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57화 (457/805)

457화

키시아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제대로 된 환영식 준비를 모두 갖춘 광장이 있었다. 유더는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는 귀빈들 사이에 높이 솟아오른 단상과 그곳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태까지 몇 년간, 황제가 참석해야 할 자리는 대개 황후가 카치안 황태자와 함께 대신해 왔다. 하지만 오늘 광장의 가장 높은 단상에 자리한 두 사람 중 카치안의 얼굴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앉은 이는 본래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아야 할 케일루사 황제였다.

황후와 같은 천으로 만든 화려한 예복을 걸친 황제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말라 보였으나 그렇다고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쓰러졌다기에 당연히 황궁에 있을 줄 알았는데.’

놀란 건 유더 뿐만이 아니어서, 마병단원들과 귀족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 수많은 시선의 의미를 충분히 느낄 텐데도 황제는 마치 아무도 없는 자리에 홀로 앉은 양 고요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유더는 두 형제의 모습을 번갈아 훑은 뒤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저렇게 나오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이런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 미리 말했다면 내가 어떻게든 반대하여 방해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서 뒤통수를 치신 게지.”

짐짓 한 방 맞은 것이 어이없다는 듯 가벼운 말투였으나 눈빛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을 복잡한 감정을 유더는 차마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병단장 생활을 십 년이나 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일에 제법 익숙해졌다 생각하는데, 지금은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침묵을 지키는 유더가 이상하다 여긴 듯 돌아본 키시아르가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는 이내 사르르 접어 웃었다.

“지금 혹시 날 걱정한 건가?”

“…….”

“괜찮아.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나. 기껏 마병단을 위하여 폐하께서 만들어 주신 자리니 그 기회를 헛되게 만들지 않는 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겠지.”

“……예.”

“폐하가 나를 아시듯, 나도 폐하의 성정을 안다네. 여기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존재한다 여기셨다면 상황이 상황이라 한들 이런 대담한 선택을 하시진 않았을 거야. 그런 분이시니까.”

키시아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리라. 유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 저 또한 주변 경계는 늦추지 않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방벽을 얻은 기분이군. 고맙네.”

키시아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참기 어렵다는 듯 앞머리칼을 헤집는 손길 때문에 머리가 몹시 흐트러졌지만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병단원들을 태운 말과 마차가 환호의 물결을 따라 자연스레 광장에 도달했다. 마차에서 내린 키시아르는 마치 이 상황을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던 듯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손을 흔들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펠레타 공작의 웃음을 본 이들의 환호가 일시에 몇 배는 더 높아졌다. 조금이라도 더 그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려 하는 이들 때문에 대로 주변을 막고 있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부산해졌다.

키시아르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당당히 앞을 향해 나아가니 그 모습을 본 단원들 또한 덕분에 불안을 빠르게 가라앉히고 한결 밝아진 모습으로 뒤를 따랐다. 설명 한마디 없이도 모든 게 이미 준비된 양 보일 만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바로 한 걸음 뒤를 따르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황제가 앉아 있는 단상 바로 아래에는 오랜만에 다시 보는 스티버를 비롯한 수도 내의 단원들이 미리 줄을 맞추어 서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오늘의 환영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하나도 소식이 들어오지 않다니. 케일루사 황제가 정말 용의주도하게도 준비했군.’

광장을 메운 귀빈석에는 귀족들 외에도 궁중마법사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과 황궁기사단 기사들, 그리고 제국군 내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장성들도 많았다. 유더는 그 속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골라내다 문득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을 잠시 멈추었다.

‘간만에 보는군, 아페토 1공자 에이셰스……. 레블린도 있나.’

아페토 가의 사건 이후 외부 활동을 거의 자제하고 아버지인 아페토 공작의 세력을 꺾는 데 총력을 다한 에이셰스는 노력에 힘입어 오늘도 가문의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했다. 하지만 공작 자리까지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상황일 텐데도 그의 안색은 이전보다 훨씬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전 생에서 그가 죽었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덕분에 오늘의 에이셰스는 몹시 날카롭고 우울해 보였다.

레블린은 에이셰스와 가족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떨어진 자리에 연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마병단원들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싱글대며 웃는 얼굴에 자랑스러움과 부러운 감정이 솔직하게 엿보였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임시 단원이라 오늘의 환영식에 정식으로 참석하지 못한 게 아쉬운 듯했다.

‘곧 다음 기수 단원을 받을 예정이라고 했으니 다음부터는 함께할 수 있겠지.’

그 좋은 소식을 언제쯤 알려 주는 게 좋을지 생각하며 레블린을 바라보던 유더는 문득 어디선가 피부가 짜릿할 만큼 느껴지는 적의감에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된 살의는 아닌 듯해 누군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키올레 다 디아카가 디아카 공작 옆에 앉아 그를 어설프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거리도 제법 먼데 단원들 속에서 잘도 날 찾아냈군.’

