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불이 또 붙는다면 키시아르와 침대 위를 더 뒹굴지도 모르겠지만, 키시아르는 그 답이 아니라 뭔가 다른 바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계획하신 일이 따로 있으십니까?”
“여기서 쉬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의 휴가이니… 밤이라 다른 이들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가기 어렵지 않을 텐데, 잠깐 산책하고 돌아오는 건 어떻겠나? 네 몸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말이야.”
“좋습니다.”
유더는 시원하게 그 제안을 수락했다. 하루 종일 팔뚝만 한 것을 몸에 넣고 있느라 다리나 배 안쪽에 여파가 조금 남기는 했으나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설령 지금이 낮이었다 하더라도 거절하지는 않았으리라.
“시작하겠습니다.”
식사가 끝난 뒤 유더는 침대에 누운 키시아르의 곁에 앉아 드러난 복부에 손을 얹었다. 이미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힘이 곧 그의 오른손 핏줄을 불룩불룩 일으키며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붉게 달아오른 핏줄들이 손등을 넘어 그 위로, 팔꿈치 너머까지 쭉 타고 올라갔다.
‘어쩐지… 이전보다 더 매끄러운데.’
잘 먹고 잘 잔 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태 붉은 돌 본연의 힘을 써 본 중에서 가장 제어하기가 쉽고 반응이 빨랐다. 오래지 않아 곧 키시아르의 몸 안을 흐르는 복잡한 기운들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뒤엉킨 형태는 여전했지만 다른 기운들을 감싼 붉은 기운의 힘이 이전보다 더욱 진하고 양이 많아 보였다. 그 힘이 중앙의 그릇을 전체적으로 감싸 지지하는 형태이니 나쁜 느낌은 들지 않았으나, 혹시 모르기에 유더는 일단 신중하게 물어보았다.
“내부를 흐르는 힘은 전처럼 전부 드러났습니다. 각성자의 힘이 전보다 양이 늘어난 듯한데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전혀.”
환한 금빛을 내기 시작한 유더의 한쪽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 각성자의 기운을 제가 움직일 수 있는지 살펴볼 테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유더는 천천히 붉은 기운에 감싸인 손을 움직였다. 배 아래쪽에 위치한 각성자의 기운이 심장박동에 맞추어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그것의 끝에 조심스럽게 접촉하자 키시아르의 손끝이 움찔 움직였다.
“…….”
잠시 후, 유더의 손끝을 따라 아주 천천히 붉은 기운 일부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그리는 궤적을 똑같이 되짚으며 피부 위를 따라 올라간 기운은, 이내 그릇 위를 감싼 또 다른 붉은 기운들 사이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두말할 것 없이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각성자의 기운을 움직이는 건 역시 가능하군.’
동일한 기운을 움직이는 것이니 크게 반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이전의 경험을 통해 괜찮으리라 여겼음에도 성공하고 나니 긴장감이 겨우 풀리며 참았던 숨이 흘러나왔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힘을 발한 몸과 눈 안이 뻐근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움직이는 것도 봤고, 문제없어.”
요령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만, 그건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유더가 시도하고 싶은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몸 안을 휘감아 도는 따갑고 자극적인 기운을 최대한 끌어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혹시, 하나 더 시도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방금보다 변수가 생길 가능성은 훨씬 큽니다만…….”
“무엇을 하려고?”
땀이 맺힌 이마 따위는 개의치 않고 평온히 묻는 얼굴 위로 흥미로움이 서렸다.
“단장님이 지니신 각성자의 기운 속에, 제가 지닌 기운을 넣어 보고자 합니다.”
“네 기운을?”
“네. 그간 생각해 본 결과, 이쪽이 가장 폐하와 단장님의 몸을 위해 시험해 보기 적절한 방법이라 판단했습니다.”
각성자의 몸속에는 붉은 돌이 세계 전체를 향해 내뿜은 이래 받아들인 힘이 각각 조금씩 담겨 있다. 사람마다 지닌 양이나 그 성질은 조금씩 다르지만, 유더에게는 특수하게도 그중 가장 순수한 힘 원형이 함께 있었다.
