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68화 (468/805)

468화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수도 전체에 놀라운 소식이 퍼져 나갔다.

“뭐? 제왕의 검흔이 하나 더 생겼다고?”

초대 황제가 새긴 검흔이 남아 있는 벽은 사실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 없는 유적 중 하나였다. 평민들은 그 벽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그게 뭔지 아는 이들은 검을 유독 좋아하는 경우가 아니면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나 조금 ‘신검의 명예를 위한 항의’니 뭐니 하여 젠체하는 젊은이들이 나타나 제법 도전을 해 대곤 했으나 그 행위도 결국 치워야 할 쓰레기만 늘렸을 뿐 사람들에게 큰 관심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제왕의 검흔이 처음으로 남겨진 천 년 전 이래로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벽 주변에 몰려든 건 아마 처음이었으리라.

사람들은 거대한 검흔이 나란히 새겨진 벽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애를 썼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소식에 흥미를 보였던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모든 이들의 관심사 중 하나였던 ‘몇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황제 폐하’마저도 잠시 뒤로 밀렸을 정도였다.

“정말이네. 큰 검흔 위에 또 하나가 생겼어! 저게 사람이 한 거라고?”

“누가 한 거야? 저럴 만한 기사가 있었나?”

“지금 수도에 있는 소드마스터는 무커 대장군밖에 없지 않아? 그러니 당연히 그분이겠지!”

“무슨 소리. 그분이 남긴 흔적은 저기 있잖아! 팻말이 붙어 있다고! 제왕의 검흔보다는 훨씬 작아! 그리고 그분이 남긴 거라면 저 검흔을 남겼단 사실을 왜 숨기겠어?”

나름대로 검을 조금 배워 보았다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사이 누군가가 나서서 비밀스레 말을 보탰다.

“내가 어젯밤 저걸 맨 처음 발견한 이에게 들었는데,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져서 와 봤을 땐 이미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더군. 저쪽에서 가게를 하고 있는 이가 한 말이니 못 믿겠으면 가서 물어봐요.”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아무런 변화도 없던 벽에 갑자기 검흔을 남긴 이는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제왕의 검흔이 하나 더 생겼다는 믿지 못할 신고를 듣고서 출동한 병사들은 술 취한 자들의 헛소리에 혼쭐을 내줄 마음으로 왔다가, 그게 진짜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혼비백산해 돌아갔다.

“허 참. 무커 대장군도 아니라면 대체 누굴까. 왜 남기고 나서 그냥 사라져 버린 거지?”

결과는 명백히 남아 있는데 이토록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낸 이는 누구인지 모른다니. 거짓말 같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거기 몰려든 자들, 비켜라!”

그때,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며 기사 몇 명이 나타났다.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과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제복을 본 평민들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세상에. 황궁기사단이 왔어.”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고 나타난 기사들의 맨 앞에는 얼음처럼 무표정한 적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걸친 갑옷과 표식이 기사단장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몇몇 이들이 숨을 삼켰다.

검흔 앞에 선 황궁기사단장 테오라도 반 타인은 주변을 메운 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직 앞에 있는 벽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 검흔을 남긴 이의 정체를 알 수 있기라도 한 듯이 강렬한 시선이었다.

“저 검흔을 조사하러 오신 건가……?”

“아니야. 어쩌면 저분이 남긴 것일지도 모르잖아.”

“……돌아간다.”

그러나 테오라도는 이내 돌아섰다. 기대에 차 쑥덕대던 이들이 어리둥절해한 만큼, 그를 따라온 황궁기사단 기사들의 의문도 커 보였다.

“단장님. 벌써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더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아, 역시 마법 눈속임이었던 건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더 볼 가치도 없는 무례한 장난질일 거라 생각했죠.”

“아니. 저건 진짜다.”

테오라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검기를 사용하여 한 번에 제대로 그은, 소드마스터의 검흔이 맞아. 진짜이기 때문에 더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가짜일 거라 떠들었던 기사가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으나 말은 하지 않았던 다른 기사들은 제가 먼저 떠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눈동자를 은밀하게 굴렸다.

그들이 올 때와는 딴판으로 기가 조금 죽은 채 테오라도 반 타인의 뒤를 따라가고 나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방금 들었습니까? 진짜랍니다!”

“소드마스터가 남긴 게 맞다니. 아니 그러면 대체 그게 누구란 말이야?”

“…쉬라고 보내 두었더니, 하루가 지나자마자 이런 사고를 쳤겠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서류를 확인하던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어릴 적부터 마음에 안 드는 명을 받으면 꼭 이렇게 기상천외하고 할 말 없는 짓을 저지르곤 했었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성정은 도대체가 변할 기미를 보이질 않는구나.”

