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천장에 난 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을 받으며 유더는 눈을 떴다.
너무나 익숙한 단장 침실의 모습에 순간 가슴속이 서늘해질 뻔했으나, 몸을 조금 움직이려 하자마자 느껴진 낯선 소리가 이내 현실감을 일깨워 주었다.
그건 마석 난로가 평소보다 강하게 타닥이는 소리였다. 오색 불꽃을 뿌릴 때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공기가 따스하게 피부를 간질였다. 유더가 이곳에서 지낼 때는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각이었다.
그래. 그는 마병단장이 아니며, 이곳은 유더의 침실이 아닌 키시아르의 침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서 눈을 뜬 이유는…….
“…….”
고개를 작게 돌린 유더는 이내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편안히 옆으로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금발의 미남을 발견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임에도 초라함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몸이 빛 아래서 조각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규칙적으로 호흡할 때마다 긴 속눈썹 사이에 맺힌 빛 그림자가 열매처럼 흔들리는 광경이 그 어떤 보석보다 사람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되찾았던 현실감이 일순 도로 멀어질 뻔하였으나 시선이 닿은 가슴에 가득한 사납고 울긋불긋한 흔적이 정신을 도로 명확히 일깨워 주었다.
‘……그래.’
이건 현실이다. 무엇보다 확실하게 어제 있었던 모든 일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유더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짧게 숨을 토했다. 고작 그 작은 동작에 몸의 어느 부위라 특정할 수도 없이 모든 곳이 거의 동시에 아찔하고 나른한 근육통을 호소했다.
몸이 반사적으로 멈칫하자마자 유더의 피부를 감싸고 있던 큰 손이 움찔 움직였다.
숨소리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던 사내가 처음부터 잠들어 있지 않았던 듯이 눈을 반짝 떴다.
“…….”
시선이 마주친 채 침묵이 흘렀다.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뜬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잠시 후 사르르 미소가 번졌다. 시간의 흐름조차 피해 간 무생물처럼 보였던 남자는 그 순간 더운 피가 흐르는 따뜻한 생명이 되었다.
“…잘 잤나?”
“……예.”
“다행이군.”
유더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위로 올라와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간지럽게 쓸었다. 긴 손가락 끝이 반듯한 이마에서 열기가 남은 창백한 뺨으로 내려가고, 다시 부풀어 오른 입술 아래를 매만졌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했었던 접촉임에도 어쩐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색을 띤 움직임이었다.
“내가 더 늦게 일어나다니, 이런 일은 처음인 것 같은데. 심지어 시간도…….”
시선을 천장 쪽으로 향한 키시아르가 창문 위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유쾌하게 중얼거렸다.
“…몇 시간만 더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아 보이는 게 착각은 아닌 것 같고.”
그의 말대로, 지금 내리쬐고 있는 햇빛은 확실히 아침 햇살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제 낮부터 시작한 정사가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가 되어서야 멈추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꼬박 하루를 침실에서만 보냈는데, 기이하게도 그만큼 긴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고, 목도 안 말랐다. 사지의 나른함 이외에는 정말 놀랄 만큼 아무 문제도 없었다.
유더는 제 입술을 계속해서 느릿느릿 덧그리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조용히 입을 벌렸다. 혀를 내밀어 그 끝을 살짝 핥자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로 지그시 끝을 깨문 채 눈을 들어 재차 바라본 곳에서 붉은 시선이 이전과 다른 빛으로 살짝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건 그 눈에 비친 유더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으음. 식사부터 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말이야.”
곤란한 듯 웃고 있지만 처음부터 입술을 계속 매만져 이쪽의 불을 키운 건 키시아르 쪽이다. 같은 충동을 지니고, 같은 기쁨을 느끼고 있다는 게 뻔히 읽히는데 마지막까지 자제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 솔직하게 대단하다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속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인다면 눈앞의 사내는 분명 물러날 것이다. 처음부터 아무런 충동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색향을 능숙하게 갈무리하고 여유롭게 손을 내밀겠지. 그래도 충분히 즐거워할 이였다.
하지만 그건 유더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유더는 어제 처음으로 몸을 겹쳤던 때 짧게 느꼈던 어떤 감각을 떠올렸다.
그건 한없이 아득하고도 오래된 감각이었다.
