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친애하고 존경하는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강제 휴가에 대한 항의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고 하시는군. 워낙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사고가 발생할 뻔한 탓에 지금은 주변에 줄을 쳐 두었다는 모양이야. 이런. 다들 제법 고생했겠는걸.”
휴가 3일째의 한낮.
유더는 3일 만에 처음으로 날아들어 온 전서조가 전달한 편지 속의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읽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그 상태에서 키시아르의 듣기 좋은 목소리까지 듣고 있자니 수면가루라도 뿌린 듯 눈이 무거웠다.
‘오늘은 초대 타인공작의 연구일지 해석본을 읽을 생각이었는데……. 어제 잠을 설친 탓인가.’
어젯밤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돌아온 이후, 그는 흥분과 염려 속에서 반쯤 잠을 설쳤다. 자신이 본 엄청난 기적에 전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운을 흡수한 직후 그런 일을 했는데도 그의 몸이 괜찮을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밤새워 지켜보아도 키시아르의 몸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서도 뺨과 입술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다리 사이까지도 혈색이 지나치게 펑펑 돌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한번 그의 몸에 흐르는 힘을 개방해 살폈고, 하는 김에 더 나아가 키시아르의 몸에 뒤엉켜 있는 작은 힘의 줄기 하나를 각성자의 힘으로 움직여 보는 일도 시도해 보았다.
혼자서 했다면 몹시 조심스럽고 어렵게 진행되었겠지만, 키시아르가 이번에도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도운 덕에 생각보다 훨씬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이대로 몇 번 더 시도해 보면 혼자서도 할 수 있을 만큼 요령을 잡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면 움직이는 걸 넘어 직접적으로 엉킨 힘을 풀고, 더 단단히 지지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균형을 흐트러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내 쪽에서 고쳐 볼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계속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유더가 고개를 돌리자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키시아르가 그제야 짐짓 진지하게 덧붙였다.
“내게 항의의 목적이 아주 없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오해는 말게. 어젯밤 했던 일은 내가 꼭 지키고 싶던 약속을 행하기 위해서였고, 폐하께서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시니까.”
유더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낮게 중얼거렸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강제 휴가를 명령받았다 말하던 키시아르의 반응이 얌전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가 뭔가를 할 셈이란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는 어젯밤의 기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만족스러웠기에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직접 편지를 보내 주실 정도라면… 폐하의 상태는 괜찮으신 겁니까?”
“그분의 상태가 걱정되나?”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반문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태양궁에서 들까.”
그 말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던지, 키시아르의 어지간한 능청스러움에는 면역이 있다 여겼던 유더조차 순간적으로 말뜻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예?”
“이 편지에 그렇게 쓰여 있거든. 그렇게 할 일이 없다면 와서 이전에 불미스러운 일로 함께하지 못했던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이네.”
“황제 폐하께서 단장님의 황궁 출입 금지 명령을 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 그 명은 계속 유지되는 상태야.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당당하게 황궁에 가는 것과, 폐하의 부름을 받아 몰래 들어가서 밥만 먹고 돌아오는 건 조금 다르지.”
그러니까 그건 즉, 키시아르에게 비공식적인 루트로 황궁에 잠깐 방문하라는 뜻을 황제가 에둘러 적어 두었다는 말이었다.
이전 생의 유드레인 아일도 카치안 황제에게 비슷한 명을 많이 들었었기에 뜻을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카치안 황제는 식사 따위의 따뜻한 목적을 이유로 대지는 않았었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녀오십시오.”
“다녀오라니. 방금 말하지 않았나? 오늘 저녁은 태양궁에서 들자고. 그건 내 보좌까지 포함된 말이었는데.”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의 말뜻과 제가 이해한 뜻이 약간 어긋났음을 깨달았다.
‘…황궁에서 들 저녁 식사에 같이 가자고?’