그의 무릎 위에 펼쳐진 종이 위에는 어젯밤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검흔에 대한 보고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아직 그 누구도 범인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으나 황제는 듣자마자 그게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이 수도 내에는 공식적으로 널리 소드마스터라 알려진 무커 대장군 외에도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더 존재했다. 하나는 이런 짓을 저지를 리 없는 신중하고도 충심 깊은 기사였고, 다른 하나는 그 기사의 주인이자 무슨 이유로든 충분히 이런 사고를 저지를 만한 황제의 동생이었다.

황제는 키시아르 라 오르가 이 엄청난 일을 저지른 범인이 아니라면 오히려 놀랄 것이라 여겼다.

“타인 황궁기사단장이 현장을 확인 후 그냥 떠났다는 건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는 뜻이겠고. 다른 이들은 더 안 왔나?”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시종장이 대답하며 공손한 움직임으로 협탁에 놓인 황제의 잔에 새로운 차를 따랐다.

“그래… 그가 검 이외에는 아무 데도 관심이 없는 자라 그 사실을 가지고 다른 곳에 가서 떠들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군. 그 가문의 상황도 마침 적절히 잘 정리된 상태고, 이 일에 대해 관심을 보일 다른 이들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차를 마시기 시작한 황제의 머릿속에서 여러 복잡한 사항들이 끊임없이 합쳐지고 분리되며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일 생각에 깊이 빠진 황제가 어떤 상태가 되는지 잘 아는 시종장은 능숙하게 황제의 생각 사이로 끼어들어 말을 걸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차가 또 다 식겠사옵니다. 황후 폐하께서 올해 마지막으로 수확하여 보내 주신 찻잎이니 따뜻할 때 모두 드시고 싶다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그제야 황제가 입 안으로 되뇌던 것들을 멈추고 눈을 돌렸다.

차를 다시 마시기 시작한 황제의 시선은 그러나 여전히 보고서의 같은 페이지에서 떠날 줄 몰랐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생각에 빠지지 않았고, 미세하지만 한결 부드럽게 누그러진 상태였다.

“……제가 이젠 멀쩡하다는 걸 이런 방식으로 항의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제왕의 검흔에 필적할 만한 검흔이라니. 천 년간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래. 부황과 모후께서 이 사실을 아셨다면 짐과 같이 기막혀하시면서도 기뻐하셨을 테지.”

황제의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가는 금세 사라졌다.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겨울바람과도 같은 서늘함만이 남았다.

“어차피 돌아오는 대로 키시아르의 힘을 보여 줄 자리를 만들 셈이었는데, 영악하게도 알아서 먼저 움직여 주었으니 이쪽의 수고는 덜겠군. 편지지를 새로 가져오거라. 마병단에 보낼 편지를 써야겠다.”

“예.”

미소를 지은 시종장이 방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가를 향하여 걸었다. 몸 안쪽 어딘가가 욱신거렸으나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그의 시선에 비친 궁 바깥은 이전과 다소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무도 없었던 궁 밖에, 지금은 여러 사람이 몰려들어 분위기가 북적였다. 대부분은 파티를 준비하기 위하여 황제의 명을 받고 온 이들이지만, 그중에는 황제를 알현하고 싶다며 매일같이 버티고 서 있는 각 귀족가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지병이 나았는지, 나았다면 얼마나 나았는지, 마병단의 환영식을 계기로 직접 국정에 다시 나설 셈인지, 그 외에도 수많은 일들을 궁금해했다. 물론 황제는 그들을 얌전히 만나 줄 생각이 없었다.

‘얌전히 침몰해 줄 줄 알았던 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이것이 죽기 직전의 꿈틀거림인지, 아니면 무언가 이변이 일어난 것인지 너무나 궁금하겠지.’

그들이 황제의 건강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른 데 신경을 쓰지 못하는 중이라는 건 이 ‘새로운 검흔’ 사건에 공작가들이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확실했다.

힘겹게 적의 심장부에 파고들 노력을 하지 않고도 손쉽게 적의 내부 사정을 짐작 가능하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아마 키시아르 또한 이런 효과를 노리고 몸소 움직였을 터였다.

‘겉보기엔 생각 없이 사고를 치는 것 같아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그들이 황제의 변화에 신경을 쓰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건 곧 황제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기회가 되리라.

곧 문을 두드린 시종장이 황제에게 좋은 향이 나는 편지지를 바쳤다. 그는 책상에 앉아 펜에 잉크를 찍고, 망설임 없이 편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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