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71화 (471/805)

471화

케일루사 황제의 말투는 처음 만났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황제로서 써야 할 공적인 언어들을 제외한 그의 목소리는 키시아르와 생각보다 많이 닮은 듯 느껴졌다.

“대삼림의 영웅이라 불린 이를 만나기에는 협소한 자리이나, 아마 경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일지 예상하고서 불려 나온 건 아니리라 짐작한다. 이 자리는 그저 하나뿐인 동생과의 식사를 위한 자리일 뿐이니 그리 어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끼게 된 유더 아일이 분명 자의로 왔을 리 없음을 알고 있으니 황궁에서 지켜야 할 복잡한 각종 예의범절을 못 지킨다 해도 대충 눈감아 주겠다는 의사 표명 정도 되리라.

‘과연 가족은 가족인가 보군. 설명 한마디 없이도 키시아르가 무슨 행동을 했을지 바로 짐작하는 걸 보니.’

“황송합니다.”

유더가 내심 감탄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자마자 키시아르가 짐짓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경‘도’라니요. 너무하시는군요 폐하. 저는 분명 이 자리에 대해 폐하와 제 보좌 모두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였습니다만.”

“설명이야 했겠지. 매번 어려워하는 얼굴로 이곳에 오고는 했던 너의 부관도 늘 설명은 듣고 나서 왔을 테니 말이다. 주변 사람들을 알면서도 어렵게 만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지 않느냐?”

“하하. 그리 말씀하시면 보좌가 오해하겠습니다.”

“진실을 듣고서 하는 생각을 오해라 부르는 건 어울리지 않는 말인 듯싶구나.”

황제의 앞에 있는 키시아르는 평소와 달리 정말로 형님 앞의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안경을 쓴 예민한 학자 같은 얼굴을 해서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말솜씨를 선보이는 케일루사 황제의 모습을 보며, 유더는 그에 대한 평가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상향 조정했다.

여태까지 케일루사 황제가 편지나 서면으로 처리했던 일들을 지켜보며 그가 글과 말로 주변을 움직이는 수완이 상당하다는 생각은 이미 많이 했었다. 하지만 키시아르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니 이건 그냥 상당한 정도가 아니었다.

키시아르도 말로는 어디 가서도 지지 않는 인물인데 그 혈육은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해 보이지 않았다.

서로 닮은 듯 닮지 않은 형제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뒤쪽 문이 열리며 음식이 담긴 쟁반이 테이블 위로 차례차례 올라오기 시작했다. 화려하지 않은 그릇에 제철에 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정갈한 음식들을 보며 유더는 문득 카치안 황제에게 대접받았던 황궁 음식들을 떠올렸다.

그때 본 음식들은 무조건 크고 화려한, 그리고 값비싼 조미료를 많이 쓰는 음식들 뿐이었다. 계속되는 이상기후와 재앙 등으로 인해 식자재가 날이 갈수록 귀해지던 때였는데도 카치안 황제는 그런 문제에서만큼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화려한 황궁 요리는 곧 카치안 황제의, 그리고 당시 오르 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같은 곳에서 차려지는 비슷한 요리임에도 그것을 차리라 명한 황제가 누구인지에 따라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

눈앞의 요리가 마치 케일루사 황제의 존재를 대변하는 듯 느껴져, 유더는 새삼스레 그의 치료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여기 와서 황제의 사적인 모습을 먼저 보기로 한 건 확실히 괜찮은 선택이었다.

“자, 그러면 식사를 들도록 하지. 아일 경은 이곳에서의 식사가 처음일 테니, 시중을…….”

황제가 손님을 상대로 내놓는 식사는 아무리 간소하게 차려도 사이사이 지켜야 할 규범이 제법 까다롭게 마련이었다. 유더가 그 부분을 잘 모르리라 짐작했을 황제는 뒤에 선 시종 중 한 사람을 부르려 했다.

매우 배려 깊은 모습이었으나 문제는 유더가 이미 황궁 예법을 대부분 몸에 익히고 있다는 점이었다.

‘적당히 평범해 보이면서도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를 차리려면 어디까지 모르는 척을 해야 하지.’

오기 전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이것도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유더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리며 슬쩍 눈썹을 모은 순간, 키시아르가 손을 들었다.

“그건 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온 이니 제가 알려 주지요. 폐하께서는 염려치 마시고 편히 드십시오.”

뜻밖의 말에 케일루사 황제와 유더의 시선이 동시에 키시아르에게로 몰렸다.

“……그러면 아일 경이 오히려 불편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처음 온 이의 입장에서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매일 얼굴을 본 제가 더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유더?”