아무리 휴가 중이고 비공식적인 만남이 될 터라지만, 황궁은 이런 식으로 쉽게 놀러라도 가는 듯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게 고작 마병단 단원일 뿐인 유더 아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케일루사 황제의 몸을 고치기 위해 언젠가 만남을 요청하게 되기는 하겠지만, 그 첫 만남이 이런 식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유더는 당혹을 삼키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저까지 부르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물론 아니었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키시아르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이런 식으로 들어갈 때마다 대개는 나단과 함께 갔었으니, 그게 이번에 네가 되었다 생각하실 뿐 이상히 여기진 않으실 거라네.”
“주커만 경과 거기서 식사까지 함께하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자주 했었네. 예전에는.”
대답할 말을 잃게 만든 키시아르가 유더의 표정을 보며 눈을 휘었다.
“어려워하지 말아. 폐하의 몸을 고쳐 볼 셈이라면, 그분에 대해 먼저 아는 쪽이 우선이지 않겠나?”
“…….”
“어제와 오늘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점이 있다면, 타인의 몸에 존재하는 힘을 보고 움직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 일이 나와 우리에게 비교적 쉽게 작용한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 대해 충분히 잘 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네.”
그 판단 자체는 유더도 어렴풋이 했던 바였다. 침묵하는 유더의 뺨을 키시아르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다 가까이 다가와 입을 맞추었다.
“어차피 폐하께도 이 일을 말씀드리고 마음의 준비와 결정하실 시간을 드려야 할 테니, 시작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이런 일을 이야기하는 자리로는 오늘과 같은 비공식적인 자리가 가장 좋은 법이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유더의 무겁고도 힘 있는 대답에 키시아르가 설핏 웃었다.
“좋아.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더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네.”
“무엇입니까.”
“폐하의 몸을 치료하기 위한 일에, 나도 함께하겠다고 말씀드릴 생각이야.”
순간 유더의 머릿속이 잠시 멈추었다.
죽을 운명인 케일루사 황제를 살리고 그의 몸을 치료하겠다고 처음 결심하게 된 뒤로 그는 줄곧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상상해 왔다. 하지만 거기에 키시아르가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단장님도 함께라니, 말도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지? 이제까지 우리가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게.”
유더의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얼굴을 한 사내가 부드럽게 답했다.
“혼자서는 어려웠던 일도, 힘을 합치니 한결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 네가 하고자 하는 일과 내 힘은 상성이 몹시 좋아. 내 몸으로 먼저 시험하여 충분히 통한다는 걸 확인했으니, 폐하께도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설마 그걸 확인하시기 위해 힘을 써 보셨던 겁니까?”
“그래. 내 힘이 통하지 않는다면 물러나려 했지만 만질 수 없는 대상에게도 통한다는 걸 알았으니 그럴 이유가 없지.”
기가 막혔다. 하지만 침착해 보이는 키시아르의 눈빛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유더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단장님의 몸에 스스로 지니신 힘을 쓰는 것과 이건 경우가 다를 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두 분 다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위험이라면 네게도 존재해. 알고 있을 텐데.”
“저는…….”
저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붉은 돌의 순수한 힘을 여러 번 다루면서 그 힘이 제게 때로 고통을 줄지언정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제법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시아르의 목숨은 다르다.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을 내뱉고 나면 눈앞의 사내가 짓게 될 표정이 아주 선명히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유더.”
키시아르가 이름을 불렀다. 그가 손을 뻗어 유더의 찌푸린 이마를 슬며시 쓸었다.
“오늘 당장 시도하자는 게 아니야. 오늘은 단지 폐하께 너를 제대로 소개하고, 함께 저녁을 들 뿐이지. 폐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진단으로 최선을 찾아낸 뒤, 그분의 의견 또한 들어보아야 해.”
“…….”
“그리고 나는 이 일을 내가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든 걸 네가 혼자 하도록 지켜만 볼 생각이 없어. 아마 너도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이렇게 말해 주었겠지. 아닌가?”
유더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잘 생각해 보게. 보좌의 실력을 믿지 못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단이 있다면 그걸 선택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만약 다른 방법으로 내가 제시한 방법보다 더 좋은 도움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때는 언제든 물러나지.”
졌다. 유더는 철저하게 준비해 온 키시아르의 공격 앞에서 제가 이길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