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꽃을 봤나?”
한참 동안의 입맞춤이 끝난 뒤, 잠시 떨어진 사이를 틈타 키시아르가 이마를 가볍게 맞댄 채 물었다.
“네, 봤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더군요.”
“하하하.”
키시아르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창가에 기댄 채 유더의 허리를 끌어안은 사내의 눈빛이 장난에 성공한 악동처럼 반짝거렸다. 유더는 제가 꽃을 밟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들을 말로 설명하는 대신 옷자락을 힘주어 꽉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은 다른 이들과 술을 좀 마시고 와서야 발견할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설마 보자마자 이렇게 빨리 달려올 줄은 몰랐네.”
“제게 아까 눈으로 신호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신호가 맞긴 했지만, 보좌가 그리 말하니 어쩐지 굉장히 공적인 의미로 느껴지는군그래.”
대단히 사적인 마음을 담아 보낸 윙크를 그렇게 비밀 임무지시라도 오간 것처럼 표현하는 것도 재주라며 키시아르가 농을 쳤다. 물론 유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키시아르의 표정이 광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너무 많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는 어느 정도를 주어야 적정선이 될까? 말해 보게. 원하는 만큼 준비할 테니.”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능청맞게 다음에도 꽃을 주고 싶다는 의미의 말을 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유더는 한숨과도 비슷한 웃음이 입술 사이로 어쩔 수 없이 흘러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굳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장님께서 꽃을 많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 건 아니니까요.”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뛰쳐 올라오고 만 이유는 거기 깔린 것이 꽃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 있었던 게 꽃이 아닌 그 무엇이었더라도, 키시아르 라 오르가 보낸 물건임을 깨달았더라면 지금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를 담아 말한 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유더는 제가 예상치 못했던 표정과 마주하고 조금 놀랐다.
“…그래, 알아. 바보 같은 질문을 해 버렸군.”
눈썹 끝을 누그러뜨리고 웃는 키시아르의 얼굴에 가득한 감정이 너무나 짙고 솔직해서.
“그러니까… 괜찮다면 한 번 더 입 맞춰도 될까.”
기쁨과 애틋함을 담아 묻고 있는 눈동자 속에 유더 자신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먼저 눈을 감고 얼굴을 틀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홀린 듯한 감정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장님.”
“유더.”
또다시 오랜 접촉 끝에 입술이 떨어졌을 때,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더는 눈을 깜박이다 재차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하십시오.”
“아니, 괜찮아. 먼저 말하게.”
조금 부은 입술 아래를 가볍게 쓸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고 부드러웠다.
“…이전에 제게 주신 열쇠를 이제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건 꽃을 보기 전부터 했던 생각 중 하나였다.
키시아르는 이미 제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는 수도에 돌아가면 더 이상 스스로를 억눌러 참던 힘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런 상황에서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쥔 채 계속해서 시간을 끄는 건 더 이상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 열쇠를 돌리는 순간 바뀌어 버릴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망설였던 때는 이미 과거로 변한 지 오래였다.
그가 변화 이후에 걱정했던 모든 것들을, 키시아르는 그간 놀이 같은 연극의 가면을 쓰고 하나씩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신분. 타인의 말과 시선.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비밀로 남겨질 줄로만 알았던 이전 생까지도.
완벽하게 모든 벽이 부수어진 채 그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살아 숨을 쉬는 키시아르에 의하면 놀랄 만큼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을 늘 슬며시 누르고 있던 열쇠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저는, 제 마음은.”
유더는 느리게 중얼거리며 과거의 키시아르가 제게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제 모든 것도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되찾아 올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단장님께서 하시려던 말씀을 해 주십시오.”
맙소사. 아주 작은 탄식이 흘러나온 듯도 했다.
유더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강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금 빠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키시아르의 눈가가 드물게도 붉게 상기된 모습을 보니 모든 게 아무래도 좋아졌다.
“내가 하려던 말은… 아까 광장에서 떠나기 전, 황제 폐하가 그러시더군.”