빛나는 미소 앞에서 유더는 침묵했다. 키시아르가 아무래도 그 빠른 눈치로 제가 뭔가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저는 어느 쪽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는군요.”

동생의 뻔뻔한 대답을 들은 황제는 잠시 이마를 누르듯 안경을 치켜올리더니, ‘편한 대로 하거라.’ 하고 말하고는 먼저 스푼을 들었다. 더 말해서 통할 부분과 아닌 부분을 파악하는 능력만 보아도 그는 과연 몹시 현명하였으며 키시아르 라 오르에 대해 정말 잘 알았다.

키시아르는 원하는 바를 이룬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고는 말없이 제 앞에 곱게 접혀 있던 흰 천들을 폈다. 보통 평민들은 식사할 때 천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귀족들은 반드시 하나를 사용한다. 그건 옷 앞을 가리거나 무릎에 펴서 귀한 옷에 음식물이 묻지 않도록 하는 용도였고, 식사 후에는 입을 닦는 용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황제의 식사에서는 한 번에 세 개를 썼다.

첫 번째 천은 무릎 위에, 두 번째 천은 상의 목 사이에 넣어 가슴과 상의를 가리도록, 그리고 마지막 천은 자주 사용하는 손 방향 쪽에 놓아두어 중간중간 손을 닦거나 나머지 두 개의 천이 더러워졌을 때 예비용으로 사용했다.

설명 없이도 그러한 모습이 보이도록 정확하게 움직이는 키시아르의 모습을 보며 유더는 눈치껏 알아서 조금 느리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전채와 중심이 되는 식사 사이에는 반드시 천을 물에 적셔 한 번 더 손을 닦는 규칙도, 포크와 스푼, 칼 등을 사용할 때의 자세와 순서도 거의 비슷한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신경이 쓰이는 듯 유더를 몇 번 지켜보던 황제는 그가 아무런 문제 없이 키시아르를 잘 따라 하는 듯 보이자 이내 더 쳐다보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유더는 그의 앞에 놓인 식사가 제 앞에 놓인 것보다 훨씬 양이 적고 부드러운 재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말하는 모습만 보면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보여도 역시 식사조차 부담스러울 만큼 몸이 좋지 않은 상태가 맞았다.

“오늘 내가 널 부른 이유를 짐작하겠느냐.”

식사 도중, 황제가 키시아르에게 말을 걸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할 낌새였다.

“글쎄요. 황궁 출입 불허 명령을 철회해 주시려는 게 아님은 알겠습니다만. 어젯밤 일로 꾸짖으시는 건 편지로 끝내 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바로 그 어젯밤 제왕의 검흔이 하나 더 생겼다는 놀라운 소식에도 디아카 공작과 황태자를 비롯한 이들은 참으로 조용하더구나. 그들이 이리 조용할 때는 언제나 그다음에 시끄러운 일들이 생기고는 했지. 그것이 염려되어 너의 시선을 빌리고자 한다.”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나 봅니다.”

어젯밤 일어난 일을 보고 생각을 철회한 게 아니느냐는 뜻이 담긴 얄밉고 능글맞은 대답에도 황제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들고 있던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입가를 느리게 닦아내면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은 아니다. 곧 황궁에서 열릴 마병단의 치하 파티를 앞두고 그곳에 참석할 많은 이들이 한창 바쁘게들 의상을 새로 맞춘다, 보석을 산다 하며 준비하는 듯하니, 너도 준비하는 김에 조금 살펴보라 부탁하는 것뿐이니까.”

“치하를 받을 이들은 오히려 조용한데, 상을 받지도 않을 이들이 더욱 바쁜 모양이군요.”

“아주 바쁘지. 황태자가 머무는 궁에 정체불명의 새로운 의상 재단사와 보석 상인들이 드나드는데도 제대로 된 보고가 올라오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 말에 키시아르가 고기를 자르던 손길을 잠시 멈추었다.

“그렇군요. 하긴, 광휘궁이 한동안 지나치게 조용하다 싶었습니다.”

황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 날카로운 웃음이 떠올랐다. 유더는 케일루사 황제가 돌려 말한 이 정보를 키시아르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그 눈빛을 보며 눈치챘다.

“내게 들어온 바깥의 소문 중, 그 새로운 의상 재단사와 보석 상인들의 정체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부터 수도 내에서 편두통을 비롯한 난감한 지병을 잘 고치기로 입소문을 탄 이들이라더구나. 신성력도 통하지 않는 병증에 참으로 효과 좋은 치료법을 알고 있다지.”

“사실이라면 디아카 공작이 몹시 관심을 보일 만한 자들이겠군요. 혹 황태자께서도 이번 파티에 참여하십니까?”

“그래. 어제 참여하겠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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