입 모양을 작게 움직이며 연신 무어라 중얼대는 걸 보니 유더가 죽지 않고 건강히 살아 돌아온 사실에 유감이 아주 강한 듯했는데, 서약의 힘이 발동되지는 않는 걸 보면 그사이 험한 말버릇을 제법 잘 고친 모양이었다.

경계할 만한 가치도 느껴지지 않아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유더는 문득 키올레가 걸친 갑옷 가슴 부분에 찍힌 새로운 문양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황태자 호위 기사들의 표식이 아닌가?’

먼 거리긴 하지만 확실했다. 한쪽 눈에 마력의 혜안이 열린 뒤로부터 유더는 때때로 어떤 것들이 전보다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이누에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사이 어둠 속에서도 기이할 만큼 상대의 표정을 잘 읽어냈던 일도 그 일환이었고, 돌아오는 동안 다른 동료들이 거의 확인하지 못할 만큼 먼 거리에 위치하는 이정표가 선명히 보인 적도 몇 번이나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에 비친 키올레의 갑옷 문양은 착각의 여지도 없는 황태자의 호위기사 표식이 분명했다.

‘디아카 가에서 카치안의 곁에 키올레를 붙이기로 한 건가?’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카치안의 곁에 붙어 있어야 할 놈이 혼자서 여길 오다니. 본래대로라면 말도 안 될 일이지만 어차피 그쪽에서도 키올레에게 제대로 된 호위 역을 기대하고 붙인 건 아닐 테니 의미 없을 일이었다.

유더는 키올레가 카치안의 호위기사가 된 정황을 좀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으며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모든 마병단원들이 키시아르의 뒤에 일제히 정렬하여 서자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백성들 앞에서 몇 년 만에 스스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오늘 짐이 이곳에 선 까닭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용감히 나서 제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돌아온 영웅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함이다.”

마법을 통해 증폭된 목소리가 높이, 그리고 멀리 퍼지며 모든 이들이 조용해졌다. 수백, 수천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울 텐데도 황제는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올해 서부에서 발생한 몬스터 대량 발생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 큰 피해를 입은 인접 타국들의 경우를 들어 이야기했다. 그 와중에도 서부에서는 그곳을 지켜야 할 귀족들의 묵인하에 불법 무역이 자행되고 있었다는 말을 유려하고도 침착하게 돌려 언급하기도 했다.

마병단이 한 일들을 결코 정치적인 목적의 일로 만들지 않고 잘 치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못한 자들을 교묘하게 꼬집는 화술이 과연 키시아르의 혈육다웠다.

처음에는 그저 황제가 입을 열었다는 사실만을 신기해했던 백성들은 점차 그의 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키시아르가 중간중간 마병단의 공을 황제와 제국에 돌리는 재치 있는 대답을 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고, 마침내는 황제의 한마디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디아카 공작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이 돌 씹은 표정을 지었다.

치하를 위한 연설이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자 광장의 공기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끓어올랐다.

“…그러므로 짐은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를 비롯한 330명의 마병단원, 그리고 이번 일을 도운 모두에게 그 공에 걸맞은 상을 내리겠다. 그것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황궁에서 준비하라 일렀으니 사양치 말고 즐기도록. 서부를 구한 그대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와아아.

황제의 말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지금까지 중 가장 커다란 함성이 광장을 메웠다.

누군가 던진 꽃송이가 머리칼을 툭 두드리고 떨어진 순간 유더는 방금까지 하고 있던 모든 심각한 생각을 잠시 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 아래 끝을 모르고 날리는 화사한 꽃잎들.

그의 숨이 끊어졌던 그날과 아주 비슷한 광경이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전혀 달랐다.

유더는 한 발짝 앞에 당당히 선 채 여유롭게 웃고 있는 키시아르의 너른 등을 보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마병단이 받은 첫 환영식은 그렇게 아무런 문제 없이 완벽하게 끝이 났다.

***

오랜만에 돌아온 마병단 본부는 조금의 변화도 없이 여전했다.

키시아르는 아직도 흥분에 차 있는 단원들에게 간결히 일주일 간의 휴가와 월급의 몇 배는 되는 포상금 지급을 공지한 뒤 마음껏 즐겁게 쉬라는 말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환호를 지른 단원들 중 반은 당장 술을 마시고 싶다며 뛰어나갔지만 나머지 반은 밀린 휴식을 위해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유더는 당연히 후자였다. 그를 붙잡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많았지만 친한 이들이 나서서 아직 부상의 여파가 낫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말로 열심히 두둔해 주었기에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짐가방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유더는 키시아르가 먼저 올라가기 전 제게 남겼던 약간 의미심장했던 어떤 동작을 떠올렸다.

