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시종들이 없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우유를 따르는 사내의 표정은 케일루사 황제가 나가던 때와 조금도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얼굴이 그렇다 해서 속내까지 그러할까.
유더는 그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고말고.”
숙련된 시종처럼 우유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완벽하고도 매끄럽게 잘 따른 키시아르가 스스로 이루어낸 결과물을 바라보며 답했다.
“말했잖나? 오늘은 소개를 하고 저녁만 먹으러 가자고. 폐하께서 네 얼굴을 익혔고, 좋은 인재라 판단하셨으니 지금은 그걸로 된 게지.”
“…….”
“폐하께서는 화가 나서 돌아가신 게 아니야. 그러니 혹 내가 마음이 상하였을까 싶어 걱정하지는 말게. 이걸로 치료 시도를 끝내겠다는 생각이 있다면야 또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겠지? 믿음이 담긴 눈동자가 웃음을 담고서 슬며시 휘어졌다.
그의 말대로였다. 케일루사 황제가 무어라 말하였든 이제 와 그를 치료하겠다는 시도를 얌전히 포기하거나 취소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모래를 밟은 것처럼 까끌까끌한 이유는, 치료 이야기가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사이좋은 형제답게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딱히 우애의 말이 오가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유더가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키시아르의 일면이었다.
이전 생에 알았던 키시아르가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볼 수 없었던’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유더는 혀에 차갑고 달콤하게 휘감기는 크림을 삼키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이 정도로 포기하고 물러날 마음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확실한 방법을 원하시는 모양이니, 저도 다음에 뵐 때까지 마땅한 답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좋아. 그리고 그 노력에 내 자리도 있어야 한다는 건 잊지 말게.”
후식을 모두 먹은 뒤 키시아르는 자연스레 일어나 유더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안내할 이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듯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시종장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괜찮아. 어차피 마차는 뒷문에 그대로 세워져 있을 테니 그대로 타고 돌아가면 그만이네. 그쪽에서도 내가 그리 돌아갈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안 오는 것이겠지.”
“…….”
그러나 뒷문으로 빠져나가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중, 키시아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여유가 잠시 흐려지며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기척이 느껴지는군.”
그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명의 시녀를 이끈 귀부인의 행차가 나타났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광경에 유더가 의문을 품은 동안, 귀부인 쪽에서도 이쪽을 발견한 듯 걸음을 멈추었다.
은발에 가까워 보일 만큼 옅은 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녀는 잠시 후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베일을 위로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펠레타 공작. 오늘 올 거라는 말은 듣지 못했던 것 같은데… 설마 벌써 황궁 출입 금지령이 해제된 건가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키시아르가 마주 웃으며 인사를 했다. 유더 또한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황후가 손짓을 하여 일어나도 좋다는 뜻을 표했다.
“말씀대로, 아직 해제된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어젯밤 자그마한 사고를 쳐 황제 폐하를 조금 놀라게 해 드렸더니 편지가 날아오더군요. 해서 잠시 방문하였습니다.”
“아. 설마 어젯밤이라면…….”
황후도 짚이는 부분이 있었는지 입을 조금 벌렸다가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세상에. 역시 그랬군요. 하기는, 공작 외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죠.”
“기대에 부응해 기쁘다고 말씀드려야 할지, 아니면 단숨에 저를 범인으로 지목하시는 현명함에 감탄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키시아르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짐짓 고민하는 척을 하자 황후의 뺨 한쪽에 볼우물이 살짝 패였다. 물에 젖은 꽃처럼 수심이 드리웠던 얼굴이 그제야 한결 밝아 보였다.
‘생각보다… 사이가 더 좋아 보이는데.’
황후와 대화하는 키시아르는 황제를 대하던 모습과는 또 다른 면에서 장난기가 많은 동생처럼 느껴졌다. 그건 황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늘 그림자나 조각처럼 상석에 조용히 앉아만 있는 모습만을 보았었는데, 키시아르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결 따뜻하고 다정해 생기가 넘쳤다.
황후는 온실에서 키워낸 꽃들을 태양궁에 몸소 가져다주기 위해 이곳까지 온 참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황후를 따르는 시녀들은 품에 종이로 곱게 싼 뭉치를 한아름 안고 있는 상태였다.
“이걸 전달만 하고 바로 돌아갈 생각인데, 황후궁에서 잠시 다과라도 들고 가겠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가는 폐하께서 이번에야말로 제게 영구 출입 금지 조치를 내리실까 두렵군요. 함께 온 이도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그래요. 하긴, 너무 내 생각만 하였군요. 그런데 함께 데려온 이는… 마병단원이군요?”
황후가 유더의 존재를 그제야 새삼 눈에 담았다.
