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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59화 (459/805)

459화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의외라면 의외겠지만 키시아르는 바로 일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단 주커만이 돌아올 때가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는 자신이 부관과 함께 몸 상태를 점검하고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한 나름의 준비를 하는 사이 같이 있을 것인지 아니면 유더에게도 따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지 물었고, 유더는 아직 꽃에 뒤덮여 있을 방을 떠올리며 옷만 갈아입고 올라오겠다고 대답했다.

단장실에서 이어지는 중앙 계단을 따라 숙소로 도로 돌아가는 길은 신기할 정도로 가볍고 평화로웠다. 층과 층이 이어지는 부분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만든 창문이 활짝 열린 채 겨울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햇살을 뿌렸다.

평소라면 그 아래 있는 훈련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뒹구는 단원들의 목소리가 들렸겠지만, 오늘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기에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유더는 자신의 숙소 안으로 들어간 뒤, 아직 가방을 던져 둔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고도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발아래 가득한 꽃이 풍기는 향긋한 향기 사이로 단장실을 떠나오기 직전 들었던 키시아르의 질문이 머릿속에 재차 떠올랐다.

‘준비할 시간이라.’

묘한 일이지만 이전 생에도 키시아르와 처음 몸을 섞었던 때 일주일 정도를 보냈고, 이번에도 휴가 기간이 일주일이다. 하지만 이전 생에는 이번처럼 뭔가를 준비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건 사고였고, 대개의 모든 사고가 그렇듯 시작부터 끝까지 급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키시아르와 함께 보냈던 거의 모든 시간이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기는 하지만.’

첫 사고 이후에도 그와 몸을 섞는 일은 늘 급하고 당황스럽게 이루어졌다. 시작도, 끝도 그의 의지로는 무엇 하나 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유더 아일의 의지에 따라 무엇이든 자유롭게, 제한 없이 말이다. 여유가 생겨서 오히려 묘하다 여기다니. 제가 생각해도 희한했다.

‘옷만 갈아입고 올라가겠다고 말했지만… 뭔가 더 준비를 해야 하나.’

아무리 성교에 관심이 없었어도 이전 생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정도는 있으니 사람과 사람이 몸을 섞기 전에 이런저런 준비가 제법 필요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준비가 없어도 어차피 할 건 다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겁한 반발의 목소리가 가슴 속에서 치솟기도 했다.

키시아르가 눈앞에 있을 때는 모든 게 아무래도 좋았는데, 그가 보이지 않자마자 이 모양이다. 유더는 제가 서툴러 빠진 어린놈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리지도 않으면서 이 나이에 이제 와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

그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 손을 가볍게 휘저어 바람을 불러냈다. 가구나 다른 물건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정확하게 방을 뒤덮은 꽃들만을 휩쓴 바람이 잠시 후 그것들을 한곳에 모아 보기 좋게 둥둥 띄워 주었다.

성인 남자도 한 품에 다 안기 어려울 듯한 그 꽃다발을, 유더는 칸나가 가져다 둔 꽃병이나 에버가 언젠가 선물해 준 컵 따위에 차곡차곡 나누어 넣었다. 그러나 꽂을 만한 곳에는 대충 다 욱여넣었는데도 양이 지나치게 많았던 탓에 결국은 탁자와 의자 위에도 산더미 같은 꽃의 산이 생겼다.

‘남은 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더 생각해 봐야겠군.’

방이 깨끗해지고 나니 그제야 정말 제 숙소에 돌아온 기분이 났다. 유더는 단복 겉옷과 장갑을 벗고 옷장에 깨끗하게 빨린 채 걸려 있는 새 옷을 꺼냈다. 바로 갈아입으려 했던 움직임이 문득 제가 벗어 둔 장갑 위에서 잠시 멈칫했다.

단장실을 떠나오기 직전, 그의 장갑 낀 손가락 끝에 키시아르가 아쉽다는 듯 가볍게 입 맞추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검은 장갑을 천천히 집어 올렸다. 키시아르가 입을 맞추었던 손가락 두 번째 마디 부근에 똑같이 입술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상대에게는 스스로를 누르지 말라고 말해 놓고 우습게도, 그의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으려 참았던 간질간질한 열기가 손끝에서 몸 안쪽까지 순식간에 거침없이 치달았다.

내리깐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깊이 침잠했다.

단장실 문을 단정하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두드린 상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주인을 닮아 침착하고 단정하기 그지없는 그 소리가 한 번 더 들리기 전에, 키시아르는 문을 열고 앞에 선 이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저를 부르려는 듯 벌어진 입술을 바로 끌어들여 키스를 하자, 잠시 멈칫했던 몸이 금세 천천히 호응해 주었다. 고작 숙소에 잠시 내려갔다 돌아왔을 뿐인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랜만에 접촉한 듯이 갈증이 났다.

유더의 허리가 조금씩 넘어가 문에 뒤통수가 거의 닿기 직전쯤, 키시아르는 아쉬움을 삼키며 입술을 떼었다. 젖은 입술을 작게 벌리고 호흡하며 그를 올려다보던 이의 새카만 눈동자가 잠시 후 아주 희미하게 휘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심장을 뒤흔드는 모습이었다.