‘……분명히 내 쪽을 보고 눈을 찡긋한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뜻이 더 있는 듯도 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뜻이 짐작 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 짐을 풀어놓고 씻은 뒤에 단장실로 올라가 봐야겠군.’

유더는 간만에 보는 제 방문 앞에 서서 깊이 숨을 내쉰 뒤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

안을 보고는 다시 닫았다.

‘뭐지?’

눈을 의심하며 가만히 서 있다가 방금보다 조금 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여전히 똑같았다. 그는 한참 동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다 겨우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게 대체…….’

한 사람이 씻고 자며 생활하기에 적절한 유더의 작은 방은 본래 짐가방에 들어갈 정도의 옷가지와 소지품을 빼면 언제든 빈방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깨끗했었다.

그런데 지금 열어본 방은 방금 떠나온 광장을 통째로 옮겨 둔 것처럼 수많은 꽃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눈을 아무리 감았다 떠도 그 광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토록 수많은 꽃을 대체 누가, 왜 여기에 가져다 두었는가. 범인의 정체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했다.

유더는 대삼림에서의 어느 밤, 키시아르가 그에게 남겨놓고 간 종이꽃을 떠올렸다.

‘몸이 나은 것을 축하하며. 진짜는 나중에.’

그렇게 적혀 있던 그 꽃은 지금도 유더의 짐가방 가장 깊은 곳에 누구도 모르도록 보관되어 있는 상태였다.

설마 그 진짜가 이런 것이었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유더는 발목까지 덮어 발에 채이는 꽃들을 밟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결국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꽃으로 뒤덮인 침대 위에 가방을 던졌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날린 꽃잎들이 유더의 옷과 몸에 달라붙었다. 향긋하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그리고 가슴 안쪽까지 거세게 파고들었다.

정신이 나가 버릴 듯한 그 향기에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유더는 어느덧 문밖으로 나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문을 두드릴 생각도 하지 않고 열었다. 커튼이 나부끼는 단장실의 책상 뒤 창가에 서 있던 사내가 머리칼을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림과 동시에, 유더는 그에게로 뛰어들었다.

향기가 열기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456.5>

“역시 유더 형은 굉장해!”

흙투성이가 되어 마차로 기어들어 온 지미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소년은 기어이 유더 아일과의 간단한 대련을 성사시키고 온 참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쉬는 시간 동안 이루어진 대련에는 하루 종일 마차와 말을 타고 이동하느라 심심하기 그지없었던 단원들이 모조리 몰려들어 구경을 했다.

지미는 그간 발전시킨 모든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달려들었다. 힘이 많이 늘었다고 장담하더니, 과연 대단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유더 아일의 옷자락 끝 하나 자르지 못했다. 대삼림의 몬스터들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던 검은 유더가 아무렇지 않게 내뻗은 손 앞에서 맥없이 빗나가거나 허공을 내리치기 일쑤였다.

몇 번의 공방 끝에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흘려 넘기면서 검을 손쉽게 빼앗은 유더는, 무기의 본래 주인보다 훨씬 능숙하게 그것을 휘두르며 단숨에 상대를 무너뜨리고는 순식간에 목에 겨누어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렇다 할 능력도 쓰지 않았는데 너무나 쉽게 이겨 버려 지켜보던 이들의 맥이 다 빠질 만큼 어마어마한 실력 차였다.

하지만 지미는 조금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그는 유더에게 질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너무나 즐거워했다. 다섯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한 끝에 단장 키시아르에게서 이제 그만 출발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물러난 소년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같은 마차에 탄 가케인과 엘더 남매에게 자신의 벅찬 마음을 마구 토해 냈다.

“형이 능력의 강도가 조금 세졌다고 다 강해진 게 아니라고, 검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다 보이니까 기초 검술 훈련을 매일 다섯 번씩 더 하래요. 그래서 내일부턴 열 번씩 추가하려고요!”

“하하. 지미. 그렇게 구르고도 안 지쳐?”

가케인이 감탄과 대견함이 섞인 눈으로 물었다.

“전혀요! 사실 할 수만 있었으면 단장님께도 상대해 주실 수 있느냐고 여쭤 보고 싶었는데……. 못 해서 아쉬워요.”

기력이 넘쳐흐르는 열두 살의 패기 넘치는 발언에 핀 엘더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단장님과 일대일 대련이라니… 으으. 난 싫어.”

“나도.”

힌 엘더가 동생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서 동조했다.

“어, 왜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단장님은 뭘 하든 절대 쉽게 안 끝내 주잖아.”

“맞아. 신과 사람들이랑 대련할 때 보면 다들 지쳐 쓰러져 있어도 단장님이 빨리 끝내 주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쌍둥이 사이에 암묵적인 동의가 오고 가는 가운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미가 문득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유더 형은요? 유더 형이랑 대련하는 것도 별로예요?”