“공작이 여기까지 데려올 만한 마병단원이라면, 혹 요즘 이야기가 제법 들려오던 그…….”
“예. 제 보좌인 유더 아일 경입니다. 오늘 폐하께도 인사를 드렸지요.”
키시아르가 상당히 뿌듯한 어조로 대답하며 유더를 향하여 웃었다.
“역시 그랬군요. 아주 젊다고만 들어 설마 했는데…….”
“황송합니다.”
유더는 고개를 숙여 담담히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조금 묘한 질문을 했다.
“아일 경도 그러면 오늘 폐하를 뵈었겠군요.”
“예.”
“펠레타 공작의 성정을 보아서는 급작스러운 자리에 예고 없이 함께하게 되어 어려움이 컸을 듯한데, 어땠습니까? 혹 식사도 함께했습니까?”
여러모로 중의적으로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어 답했다.
“예. 말씀하여 주신 대로 예기치 못한 자리였습니다만, 황제 폐하와 단장님께서 살펴 주신 덕에 아무 어려움도 없이 과분하고 영광스러운 기회를 누렸습니다. 염려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래요. 좋은 시간을 보냈다니 다행이군요. 폐하께서도 아일 경을 마음에 들어 하신 듯하니 더욱 당신에 대해 궁금해지네요.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을 텐데 아쉽군요.”
그녀는 도로 베일을 썼다.
“그러면 더 늦기 전에 이만 가 보아야겠습니다. 공작과 아일 경도 가시는 길 평온하시기를.”
인사를 하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나가기 직전, 키시아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지요, 오늘 여기에 단순히 혼이 나러 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황후의 걸음이 멈칫했다.
“이전에 수확철 축제 파티에서 뵈었던 때, 마지막으로 제가 드렸던 말씀을 혹 기억하고 계십니까?”
“…….”
“오늘 그 결과를 보여드리러 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요. 제 곁에 있는 이가 그렇게 말해 주었으니까요.”
황후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유더는 제 얼굴을 향한 시선을 느꼈으나, 베일 때문에 꾹 다문 입술 이외의 표정은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후 황후는 다시 몸을 돌려 떠나갔다. 시녀들 또한 그녀를 뒤따라 멀어졌다.
“수확철 축제 파티 때 황후 폐하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었습니까?”
“붉은 돌 회수 임무 이후의 상황에 대해 짧게 말씀드렸었지. 모든 게 다 잘되어 갈 거라고 말이야.”
키시아르가 나직하게 대답하며 마차를 찾아 걸었다.
“황제 폐하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나보다 더 크신 분이시라서 말이네.”
황후가 머무는 새벽궁에서 태양궁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그런데도 그 먼 거리를 마차 없이 몸소 걸어와 꽃만 전하고 황제는 만나지 않은 채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건, 아마 두 사람이 따로따로 마차를 타고서 환영식에 나타났다 돌아간 이유와 일맥상통하리라. 설명을 듣지 않고서도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미리 말해 두어야 황후 폐하께서 오늘 우리가 방문한 연유에 대해 깊이 알아보시고 같은 편이 되어 주실 테니, 추후 시도할 일에도 힘이 되지 않겠나?”
묘하게 씁쓸했던 기분이 그 말을 들은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유더는 새삼 제 곁에 있는 사내가 한 가지 행동도 허투루 하지 않는 이임을 깨달았다.
“…그 짧은 사이에 거기까지 노리고 말씀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으음. 내가 이 세상에서 황제 폐하의 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라서 둘 수 있는 비열한 한 수였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마차에 올라탄 키시아르가 비밀스럽게 씩 웃으며 속삭였다.
“바깥에서는 짐작도 못할 일이지만, 황제 폐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오직 그분뿐이라네. 날 무너뜨릴 수 있는 이가 내 눈앞에 있는 사람뿐인 것처럼 말이야.”
유더가 지닌 황후에 대한 인식은 이전 생이나 이번 생이나 사실 몹시 희미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황제에 대해 간접적으로 묻기 위하여 유더를 바라보던 그 순간만은 그 누구보다 명확하고 강인한 눈빛을 했었다.
케일루사 황제의 황후, 로사 파리아 라 오르.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 있던 기억 너머의 이름도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함께 선명해졌다.
“…….”
“그래서 말인데… 오늘의 저녁 식사를 잘 마무리하고 온 상으로…….”
점점 낮아진 속삭임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유더의 시야 속에도 오직 키시아르만이 남았다.
아직 마차가 황궁을 떠나지 않은 상태이니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더는 제 뺨을 감싼 손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웃음 띤 입술이 겹쳐지며 달콤한 향이 풍겼다.
직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과 계피맛 과자의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