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단순히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제가 그를 만난 뒤 얻게 된 것들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테니까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서 할 말로는 너무나 낯 뜨거운 단어 선정이었다. 유더는 도저히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칭찬이라면 익숙했다. 전무후무한 능력을 지니고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더를 싫어하는 이들도 그의 능력만은 이를 갈면서도 인정했고, 임무를 성공시킬 때마다 받았던 치하의 말들은 너무 많이 들어 나중엔 별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카치안 황제조차도 타국 사신들의 앞에서는 늘 유더의 능력을 제국이 지닌 가장 값진 보석이라 평하였었다.
하지만 키시아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같은 칭찬이면서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단 한 번도 유더 아일에 대해 타인에게 이렇다 할 말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직접적으로 듣는 평가와 타인에게 전해지는 평가는 본래 이토록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었던가.
유더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손에 쥔 칼과 포크를 계속해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지 않으면 침착하게 앉아 있기가 조금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 네 부관의 재능을 꽃피우는 데 성공했던 때조차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하니 상당히 낯이 간지럽구나. 아일 경의 능력이 물론 대단하기는 하나…….”
“능력만으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또 무엇을 얻었지?”
키시아르는 거침없이 답하였다.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확신을, 삶을 더욱 생생하게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잊고 있던 도전에 대한 마음을 일깨워 대담히 저지르게 해 줄 욕심도 얻었지요. 그리고…….”
말끝을 늘이던 사내가 작게 웃으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막 요리의 마지막 부분을 자르려 했던 유더의 칼끝이 어긋날 뻔했다.
키시아르는 이 자리에서 정말 그들의 관계를 아예 황제에게 공표라도 할 셈인가?
침묵 속에서 황제가 입술에 대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렸다. 흔들리는 찻물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움직여 안경 너머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라.”
낮게 중얼거린 황제의 눈빛이 어쩐지 묘해 보였다. 그러나 그 기색은 이내 고개를 돌리면서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래. 이제 아일 경의 식사도 끝난 모양이니 후식을 들이라 이르지. 그 이후에는 펠레타 공작과 아일 경과 더불어 조금 더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다른 이들은 모두 나가도록 하라.”
“예.”
황제가 후식과 다른 시종, 시녀들이 나갈 것을 명하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남은 건 후식 접시 두 개와 황제가 마실 새로운 차,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시종장뿐이었다.
보는 이들의 눈이 사라지자 황제가 이전보다 한결 명확한 목소리로 키시아르를 불렀다.
“키시아르.”
“예.”
“오늘 아일 경을 그저 인사나 시키러 데려온 건 아니로구나. 맞느냐?”
“맞습니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제발 그냥 목적을 말하거라. 그대로 계속 칭찬을 하게 놓아두었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서부에서 퍼진 소문에 대한 낯간지러운 오해가 완전히 기정사실로 되었겠군. 소문의 주인공이 너뿐만이 아니라는 걸 인지는 하고 있는 것이냐?”
낯간지러운 오해란 단어에 유더의 손끝이 잠시 움찔했다.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채 던진 한마디가 핵심을 꿰뚫기도 한다.
타이누에 있을 때 연인인 척했던 일은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일을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연기가 될 수 없었다. 휴가가 시작된 이후 일어났던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단장실로 뛰어 올라가 키시아르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전과는 모든 게 달라질 것임을 예감했었으나, 그렇다고 시작부터 케일루사 황제에게 관계가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유더는 그제야 이 만남이 치료 시도에 앞서 얼굴을 익히고자 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실은 저와 몸을 섞고 마음을 공유한 상대의 가족을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방금까지의 케일루사 라 오르가 한 사람이기 이전에 제국의 황제로 느껴져 그 사실을 반쯤 멀게 느꼈다면, 지금은 온전히 키시아르의 ‘형’으로 보였다.
급격히 치솟은 유더의 긴장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시아르의 웃는 얼굴은 밝기만 했다.
“물론 인지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진심을 말하였을 뿐인데 낯간지러우시다니, 약간 섭섭하군요.”
“농담이 아니다.”
“이쪽도 농담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부에서 돌아온 뒤 그 소문을 잠시간의 유희거리 정도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참입니다. 더 퍼져 준다면 오히려 두 손을 들고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지요.”
황제의 시종일관 침착했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대로 소강시킬 생각이 아니다?”
“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제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폐하와 제국, 그리고 유더에게도 해가 되지는 않을 생각이지요.”
케일루사 황제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키시아르를 닮은 붉은 눈동자 너머로 수많은 생각이 바쁘게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아일 경. 경도 이 말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었나?”
황제의 화살이 유더에게로 향했다. 아니라고 말하면 유더를 위해 편을 들어줄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유더는 물론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말을 처음 들었으나, 그처럼 당혹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후식이 담긴 접시 너머로 마주한 붉은 눈을 본 순간 그의 뜻이 파악되며 방금까지 치밀었던 모든 긴장이 일시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뇨.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 진심인가?”
서부에서 그들이 진행했던 연인 연극이 낳은 추문은 유더에게 이제 더 이상 분노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수도로 돌아와 그 여파가 번져 있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각오쯤은 이미 예전에 마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저 선명한 눈빛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도 그 추문이 자연스레 소강되기만을 기다릴 생각이 아니었음을 말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마 단장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그 소문을 이용하여 각성자들의 처우와 관련한 일로 끌어올리시려 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맞습니까?”
“폐하. 보십시오. 제 보좌가 이토록 현명합니다.”
“대답만 하거라.”
키시아르의 농담을 들은 황제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단장님께서 그 소문을 소강시키려 하시든, 더 이용하여 바라는 바를 취하시든, 끝까지 함께 따를 마음으로 동참하였으니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염려하여 주심은 감사드립니다.”
“…….”
키시아르가 유더를 보며 웃었다. 황제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유더는 그의 시선이 저와 키시아르 사이를 계속 번갈아 훑는 기색을 느꼈다.
“그래. 경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각성자와 관련한 일의 모든 우선권을 펠레타 공작에게 주겠다 약조하였었으니 짐이 무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
말을 잇다가 만 황제의 시선이 키시아르 쪽에서 유독 오래 머물렀다.
“키시아르.”
“예, 폐하.”
“혹 서부에서의 그 소문은……. 아니, 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예.”
“이제 그만 진짜 목적을 말하거라.”
케일루사 황제의 목소리에 담긴 피로함을 인지했는지 시종장이 조용히 찻잔에 따뜻한 찻물을 더 따라주었다. 이 이상 대단한 이야기가 나오리라 생각지 않는 기색이 확연했다.
그리고 키시아르는 단 한 마디로 황제의 깊은 피로를 일시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방금 드린 말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제가 유더에게 얻은 것들을 폐하께서도 얻으실 수 있었으면 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확신, 의욕, 도전 말인가?”
확인을 위해 내뱉은 케일루사 황제의 중얼거림을 들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지금의 폐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겠지요.”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살아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강한 육체, 그리고 멀쩡한 그릇.
유더는 제가 생략된 말을 알아들었듯, 황제와 시종장 또한 그 뜻을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시종장이 여태까지의 침착함을 벗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고, 케일루사 황제 또한 방금까지 내보였던 표정은 간곳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짐이 지금 제대로 말을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군. 아일 경의 능력은 그런 분야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그보다, 아일 경도 이 사안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물론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래도 될 이라 판단하여 제가 직접 말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