한참 뒤 팔을 풀지 않은 키시아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마병단 환영식이 모두 끝난 뒤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 사이에서 잠시 일어났던 은밀한 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키시아르는 마병단 단장이자 펠레타 공작으로서 황제와 황후의 손을 잡고 가볍게 마차까지 이끌어 배웅을 했다. 형제는 잠시 다른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짧게 말을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모습을 보았고 궁금해했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감각을 예민하게 세운 유더조차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대화가 끝나고 나서 키시아르가 짤막하게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기에 어렴풋이 나쁜 이야기가 오간 건 아닌 모양이라 짐작했을 따름이었다.
“마병단이 쉬는 동안 나도 반드시 함께 쉬도록 황명을 내리겠다고 말이야. 휴가가 끝나고 황궁에서 파티가 열릴 때까지의 일주일간 한 번이라도 일을 했다는 말이 들리거나 황궁에 방문하면 크게 혼을 내겠다고 하시더라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명이지. 말하며 키시아르가 웃었다. 유더는 그제야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린 연유를 이해했다. 황제에게 마지막까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뭐, 나도 나만의 방식이 있으니 아주 곱게 들어주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겉으로나마 쉬는 척은 해야 하지 않겠나?”
“음……. 그렇군요.”
“그리고 마침 내 앞에는 방금 서로의 마음을 교환했다고 밝힌 매력적인 상대가 있군.”
“…….”
제 스스로 그런 의미의 말을 하긴 했지만 키시아르의 입에서 다시 같은 말을 들으니 대단히 견디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모든 벽이 무너졌다 해서 타고난 성정이 변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 내가 뭘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유더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번진 상기된 열기가 아까보다 더 짙어진 듯도 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닌가?’
유더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다 물었다.
“……단장님. 혹시, 열이 나시는 건 아닙니까?”
“아, 들켰나?”
놀랍게도 키시아르의 반응은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가벼운 손길로 스스로의 얼굴을 문지르며 대답해 주었다.
“사실 수도에 돌아온 이후부터 열이 솟는 듯해 나단을 황궁에 보내둔 참이었다네. 별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진단은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돌아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나단 주커만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다. 설마 황궁에 심부름을 갔었을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이런 젠장.’
정말 정신이 나가기는 했었던 모양이다. 키시아르 같은 특수한 몸상태를 지닌 이가 아니라도, 큰 임무를 끝내고 돌아와서 긴장이 풀린 탓에 갑작스레 앓아눕는 이들은 이전 생에도 제법 많이 봤었다. 당연히 이럴 가능성이 있단 것 정도는 생각해 두었어야 했는데.
어쩌면 케일루사 황제의 강경한 휴가 제안 또한 이런 사태를 예견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유더는 기막힌 기분 반, 약간의 자책 반이 뒤섞인 기분으로 키시아르를 살펴보았다.
유더의 기분을 알면서도 모른 척할 사내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그렇게 보지 말게. 몸이 아플 만큼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니고, 그간 억눌렀던 고삐가 느슨해진 탓에 조금 충돌이 일어나는 것 같으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약을 먹고 좀 자면 괜찮아질 거야. 물론 보좌는 내가 일어날 때까지 잠시 홀로 휴가를 즐기고 있는 쪽이 좋겠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유더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수도에 오자마자 억눌렀던 고삐가 갑자기 풀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서부에서 약속했던 그 일 외에는.
유더는 오랫동안 침묵하다 눈가를 가렸다.
“하나는 확실하겠군요.”
“뭐지?”
“휴가 동안 저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단장님의 몸을 살피는 일일 거란 것 말입니다.”
“간병은 필요 없겠지만, 그때 다 못한 시험을 계속하기는 해야겠지. 그리고?”
유더는 손을 내리며 키시아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마주한 시야 사이로 심장이 조금씩 크게 뛰었다.
“…저는 혼자 휴가를 즐길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 내가 원하는 대로 이해해도 된다는 뜻일까?”
허리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창에 완전히 무게를 실은 채 몸의 대부분이 맞닿은 상태였다. 유더는 옷 위로 등을 따라 부드럽게 올라오는 손길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