“옷만 갈아입고 온다더니, 목욕까지 하고 왔군. 머리칼이 아직 젖어 있어.”

서부에서도 많이 보았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 보는 건 다소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단장님도 마찬가지시지 않습니까.”

“사실 내 욕실을 이용해 줄 줄 알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 두었거든. 작은 아쉬움 정도는 토로하게 해 주게.”

“그건…….”

평소라면 무엇이든 잘도 대꾸하던 입이 꾹 다물렸다. 색이 옅던 입술이 서로를 비틀어 짓누르면서 핏기가 어렸다 사라지는, 아지랑이처럼 귀하고 야릇한 순간을 키시아르는 잠자코 즐겁게 관찰하였다. 당혹감을 느낄 때 그가 보이곤 하는 찰나의 반응을 키시아르가 아주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 너는 이제 무슨 답을 돌려줄까.

“…이용할 기회가 지금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을 기약하는 법 따위는 모를 듯한 얼굴로 아주 자연스럽게 추후의 일주일을 어떻게 보낼지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을 내포한 발언이라니.

역시 기대한 보람이 있었다.

“그건 그렇지.”

키시아르는 웃으며 유더의 손을 잡고 집무실 안쪽의 복도로 이끌었다. 평소는 혼자서 향했던 길을 누군가와 함께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가는 길에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허리 높이의 장식용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폭이 좁은 유리잔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몸을 살짝 비틀어 유더의 반대쪽 손에 쥐어 주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 뒤따라왔다.

“술은 아니니 걱정 말게. 나도 막 씻은 참이라 목이 말라서 준비해 둔 음료야.”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과일청에 차가운 물을 섞고 꽃을 띄운 음료가 희미한 금빛으로 찰랑거렸다. 키시아르는 자신의 몫으로 따라 둔 똑같은 잔을 가볍게 유더의 잔에 부딪친 다음 한 모금 삼켰다. 그를 따라 음료를 조금 삼킨 유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커만 경의 일은 어떻게… 잘 확인하셨습니까.”

“확인했지. 주기가 벌써 돌아온 건 역시 확실하게 아니더군. 미열이 지속 중이기는 하지만 이전보다 오르지는 않았고, 해열을 돕는 약도 먹었어.”

“다행이군요.”

사실은 유더의 손길 앞에 사라졌던 발정기의 기운이 다시 되돌아온 건 아닌가 잠시 의심하기도 했었다. 아직까지 그 진득진득한 열기가 올라오지 않는 걸 보면 그 수준까지는 아닌 듯했지만, 확실히 평소보다 곁에 있는 이에게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기는 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적당히 몸의 열기를 힘으로 눌렀을 텐데, 약속을 했으니 그도 어렵다. 키시아르는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나단은 앞으로 일주일간은 수도에 막 올라와 준비할 일이 많을 헬렘을 도울 예정이지.”

자세한 설명을 듣고서야 납득한 듯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웃음이 절로 나오도록 귀엽게 여겨졌다. 키시아르는 제 지시를 들었던 때 나단 주커만이 무슨 눈빛을 지었었는지는 기억에서 대충 지웠다.

어차피 일주일간 보좌와 함께 지낼 것이라 말한 순간부터 충직한 기사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도 이미 대부분을 짐작한 기색이었다.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빠져나가던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단은 오래전 유더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꾸준히 그를 경계해 왔다. 지금에 와서는 유더 아일이 분명 믿을 만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있을 텐데도 그의 마지막 경계 한 줌만은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키시아르는 그 경계심을 유더 본인이 권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더가 그것을 알면서도 아주 가볍게 묵인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제 보좌의 알 수 없는 면모 중 극히 일부일 따름이었다.

키시아르가 아직 답을 맞히지 못한 그 무언가.

복도 끝에는 여러 개의 문이 한 번에 모두 보이는 작은 공간이 존재했다. 단장이 이용하는 침실은 가장 안쪽에 있었다.

이전에 유더 아일이 홀로 왔다가 문 너머의 키시아르를 만나지 않고 돌아섰던 그 경계선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성큼 넘어섰다.

맞잡은 손 사이로 문득 짜릿한 전류가 튄 듯해 내려다보니, 유더 또한 비슷한 감각을 느낀 듯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어째서 단 한마디의 말 없이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걸까.

몇 번을 겪어도 기이하고도 신비한 순간이었다.

거의 동시에 올라온 눈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유더의 눈가가 화가 난 사람처럼 사납게 떨렸다. 방 안으로 들어서서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가 키시아르를 끌어당겼다.

메마른 몸에서 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격정이 그 안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키시아르 라 오르는 죽을 만큼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휘청이며 입술을 부딪쳤다. 키시아르는 그가 가구에 부딪치지 않도록 허리를 안아 조금씩 방향을 틀면서 침대로 유도했다.

마침내 푹 쓰러진 두 몸이 시트 위에 겹쳤다. 하얀 시트와 이마 위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가득 쓸어올리며 키시아르는 드디어 제 모든 것을 가져간 이에게 몸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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