마법사 타이스 율만이 그리했듯 힘을 분리하여 매개체 속에 담아 두었다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그 힘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변수는 유더가 겪었듯 지나치게 순수하여 독과 같은 그 힘 때문에 균형이 깨지는 일이지만, 유더는 여태 그가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몸에 담긴 힘이 어느 정도 옅어졌다고 판단하였기에 이 일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처음부터 타이스 율만이 분리한 매개체에 든 힘을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는 유더가 주무르기 쉬운 힘을 움직여 시도해 보는 쪽이 조절도 용이하고 위험부담이 적을 터였다.
그 모든 설명을 들은 키시아르는 한참 생각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보지.”
다만 그는 거기에 하나의 방법을 더 추가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 있는 힘을 받아들이려면 받아들이는 쪽 본인의 의지와 힘도 필요해. 마침 내 각성 능력이 그런 걸 원활하게 하는 쪽이니 같이 써 보아도 되겠나?”
무언가를 끌어들이거나, 혹은 밀어내는 키시아르 라 오르의 힘. 그것을 떠올린 유더의 머릿속이 잠시 복잡하게 움직였다.
“…그 힘이 만져지지 않는 것에도 작용할 수 있겠습니까?”
키시아르가 그 힘을 써서 한 일을 본 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도록 밀어내는 것, 혹은 나무를 평지처럼 걸어 올라가면서 끌어들였던 것 정도뿐이었다. 유더의 추측으로는 이전 생의 그도 능력을 적을 향한 물리적 공격의 위력을 높일 때 주로 사용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힘이지만 그건 실체가 존재하는 대상을 향한 힘이지 만질 수 없는 대상을 향하지는 않았다.
“아직 해 본 적은 없어.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뭐든 가능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건 그간 내 보좌가 다른 단원들에게 가장 많이 해 준 말이 아니었던가?”
키시아르의 웃는 얼굴이 유더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렸다.
유더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것 같다면 바로 그만두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좋아. 그럼 시작해 보자고.”
두 사람의 힘이 동시에 발휘되기 시작했다. 키시아르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훤히 드러난 몸 위의 그림 지도와도 같은 힘들도 동시에 꿈틀대며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 기운이 부드럽게 요동치며 훅 뻗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유더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손을 키시아르에게로 끌어들이는 감각을 느꼈다. 그건 마치 높은 곳에 훌쩍 뛰어올랐다 다시 떨어질 때 땅이 몸을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과도 비슷했다.
이미 키시아르의 몸 내부에 있는 힘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유더 자신이 지닌 힘을 타인에게 전한다는 건 마치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방향만 짚어 더듬어 나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도 한쪽에서는 밀어내고, 한쪽에서는 끌어들이며 나아가기 시작하자 조금씩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더는 숨을 몰아쉬며 제 손을 붉게 물들인 힘을 노려보았다. 제가 오랫동안 힘들게 적응하여 받아들인 가장 순수한 힘 약간을 전할 수 있다면, 모든 게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기운은 키시아르가 끌어들이는 힘을 따라 움직이려 하면서도 그리 썩 말을 잘 듣지는 않았다.
한참의 노력 끝에 그는 완전히 땀투성이가 되었다. 키시아르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시선은 유더에게서 여전히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태껏 신음 한마디 내지 않았으나 그게 곧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닐 터였다.
유더가 알 수 없는 감각을 참아내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그 얼굴.
내부에 여전히 서늘한 인내를 간직하고 있을 그 눈을 본 순간, 갑자기 격렬한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하나 남은 혈연을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유더 아일을 위하여 스스로의 육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을 저 사내를 위하여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따위 힘과 이 시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몸이 붉은 돌의 또 다른 매개체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 힘도 마땅히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 힘을 움직이고 싶었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키시아르의 힘을 따라 끝없이 달려가고 싶었다.
“……읏.”
절규와 같은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손과 팔의 근육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힘이 짙어졌다. 유더의 손끝을 물들인 검붉은 기운이 핏줄을 넘어 일시에 어깨와 가슴, 목으로까지 불쑥 퍼져나갔다. 흉측해 보일 정도의 모습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의 몸에서도 보이지 않는 기운이 몰아치며 유더의 손을 떠난 아주 작은 점과 같은 기운 하나를 소용돌이처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유더는 터질 것처럼 욱신대는 눈과 손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몰두한 채 그 기적 같은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손톱보다도 작은 그 붉은 빛 덩어리가 키시아르의 내부를 휘감아 도는 힘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성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