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그의 말대로 키시아르가 지닌 힘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로도 적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럴 때 더욱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이미 몸소 확인한 바였다. 만약 그와 함께 어제와 오늘 했던 것처럼 힘을 합쳐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힘을 케일루사 황제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확실히 성공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질 터였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그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감정적으로는 그러마고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키시아르는 그가 대답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는 듯 조용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 얼굴에 그가 어젯밤 내보였던 걱정과 아픔은 이제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단단한 자신감과 신뢰, 결심이 깃든 눈빛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유더는 결국 느리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폐하께서 과연 그 말씀을 들어 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알겠습니다.”
“좋아. 폐하를 설득하는 건 당연히 내 몫이지. 걱정 말게.”
키시아르가 기쁜 얼굴로 유더를 끌어안았다.
“도울 기회를 주어서 고마워.”
“…….”
유더는 벅차게 뛰는 심장박동이 피부를 통해 맞닿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모처럼 맛있는 걸 먹겠군. 태양궁 요리사인 막시아는 특별한 후식들을 만드는 솜씨가 아주 좋으니 기대해도 좋아.”
분위기를 바꾸어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일어난 키시아르가 펜을 찾아 돌아섰다. 유더는 그가 답장을 모두 작성하고 전서조의 다리에 다시 넣어 날려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단장님.”
“음?”
유더가 제게 무언가 한소리를 할 것이라 여겼는지 돌아보는 얼굴에 실린 웃음이 짓궂었다. 하지만 유더는 이미 결정한 일에 대해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었다.
“제가 이 일에 반대했든, 어쨌든 이번 일은 제가 드린 기회 따위가 아니라, 단장님께서 황제 폐하를 위하여 이루어내신 능력의 발전이 일군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시험해 보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해낸 일을 수단 따위로 지칭할 수는 없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키시아르가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얻어낸 결과라고 부르는 쪽이 맞았다.
잠시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조금 멍하니 유더를 바라보던 사내가, 이내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큰일이군.”
“예?”
“이미 모든 걸 다 빼앗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은 게 있었던 모양이지.”
그 말뜻을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다가온 사내가 유더에게 깊은 키스를 했다.
***
키시아르를 호출할 때까지만 해도, 황제의 머릿속은 몹시 드물게 평화로웠다. 그는 동생을 맞이하기 위해 태양궁 내로 들어올 수 있는 비밀 통로 주변에 시종장을 보내 두었고, 황궁 요리사장 막시아에게 모처럼 격식을 갖춘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 일렀다.
키시아르 쪽에서 답장을 보내 자신의 보좌와 함께 가겠다고 답했을 때도 황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가 부관 나단 주커만의 재능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아보고 가르치던 시절, 대장 놀이를 하는 소년처럼 어디든 데리고 다녔던 모습을 기억하던 덕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자에 대해 궁금한 점이 꽤 많고.’
마병단의 단장 보좌라는 다소 특이한 직책을 받은 유더 아일은 이번에 서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단신으로 거대한 몬스터를 홀로 처리했고, 키시아르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온갖 핑계를 대며 제 보좌를 치료하고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다.
타이누로 넘어간 이후에는 그와 키시아르 사이에 다소 엄청난 염문이 돌기도 했는데, 황제는 그것이 당연히 타인 공작가 처리 작전의 일환이리라 여기면서도 참 별일이라 생각했다.
그래. 별일이다. 그 유더 아일이란 자와 키시아르가 엮인 모든 일들이 황제의 눈에는 몹시 드물고 묘한 일로 비쳤다.
그 때문에 환영식 때도 마병단 쪽을 슬쩍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키시아르와 마차에서 함께 내린 검은 머리 청년이 아마도 그 유더 아일일 것이리란 추측 외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전에 붉은 돌 회수 임무 이후 만나 보았던 짧은 기억만으로는 누군가를 파악하기는커녕 얼굴을 알아보는 것조차 어려웠던 탓이었다.
어차피 이번 일의 공을 치하하는 날 그자를 보기 위해 제대로 시간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키시아르가 먼저 데리고 온다면 그도 나쁘지 않았다.
