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입단 후 처음으로 서로를 향한 경쟁심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며 주변에 있던 단원들이 신나게 내기를 걸었다. 들뜬 분위기는 키시아르가 모습을 드러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모두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쁘군.”
“단장님의 옥안을 다시 뵙게 되어 저희도 기쁩니다. 시력이 벌써부터 아주 좋아진 것 같습니다.”
능청맞은 성격의 한 단원이 목소리를 높여 키시아르를 향해 경례를 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덩달아 환호를 하며 그를 따라 인사했다. 입단식 때 키시아르를 보자마자 겁을 먹던 이들과 동일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키시아르가 그 정도 농담쯤은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임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키시아르는 모두가 바랐던 대로 그 어느 때보다도 멋진 미소로 단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고맙네, 조이스. 자, 하지만 이 정도로 기뻐하기는 아직 이르지. 돌아가면 멋진 휴가와 맛있는 식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모두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힘을 내 주도록.”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하늘이 다 들썩거릴 듯한 박수와 웃음 속에서 유더는 키시아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의 그 누구도 키시아르가 돌아가자마자 죽어 가고 있는 황제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저 매끈한 미소를 보며 누가 그 이면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는 모든 감정을 감추고 웃는 데 너무나 익숙했다. 기뻐하고 있는 마병단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하나뿐인 형제를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까지라도 제 감정을 뒤로 미루어 두리라.
그것이 바로 키시아르란 사내였다.
한때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언젠가는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또 다른 의미로 키시아르 라 오르에 대해 몰랐던 무언가를 조금 알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복잡하고도 씁쓸한 감정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유더는 눈을 내리깔았다.
***
“폐하.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소식을 보내셨습니다. 예정대로 곧 수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십니다.”
낮고 정중한 시종장의 목소리에 황제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파리한 안색 위로 드물게 진심이 담긴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늦지 않고 잘 왔군. 내가 나갈 준비는 모두 되었나?”
“예.”
“황후는?”
“태양궁 바깥까지 이미 도착해 계십니다.”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 발로 일어나 섰다. 힘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으나 워낙 느린 탓에 휘청이지는 않았다.
늙은 시종장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황제의 옷시중과 준비를 도왔다. 평소 걸치고 있던 가볍고 간단한 차림새와는 전혀 달랐다. 오늘 황제가 걸친 옷은 제국의 황제가 모두의 앞에 나설 때 입는 제대로 된 예복이었다.
푸른 천을 어깨에서부터 허리에 둘러 감고, 금사로 꼬아 만든 끈을 망토에 엮었다. 천 년의 역사 내내 이어져 내려온 오래된 보석들이 전신을 빈틈없이 둘렀다. 마지막은 신비한 빛을 내는 투명한 실로 자수를 넣은 흰 장갑과 오르 제국 황제의 상징인 황금관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황제는 품이 넉넉한 옷자락을 보며 쓰게 웃었다.
“제법 줄였는데도… 아직 옷이 크군. 아니, 내가 그사이 더 살이 내린 건가.”
시종장이 송구하다는 뜻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네 잘못이 아니니 그리 숙이지 말아라.”
전신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선 황제는 자신이 마치 옷에 짓눌려 있는 듯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화장으로 파리한 안색과 갈라져 터진 입술을 감추어도 말라 버린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실제로 황금관과 긴 망토는 황제의 몸을 아주 갑갑하고 힘들게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금방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황제는 등을 돌려 오랫동안 나가지 않았던 문을 향해 걸었다. 시종장이 앞서 나아가 문을 두드리자 바깥에 서 있던 기사들이 손잡이를 당겼다.
실로 오랜만에 2궁의 문이 열리는 순간, 많은 이들이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황제는 정중히 무릎을 꿇은 기사들을 지나 바깥으로 나아갔다. 쌍둥이처럼 닮은 마차 두 대의 앞에 선 채 그를 기다리던 수많은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황제를 향한 예를 표했다. 동시에, 오른쪽 마차의 문이 열리며 황후가 뛰어내렸다.
“폐하.”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황제를 본 황후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슬픔을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 같은 날 함께할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황제는 황후와 함께 각자의 마차 앞에 섰다. 오래전에는 언제나 한 마차를 탔었지만, 이제 그들은 결코 한 마차를 타지 않는다. 그 이유를 부부는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황제는 마차에 올라타기 전, 황후의 등을 향하여 작게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
황후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마차로 들어갔다.
“황제 폐하께서 출발하신다!”
우렁차고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외친 기사가 말고삐를 힘차게 당겼다. 거대한 행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렬이 태양궁을 넘어 1구역과 2구역을 가르는 경계에 도달하자 그곳을 지키던 이들이 숨을 삼키며 무릎을 꿇었다. 경계 너머에는 끝자락이 긴 푸른색 마법사 로브 차림의 여인과 그 뒤를 따르는 마법사들이 서 있었다.