저와 닿아 있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격류의 파동 속에서, 유더는 문득 자신의 것인 듯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들이 불티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느껴 본 지 너무나 오래되어 반쯤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는데도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이전 생에서 키시아르와 몸을 섞은 뒤로 종종 느끼곤 했었던 제 것 아닌 타인의 감정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이전 생에 몸을 섞은 뒤 겪었던 여러 변화 중에는 예고 없이 갑작스레 느껴지는 상대의 감정도 있었다. 그 낯선 감각은 보이지 않는 내부 어딘가가 갈가리 찢긴 듯한 환상통을 동반하면서도 제 아픔인지, 타인의 아픔인지 알 수 없게끔 만들어 유더를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건 달랐다. 키시아르와 연결된 순간 유더는 제가 느끼는 감각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강렬한 환희를, 낯설고 따뜻한 감사함을, 그리고 동시에 ‘키시아르 라 오르’ 자신을 향한 딱딱하고 서늘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건 바로 키시아르 라 오르가 지닌 인내의 근원이었다. 혹시나 이 순간을 망치지 않기 위해 그가 세워 둔 마지막 방비였고, 유더가 그간 어렴풋하게만 느껴 왔던 그의 가장 비밀스러운 일부이기도 했다.
그토록 생생히 뜨거운 순간에도 그것은 유일하게 서늘한 눈을 치뜨고서 주변을, 정확히는 키시아르 자신을 겨냥한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유더 자신도 인내라면 제법 일가견이 있었으나 그의 인내는 스스로와 아주 잘 타협하는 편이었다. 몇 가지 기준선은 있었지만 만약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 절실한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그때는 딱히 폭발을 막지 않았다.
그건 타고난 성정 위에 덧씌워진 가르침의 힘이었다. 유더에게 인내를 가르친 사람은 거대한 힘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기준을, 감정보다 먼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나 동시에 만약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나타난다면 그때는 스스로를 우선하여 타협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를 가르친 이가 누구였던가?
바로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유더를 그렇게 가르친 이가 스스로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시아르는 분명 참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그것을 지켰으나 그의 근본에 존재하는 스스로를 향한 차가운 목소리는 그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으로 심장이 크게, 그리고 아릿하게 울렸다.
그때야말로 유더는 그 차가운 인내 너머까지 포함하여, 키시아르 라 오르의 모든 것을 원하게 되었다.
이전 생의 그가 알았던 각성자에 대한 지식을 확실한 형태로 입에 담으면 키시아르가 분명 또다시 무언가를 더 추측하거나 눈치채게 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가르쳤다.’
유더는 그 모든 생각을 짧게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물은?”
“목마르십니까?”
손가락 하나 쓰지 않고도 두 사람 사이에 물방울이 소리 없이 여러 개 솟아올랐다가는 사라졌다. 그것을 본 키시아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결국 제대로 입을 맞추었다.
혀가 얽히는 순간 닿은 몸이 급속도로 따뜻해졌다. 키시아르에게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향이 짙어지며 전신의 감각이 도로 예민하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유더는 다리 사이에 늘어져 있던 부드러운 성기에 점차 힘이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비틀었다.
키시아르의 목줄기로 미끄러져 내려가 이를 세우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목을 내어주면서 아랫배가 서로 부딪칠 만큼 허리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마주 누운 채 삽입하려면……. 흐릿한 생각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단단한 손이 유더의 다리 한쪽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제 다리 위에 얹었다.
결국 제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식사를 먹을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다시 한 번의 긴 정사가 끝난 뒤였다.
“서부의 음식도 괜찮았지만, 역시 돌아와서 먹는 게 더 좋아. 그렇지 않나?”
유더는 키시아르가 맨몸에 바지 한 벌만 걸치고서 가져온 쟁반 위의 빵과 과일을 대충 씹어 삼키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의 차림새도 다 여미지 않은 가운 하나뿐이라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장과 단장 보좌가 이렇게 흐트러진 차림새로 식당도 아닌 침실 탁자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아무렇게나 식사를 하고 있다는 걸 단원들이 보았다면 기겁했겠지만, 단장실은 오늘도 조용했다. 거짓말처럼 창문을 두드리는 전서조 한 마리 없었다.
키시아르가 마지막 남은 찻물을 입에 흘려 넣은 뒤 내려놓았다. 유더가 말없이 그 안에 뜨거운 물을 쪼르르 따르자 그가 눈을 찡긋하며 짧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덕분에 목마를 일이 없어.”
키시아르의 미열은 이제 거의 다 사그라졌다. 갈구했던 열망을 실컷 채운 덕인지 얼굴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광채가 났다.
때문에 유더는 해가 진 이후에 하고 있는 오늘의 첫 식사를 마치고 나서 그의 몸 내부를 다시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제안하니 키시아르는 선뜻 승낙했다. 사실 애초에 어제 이미 했어야 할 일이 본의 아니게 늦어져 지금까지 온 것뿐이었다.
“내 몸을 살펴보는 걸 끝내고 나서는 뭘 할 셈이지?”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