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입을 다문 케일루사 황제의 뒤에서 시종장이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페하. 제가 얼마 전 보내드렸던 선물을 기억하십니까.”
키시아르는 황제에게 붉은 돌에 남아 있던 힘을 넣은 매개체를 선물했다. 사실 지금도 이곳 구석에는 그것이 어느 꽃병 속에 조금 들어 있는 상태였다.
황제의 시선이 그 하나의 꽃병 쪽으로 어렴풋이 향했다가는 다시 돌아왔다.
“…물론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보이지 않았어. 너도 알 텐데.”
“정말로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열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무어라 말하려던 황제의 입이 또다시 멈추었다.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황제를 대신하여 나선 이는 여태 조용히 서 있기만 했던 시종장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제 귀에는 그 말씀이 아일 경의 힘으로 폐하께 그 효과가 있었는지를 상자를 열어 보듯 알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자네의 귀는 멀쩡하네, 율리버. 그리고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보좌와 내가 함께 그 일을 시도해 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말이야.”
“…외부인에게 이 일에 대해 알리신 것으로도 모자라 전하께서 직접…….”
나이 든 시종장의 눈가가 조금 떨렸다. 너무나 당당한 말에 도무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듯했다.
‘당연하지만… 말을 믿는 기색은 아니군. 황가의 그릇과 관련한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데에 대한 당혹감이 더 클 뿐이야.’
유더는 그와 케일루사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그들이 느끼고 있을 감정을 짐작했다.
“네가 짐을 놀라게 했던 수많은 일들 중, 어젯밤 저지른 일이 생애 가장 큰 놀라움이 되리라 여겼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을 뒤집는구나.”
“이 정도로 벌써 평생의 가장 큰 놀라움이라 장담하시기에는 너무 이르십니다.”
“대체 무슨…….”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벌렸던 황제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에 가득했던 지친 기색은 여전하였으나, 그는 일단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되었다. 일단 들어는 보겠다.”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일단은 들어보겠다는 답이 나왔다. 이전까지 오간 대화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는 한 모양이었다.
“단장님. 죄송하지만 혹 제가 먼저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유더는 이쯤에서 스스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키시아르가 판을 깔아 주었다지만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그였다. 그의 말이 없다면 상대를 납득시킬 수 없을 터였다.
“그러게.”
“감사합니다.”
유더는 아직 한 입도 손대지 못한 후식 포크를 내려놓고 황제를 담담히 마주 보았다. 황제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일 경. 경이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짐은…… 솔직히 당혹스럽기 그지없군. 그대의 능력을 폄하함이 아니라, 이 사안은…….”
“이제 막 마병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가 갑자기 나선 사실에 느끼실 염려와 의문, 모두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유더의 침착한 대답에 황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어둠처럼 가라앉은 눈빛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움을 띠고 유더를 훑었다.
“당연하다 말하면서도 나서는 이유는?”
“제가 폐하께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나서야만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도움이라. 어떤 식으로 말이지.”
키시아르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케일루사 황제는 스스로의 몸이 나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유더는 그의 앞에서 천천히 오른손에 낀 검은 장갑 끝을 잡아 벗어 보였다.
드러난 손등 위로 선명히 드러난 나뭇가지 같은 검붉은 핏줄들을 보며 황제와 시종장이 동시에 눈살을 움찔 찌푸렸다.
“이것은 제가 붉은 돌의 회수 임무를 받들기 위해 갔을 때, 손으로 파고든 힘이 몸속에 번지면서 생긴 흔적입니다. 힘을 쓸 때마다 독처럼 번지는 통에 처음에는 치료해야 할 병증이라 여겨 고생하였습니다만, 언제부턴가 제 몸이 이 순수한 힘에 점차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유더는 천천히 제가 겪어 온 과정을 설명했다. 붉은 돌의 힘이 파고든 이후 초반에 느꼈던 고통, 이논을 만난 이후 점차 바뀌게 된 생각들,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여 매개체를 만들 때 생긴 사고를 수습했던 일과 마침내 주기를 맞이한 키시아르의 몸을 처음으로 열어 보았던 일까지도.