“궁중마법사청의 모든 이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마차 앞에 공손히 인사를 한 그녀는 행렬의 앞에 붙어 따르기 시작했다. 2구역에서 3구역으로 넘어갈 때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제국군 장군과 병사들이 마찬가지로 절도 있게 인사를 하며 머리를 숙였다.
“제국 대장군 제랄드 무커, 두 분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여기에 왔습니다.”
마차를 지키듯 둘러싼 행렬이 더욱 커졌다. 나아가는 행렬을 본 모든 이들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7구역에 가까워질수록 행렬은 더욱 길어졌고, 거리의 모습 또한 그에 맞춘 듯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화려해졌다. 대로를 중심으로 키 큰 나무와 건물들을 장식한 가지각색의 꽃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향긋한 향기를 뿌렸다.
마침내 6구역과 7구역을 가르는 경계에 도달했을 때 마차는 한 번 더 멈추었다.
그곳에는 금으로 장식한 예갑과 제복을 걸친 테오라도 반 타인과 황궁기사단 기사들, 그리고 검은 단복을 걸친 스티버 렌들리와 서부로 가지 않고 내내 수도의 본부를 지켰던 소수의 단원들이 서 있었다.
“황궁기사단장 테오라도 반 타인이 두 분 폐하를 뵙습니다.”
“마병단 술과 부단장 스티버 렌들리가 두 분 폐하를 뵙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나서서 인사를 하자 몰려 있던 모든 백성들이 환호를 질렀다.
“세상에! 정말로 폐하가 오셨어!”
“황제 폐하께서 여기까지……!”
황궁기사단의 몇몇 기사들이 그 고함들에 미간을 찌푸렸으나, 결국에는 아무 말 없이 행렬의 가장 앞에 합류했다.
황제의 행렬은 7구역 대로의 끝, 남문 근처에 마련된 거대한 광장에서 비로소 자리를 잡고 멈추었다. 그곳에는 누군가를 환영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이미 계획대로 잘 마련된 상태였다.
다소 내키지 않는, 그러나 이 마차 안의 풍경만은 너무나 궁금해 참을 수 없어 보이는 눈빛들로 그 자리에 참석해 있는 수많은 귀족들을 보며 황제는 서늘하고도 차갑게 웃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내 멀리 성문을 넘어 들어오기 시작한 검은 옷의 마병단원들을 본 순간 놀랄 만큼 부드럽게 사그라졌다.
“자, 그러면 이제… 키시아르를 만나러 가 볼까.”
***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 꽃들은 다 뭐고?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 줘!”
“나, 나라고 알겠어?”
“사실 오늘 우리 말고도 뭐 어디 다른 기사단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날이었던 것 아냐? 그거 말고는 짐작되는 게 없어!”
“나 지금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 가고 싶어……!”
유더는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거센 환호 너머, 얼떨떨함과 무서움이 반쯤 섞인 목소리로 중얼대는 단원들의 목소리를 희미하게 들으며 속으로 동의를 표했다.
‘정말로 이게 무슨 일인지 나도 모르겠군.’
수도로 올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특이점도, 이렇다 할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수도의 남문 바깥쪽에서 출입자들을 살피는 관문 앞에 내렸을 때 발생했다. 마병단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들여보내 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통과 승인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거기까지도 납득하려면 할 순 있었지만 남문에 가까워지자마자 느껴지는 엄청난 환호와 인파, 그리고 성문 밖까지 나부끼는 꽃잎들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일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환영식이 있었더라면 키시아르가 미리 알려 주었을 터다. 하지만 키시아르는 이 상황에 대해 미리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유더의 의문 어린 눈을 마주한 그는 짚이는 게 아주 없는 건 아닌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도 이 상황의 이유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냥 들어가 보자고 말했다.
그러고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끝도 없는 환호 때문에 귀가 다 먹먹했다. 마차 위로 뿌려지는 꽃이 대로 전체를 덮을 지경이었다.
‘…정말 우리를 위한 환호인가?’
유더는 어딘지 모르게 그 광경들을 몹시 어색하고 멀게 느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전 생에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때의 마병단이 그 어떤 임무를 멋지게 성공시키고 상을 받았어도 이런 환호를 받은 적은 없었다.
아무리 남부러울 것 없이 대접받았다 해도 그들은 거의 황제의 그림자 속에 있는 이들이며 대부분이 평민 출신이었다. 거창한 환영식 따위가 필요하다 여겨지지 않는 이들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이건 대체.
“……이제 좀 감이 잡히는군.”
그때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마차 창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어딘가를 살피며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에게조차 비밀로 하고 폐하께서 깜짝 선물을 내리고 싶으셨던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