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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66화 (466/805)

466화

가쁜 호흡 속에서 작은 빛이 그릇을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 사이에 녹아들 듯 사라지는 광경까지 확인한 뒤, 유더는 겨우 몸에서 힘을 풀고 고개를 숙였다. 언제 배어 나왔는지 모를 땀으로 전신이 눅눅했다. 목욕을 끝내고 나온지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분만은 한결 후련했다. 이걸로 끝낼 생각은 물론 아니고, 다음은 경과를 지켜보고 시도할 셈이었다. 키시아르는 괜찮은지 묻기 위해 고개를 든 그는 예상치 못한 눈빛과 마주하고 벌리려던 입술을 멈칫했다.

“단장님?”

“자, 일단 누워 볼까?”

유더가 그를 마주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태연히 웃으며 몸을 일으킨 사내가 유더를 끌어당겨 방금까지 제가 누워 있던 침대에 눕혔다.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왜 그러느냐고 물을 틈조차 없었다.

“아픈 곳은?”

“없습니다.”

“그럴 리가.”

단언한 키시아르가 유더의 가운 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유더는 그제야 제 가슴팍 너머까지 검붉은 흔적들이 가지를 뻗쳤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중간에 갑자기 힘이 뭔가로 뚫리는 듯 급격히 밀고 들어가는 기분이 난다 싶더니, 이 때문이었던가 싶었다.

“음…… 어디까지 번졌습니까?”

“내가 답해 주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키시아르가 근처에 있던 탁상용 거울을 들었다. 은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거울 내에 역병 환자와도 같은 얼굴이 비쳤다. 힘을 쓸 때마다 금빛으로 빛나는 한쪽 눈에서도 아직 빛이 꺼지지 않은 건 물론이고, 목을 넘어 턱 부근까지 검붉은 핏줄이 불룩불룩 번져 있는 꼴이 누가 보았다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딱 좋아 보였다.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의 반응을 이해했다.

“좀 심각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프진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보십시오.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일을 진행하는 동안 느꼈던 눈과 몸의 통증들은 모든 게 끝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금 남아 있는 건 여운 정도뿐이었다. 게다가 거울을 보고 있는 도중에도 턱까지 뻗친 검붉은 기운들이 슬금슬금 꿈틀대며 도로 옅어지고 있는 걸 보면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전처럼 알아서 일정 수준 정도로 가라앉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아무래도 그 말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설명을 듣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곧바로 장식장 문을 열더니, 안에 있던 화려한 루비 성표와 정화석을 가져왔다. 둘 다 예전에 보았던 물건들이라 몹시 낯이 익었다.

‘이건…….’

“루산 사제가 지금은 없으니 말이야.”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이다. 간결하게 설명한 키시아르가 성표에 달린 금줄을 맨팔에 휘감아 쭉 잡아당겼다.

상의 하나 걸치지 않고 귀한 물건을 서슴없이 다루는 모습이 신성 모독이라 욕을 먹을 만한 태도였으나 여기에 있는 이는 유더 아일뿐이었다. 그에게는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유물급 성표 따위보다 눈앞에 있는 사내의 몸이 훨씬 중요했다.

방금 시험을 끝냈는데 바로 신성력을 쓰는 게 괜찮은 일일까. 아무래도 역시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순간 키시아르가 손을 뻗어 유더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괜찮아. 자. 가만히.”

유더의 염려를 효과적으로 봉쇄한 사내가 정화석을 쥐고는 바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신성력을 흡수한 정화석에서 은은히 빛이 났다. 그대로 그것을 피부 위로 가져다 대자 시원한 감각이 몸속을 훑기 시작했다.

예전에 그것을 썼을 때와 같은 통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쳤던 육신에 다시 기력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한참이 지나 유더의 몸에 번졌던 검붉은 핏줄들은 예상대로 거의 가라앉았다. 줄어든다기보다는 마치 더 깊은 안쪽으로 흡수되면서 사라지는 듯한 모습으로 대부분의 검붉은 기운이 사라진 뒤에야 키시아르는 겨우 신성력을 멈추었다. 그때는 이미 엄청나게 비싼 정화석이 열 개 정도 쓸모없는 돌이 되어버린 뒤였다.

“…….”