서부에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했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그 힘이 몸속에서 어떤 변화를 거쳐 의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는지 모두 말하는 동안 나머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더는 담담하게 마지막 말을 이었다.
“이 힘을 이용한다면 타인의 몸에 든 힘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장님과 시험해 본 대로라면 폐하께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확실하게 확언드릴 수는 없으나, 부디 제가 폐하의 몸을 살필 기회를 한 번만 주십시오.”
“…….”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든 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이는 키시아르였다.
“폐하께서는 제가 지닌 각성자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저는 유더의 힘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제 힘이 이 일에 상당히 상성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제가 함께 붙는다면 폐하께서도 한결 마음이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펠레타 공작.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케일루사 황제의 호칭이 공적으로 딱딱하게 바뀌었다. 키시아르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공할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시도를 그간 짐에게 알리지도 않고 하고 있었으면서 웃음이 나오느냐?”
“폐하. 저를 믿어 주시는 만큼, 제 보좌를 믿어 주십시오. 그가 있었기에 저는 어젯밤 제왕의 검흔에 필적할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의 힘이 닿은 뒤부터 저는 제 몸이 이전에 비해 한결 안정된 것을 느낍니다.”
“펠레타 공작.”
다시 한 번 공적인 호칭으로 키시아르를 부른 황제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짐의 몸은 짐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신께서 그대를 축복하시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으나, 짐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리라 생각지 않아.”
“폐하.”
“짐은 언제나 짐이 사라진 다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어.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점차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중이지.”
그 말이 지닌 무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말을 잘 잇던 키시아르조차 순간적으로 웃음을 잃었을 정도였다.
“……폐하.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일이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는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닌가?”
“…….”
“그렇다면 쓸데없는 시도를 하여 펠레타 공작이 다시 얻은 기회와 아일 경과 같은 장차 중요한 인물이 될 이의 힘을 헛되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돌아간다면 이 이상은 그 ‘시험’이란 것을 더는 하지 말았으면 하는군.”
황제는 완강했다. 그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이 이야기는 더 진행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여 그 이상의 대화를 차단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당연히도 여기에서 물러설 이가 아니었다.
“제가 펠레타에 있을 때,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말라 말씀해 주신 분은 누구셨습니까. 제가 저를 포기해 달라 말씀드렸을 때, 폐하께서는 결코 그러겠다 답하여 주시지 않으셨지요.”
황제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저 또한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유더는 혈육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키시아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뒤, 황제는 후식을 더 들지 않고 피로를 이유로 먼저 나가 버렸다. 남겨진 건 후식과 두 사람뿐이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으나 키시아르는 뻔뻔함을 십분 발휘하여 뒤늦게나마 후식을 모두 먹고 가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뚜껑에 마도구가 붙어 있어 아직 냉기가 잘 유지되어 있군. 열어 보겠나?”
여태 뚜껑 속에 담겨 있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후식은 키시아르가 장담했던 대로 특별하고 인상적인 요리였다. 손가락처럼 긴 계피 맛 과자와 과일 시럽을 올린 아이스크림이 둥근 공처럼 쌓여 모습을 드러냈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그것을 본 적이 있으나 먹어 보지는 않았다. 유더의 앞에 그것을 내놓고서 평민은 절대 먹지 못할 음식이라며 뻐기던 놈들 때문에 일부러 입도 대지 않았던 탓이었다. 인식이 좋지 않았던 요리를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물었다.
“먹고 싶지 않나? 배가 부르다면 들지 않아도 돼.”
“…아뇨. 생긴 모양이 특이하여 조금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키시아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후식에 유달리 기대를 보였던 걸 재차 떠올리자 과거의 짜증 나는 기억은 곧 사라졌다.
유더는 잠자코 스푼을 들어 단단하게 얼어 있는 크림을 떴다. 느리게 입에 넣어 본 아이스크림은 예상대로 몹시 차가웠으나 큰 거부감이나 불편함 없이 잘 넘어갔다.
“입이 차가울 테니 따뜻한 우유를 함께 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