“유더는 괜찮아. 뭐든 속전속결이잖아.”

“그럼 가케인 형은요?”

“나? 음……. 둘 중에 누구랑 1대1 훈련을 할 거냐고 물어본다면 나도 유더랑 할 것 같네.”

“에엥. 가케인은 훈련 욕심이 많아서 단장님을 택할 줄 알았는데, 왜 유더야?”

힌의 질문에 난감한 얼굴로 미소를 지은 가케인이 조심스레 이유를 덧붙였다.

“그게, 유더는 내가 쓰러져서 기절하면 바로 다음 사람에게로 넘어갈 것 같지만 단장님은… 기절해도 다시 일어날 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계실 것 같아서…….”

“으악, 상상된다! 웃으면서 지켜보실 때 그 얼굴! 알아!”

“가케인, 설마 이미 당해 봤어?”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호들갑을 떠는 엘더 남매의 소란이 가라앉은 뒤, 지미가 화제를 돌렸다.

“있잖아요, 그럼 만약에… 단장님하고 유더 형이 대련하면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응?”

세 사람의 눈빛을 받은 지미가 머리를 긁적이며 눈치를 보았다.

“솔직히… 궁금하잖아요. 저만 그래요?”

평민 출신에 자신들과 같은 시기에 마병단에 들어온 이를 하늘같이 높고 고귀한 단장님과 비교하다니. 보통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일이며 몹시 위험한 발언 취급을 받겠지만 그들은 마병단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심각한 얼굴로 턱을 문지르던 핀이 쌍둥이 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응. 이거 어렵네.”

“그러게. 이렇게 답을 내기 어려운 질문은 처음이야. 너랑 나를 구분해 보라고 장난쳤을 때 울었던 맥키 삼촌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너희들… 대체 무슨 장난을 치고 다녔던 거야.”

“안 가르쳐 주지.”

가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쌍둥이는 답해 주지 않고 까르르 웃을 뿐이었다.

이후 네 사람은 제법 심각하게 ‘유더 아일과 단장님의 대련. 과연 승자는 누구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다. 수도를 향해 달리는 마차 안에 종일 처박혀 있어야 하는 지루한 상황에서 이 흥미진진한 주제는 시간을 보내기에 몹시 좋았다.

“아니, 유더는 그 거대한 몬스터의 머리도 혼자서 잘랐잖아. 땅 능력으로 발을 묶고 바람 능력을 쓰면 못 피하는 곳이 없던데 그 정도면 누구든 이기지 않을까?”

“단장님이 힘을 쓰시는 모습을 별로 안 보여 주셔서 그렇지, 한 번도 다른 사람 상대로 어려워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유더처럼 부상당한 적도 없는데 그러면 그분이 더 세겠지.”

“하지만 유더는…….”

“아니야. 단장님이 그때…….”

“에잇! 결론이 안 나네!”

한참의 격렬한 토론 끝에 결국 힌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질렀다.

“아직 실제로 이루어진 적도 없는 걸 가지고 우리끼리 말해 봤자 뭐 해? 재미없어! 차라리 내기나 하자!”

“무슨 내기?”

핀이 곧바로 관심을 보이며 반문했다.

“누가 이길지 그냥 내기하자구! 언젠간 답을 알게 되겠지!”

“오래간만에 재미있겠는걸! 그런데 뭘 걸고 할 건데?”

“아무래도 돈이 제일 낫지?”

“하긴. 이번에 임무가 끝나고 나면 포상금이 나올 거란 말이 있던데 거기서 조금 떼면 되겠다. 좋아. 그걸로 해!”

“앗 그거 저도 할래요. 끼워 주세요.”

“잠깐만, 다들 진정해! 내기는 그렇다 쳐도 돈을 거는 건 도박이잖아.”

“무슨 소리! 가케인. 남부 출신이 이 정도를 가지고 도박이라고 하는 거야? 간이 작네!”

가케인은 그게 그것과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기세에 밀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기어이 가케인까지 내기에 끌어들인 힌은 그쯤에서 끝내지 않고 한술 더 떠 일을 더욱 크게 키울 꿈을 꾸었다.

“그런데 이걸 우리 넷만 하면 재미없지? 이런 건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해.”

“힌… 일을 너무 키우는 건…….”

“걱정하지 마. 괜찮아. 일단 지미가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먼저 물어본 다음에 관심이 있어 보이면 그때 살짝, 아주 살짝 참여 의사를 물어볼 테니까! 관심 없어 보이는 사람한텐 절대 안 권해!”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

쌍둥이가 마치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가케인은 몇 번쯤 더 그들을 말리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단장과 단장 보좌가 모르는 사이, 마병단 내부에서 다소 수상한 설문 조사와 내기 참여자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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