‘키시아르의 사람 보는 눈은 믿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황제는 그가 아직 스스로 운신할 힘이 남아 있을 때 동생의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켜 온 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의 안도와 씁쓸함을 느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러한 감상은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뒤집어지고 말았다.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더는 짐마차로 위장한 마차에서 내렸다. 일전에 붉은 돌 회수 임무 이후 한 번 본 적이 있는 케일루사 황제의 시종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이 타고 온 마차는 황제 측에서 보낸 것이었다. 마차는 마병단이 있는 7구역에서 바로 1구역까지 가지 않고, 3구역에 존재하는 비밀 통로를 따라 황궁으로 왔다. 얼핏 보아서는 평범한 길처럼 보이지만 통과하는 형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어느새 원래의 길로 되돌아가고 마는 통로였다. 유더는 이전 생에서 수도 없이 지나다녔던 비밀통로를 다시 지나치는 동안 느낀 묘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제법 노력해야 했다.
키시아르가 시종장을 향해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마찬가지네, 율리버. 폐하께서는?”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어서 가야겠군. 아, 그 전에… 이미 서로 한 번 보았었겠지만 오늘은 사적인 자리이니 새로이 다시 소개하지. 유더, 이쪽은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이전부터 그분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시종장 율리버다. 율리버. 이쪽은 내 보좌인 유더 아일 경. 아마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잘 기억해 주게.”
흰 머리칼을 흐트러짐 하나 없이 뒤로 넘긴 노인의 시선이 유더를 훑었다. 무척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동시에 아주 많은 곳이 따끔하게 느껴질 만큼 빠르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이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정말 만만한 자가 아니군.’
유더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얌전히 무표정을 지켰다. 그러자 시종장은 언제 유더를 살폈냐는 듯 이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먼저 인사했다.
“대삼림의 영웅을 이리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일 경. 저는 황제 폐하의 시종장, 율리버 아르크라고 합니다.”
“마병단의 유더 아일입니다.”
이전에 붉은 돌 회수 임무 이후 여기에 왔을 때, 시종장은 자신의 직책을 자세히 밝히지 않고 키시아르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그저 길만 안내하고서 사라졌었다. 다시 볼 이들이 아니라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키시아르를 사이에 두고 그와 또다시 마주쳤다. 시종장은 굳이 대삼림의 영웅이란 단어를 인사에 섞어 자신이 유더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전하기도 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건 약간의 경계,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호의였다.
‘아마도 케일루사 황제가 나에 대해 가진 인식도 그와 같겠지.’
아랫사람이 보이는 태도는 대개 그의 윗사람이 지닌 생각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 사실이 새삼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자각하게 해 주었다.
키시아르는 아주 익숙하게 시종장을 따라 궁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통로만 귀신같이 골라 그들을 안내한 시종장은, 마침내 어느 문 앞에 서서 정중히 노크를 했다.
곧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내부가 드러났다.
“어서 오거라.”
본래는 식당이 아니라 서재였을 법한 공간이었다. 꽃으로 장식한 테이블보를 얹은 식탁이 책장 사이의 빈 공간 한가운데 있는 광경이 다소 묘했다.
황제는 그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환영식에서 보았을 때보다 한결 마르고 피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몸이 좋지 않은 게 티가 나는데 환영식 때는 어떻게 그것을 감추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시종장은 자연스럽게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인 뒤 의자 뒤에 섰다. 식사를 돕기 위해 자리한 시종과 시녀가 있기는 했으나 그 수는 보통 평범한 수도 귀족가에서 식사 때 대기시키는 하인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적었다.
황제의 식사 장소라기에는 참으로 소박하다 못해 쓸쓸할 지경이었지만 키시아르는 조금의 놀라움도 표시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가 상석에 앉아 있는 황제에게 인사했다.
“폐하. 편지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자리에 함께하게 될 제 보좌 유더 아일 경입니다.”
“마병단의 유더 아일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유더는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일어나 앉도록.”
황제가 조용히 입을 열어 명한 뒤, 유더의 얼굴을 지그시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지. 아일 경. 이리 보니 기억이 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