유더의 얼굴을 살핀 사내가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정화석을 놓고 성표를 풀었다. 경과를 살피려는 듯한 시선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으려다, 옳다고 여겨서 했던 판단을 순간의 사과로 퇴색시키지 말라던 서부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키시아르가 저 때문에 놀랐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유더는 이번에도 제가 해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시아르와 앞으로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잊은 건 아니었다.

키시아르 또한 그 사실을 알 텐데도 굳이 정화석을 가져와 사용한 건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마음과 염려를 가라앉히기 위한 그 나름의 갈무리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더 또한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할 터였다.

여기서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다른 말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먼저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멈추겠다고 말씀드렸지만, 그 기준이 조금 지나치게 단장님 쪽에 쏠려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 일을 할 때 옆에 거울을 두고 몸의 변화를 스스로도 빨리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쪽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죄송하다는 사과 대신 그렇게 말하고서 거울을 잡은 유더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그제야 키시아르가 다시 웃었다. 눈썹을 슬며시 찌푸리고 입술 끝을 올린 그 미소는 방금까지 내보였던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와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쪽이 이전보다 좀 더 자연스러웠고 솔직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좋은 생각이야.”

키시아르가 거울을 쥔 유더의 손을 감쌌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으나, 유더는 그 순간 키시아르 또한 제가 무슨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는 사실을 함께 느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서로 주고받은 기분이었다.

“…유더. 밤산책은 다음으로 미룰까.”

“아뇨. 단장님께서 피로하신 것만 아니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가지.”

목욕을 다시 한번 끝마친 뒤, 유더는 키시아르가 내어준 옷을 걸쳤다. 얼굴을 가리기 좋은 모자가 달린 평상복은 유더에게도 그리 헐렁하지 않게 잘 맞았다. 아무리 보아도 새 옷 같아 어디서 구해왔느냐고 물으니,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 혹시 몰라 작은 옷도 몇 벌 준비해 두었었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오늘 같은 날이라…….’

왠지 여러 의미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얼굴을 바꾸는 마도구를 사용한 키시아르는 사람이 없는 길로만 귀신처럼 잘도 빠져나가 7구역의 번잡한 밤길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밤거리를 즐기는 듯한 어느 주정뱅이들이 얇은 옷차림으로 술집 바깥에 내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날이 꽤 쌀쌀해졌는데 기운들도 좋군.’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며 막 지나가려던 순간, 유더는 주정뱅이들 사이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다들 이제 그만 마셔! 더 마시면 스티버의 집까지 가기도 전에 기절할 거야!”

“어엉, 가케인. 뭐라고? 술이 더 필요해? 알겠어. 여기 한 통만 더 주세요!”

“아니야. 아니라니까.”

“…….”

놀랍게도 그들은 마병단원들이었다. 유더와 친분이 깊지는 않지만 얼굴은 익은 단원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술을 마시는 동안 가케인 볼룬발트가 그들의 등과 어깨를 두드리며 한 명이라도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이제 그만 마시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곧 새로운 술이 또다시 가게 안쪽에서 등장했기에 그 시도는 불발로 돌아갔다.

“이건 또… 반가운 얼굴들이군.”

유더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깨달은 듯한 키시아르가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합석하고 싶나?”

“아뇨. 휴가가 끝나면 훈련 계획을 더 강하게 조정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술을 마시는 건 좋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잃을 정도로는 마시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단원들은 많이 취해도 주변은 분간하는 선에서 멈추고는 했지만, 가케인과 함께 있는 저들은 단원들 중에서도 술을 유난히 좋아하던 이들이었다.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스스로를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훈련뿐이었다.

유더의 말 속에 깃든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을 느꼈는지 키시아르의 변용한 얼굴 위로 조금 더 큰 웃음이 떠올랐다.

“든든하군.”

그들은 가케인과 단원들이 앉아 있는 술집을 지나쳐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떠들썩함이 멀어진 자리에 어둠과 고요함이 점차 자리잡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가서도 키시아르의 걸음은 원하는 목적지가 있는 듯이 거침이 없었다. 대체 그가 이 산책의 끝을 어디까지로 잡고 있는지 조금 궁금했으나, 유더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골목을 넘어선 곳에서 이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검흔들이 가득 새겨진 드넓은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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