에서 대체 무슨 치료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도 없는데, 이걸 정말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단 내부에 들어가 대기 중인 시종 놈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잘못되면 잘못되는 대로 또 모두 내 탓이 될 게 아닌가?’

젠장. 이건 정말이지 그 마병단의 평민 놈이 걸어 놓은 서약보다도 더했다!

속으로 욕을 하는 동안 팔짱을 낀 손 안쪽에 슬쩍 드러난 붉은 점이 보였다. 그 마병단의 평민 놈, 유더 아일과 나눈 서약의 증거를 본 순간 키올레는 며칠 전 마주쳤던 그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날은 마병단이 서부에서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오며 열린 환영식이었다. 키올레는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았으나, 디아카 공작이 그를 불렀기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가 보니 얼굴이 익은 귀족들이 흙을 씹는 듯한 얼굴들로 앉아 있었다. 안 올 것처럼 굴더니 결국 온 걸 보면 거기서 일어난 ‘이변’이 모두에게 여러모로 신경 쓰이기는 했다는 뜻이었다.

키올레는 그날 몇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의 모습에 아버지만큼의 충격은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차에서 펠레타 공작과 함께 내려 당당히 이곳까지 걸어오던 유더 아일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참으로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그자가 서부에서 했던 일들은 이 수도에까지 널리 소문이 났다. 혼자서 거대한 몬스터의 목을 자른 대단한 자, 혹은 타이누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펠레타 공작과 매일같이 몸을 섞은 음탕한 남창.

사람들은 은밀하게 유더 아일이란 자의 진면목이 어느 쪽일지 궁금해했다. 누군가는 그것이 흥미로운 걸 좋아하는 펠레타 공작의 새로운 취미가 아니겠느냐고 말했고, 누군가는 힘을 지닌 평민이 위로 기어 올라오기 위해 공작을 유혹한 것이리라 욕했다.

그리고 실제로 다시 본 유더 아일은, 키올레 다 디아카가 보기에 그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중 어느 쪽이라도 말이 될 듯 느껴졌다.

처음 보았을 때는 참 귀신처럼 창백하고 기분 나쁜 놈이었는데, 서부에서 뭘 먹고 지냈는지 얼굴 때깔이 아주 좋아 보였다. 장벽처럼 거대하고 매혹적인 악몽처럼 사람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펠레타 공작 옆에서도 조금도 쪼그라들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놈. 정말 건강하기 그지없군. 욕을 하며 쳐다보고 있으려니 마치 그걸 읽은 것처럼 그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아주 짧게 마주친 순간 키올레는 마음이 들킨 줄 알고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그자는 키올레를 보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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