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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54화 (454/805)

454화

“죽으면 그대로 버리고 가려 했는데 어제부터 기적적으로 호전되더군. 운이 좋아.”

“…….”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능력을 쓰지는 말아 주었으면 하는군. 성문을 빠져나오며 본 것만 해도 네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동의하지 않으면 여기서 처리할 거야.”

나한은 느리고도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운 잿빛 눈동자가 덜컹대며 움직이는 마차 내부를 느리고도 꼼꼼하게 살폈다. 좋지 않은 냄새로 가득한 낡은 짐마차 안에는 그와 모자를 벗은 남국인 사내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두터운 로브로 전신을 감싼 그는 수상해 보이는 낡은 자루 하나와 긴 검을 곁에 둔 채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손을 얹어 둔 상태였다. 헛짓을 하면 언제든 죽이겠다는 뜻이 느껴졌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기억나나?”

남국인 사내의 질문에 나한은 메말라 터진 입술을 열었다.

“……마주쳤었지. 지하에서.”

“그래. 다행히 머리는 다치지 않았나 보군.”

“물은, 없나.”

“며칠을 쉬지 않고 달리느라 보급해 올 시간이 별로 없었어. 있는 거라곤 이것뿐인데, 마실 수 있겠나?”

나한은 그가 내민 더러운 수통을 바라보다 잠자코 입을 벌렸다. 어깨와 상반신 전체가 붕대 대신 천으로 묶인 상태라 스스로는 그것을 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마름을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양의 물이었으나 그래도 입술을 축인 뒤에는 머릿속과 시야가 전보다 조금 더 명확해졌다. 나한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현재 우리는 요훔 무역로를 따라 이동하는 중이다. 이대로 간다면 문제없이 곧 샬로인에 도착할 예정이고.”

샬로인. 오르 제국 남부에서 가장 큰 해상무역 도시. 그 외 몇 가지 정보가 나한의 메마른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떠올랐다가는 다시 가라앉았다.

“그래. 약속을 지켜 주어 고맙군, 형제들.”

“형제들이라. 그때 듣고도 어이가 없었지만 다시 들어도 우습군.”

남국인 사내가 전혀 우습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한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와 마병단 때문에 우리는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럼에도 너를 데리고 온 건 우리가 같은 곳에서 탈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도움을 받은 바가 있으니 약속을 지킨 것뿐이야.”

“…….”

“하지만 너와 같은 힘을 지닌 이들이 무엇을 바라고 오르 제국과 마병단에 그토록 맞섰는지는 몹시 궁금했다. 이유가 뭐지? 너희들은 무엇을 바라고 타인 공작 측과 황제의 마병단, 둘 모두와 적대했는가? 그건 너희들 모두의 공통된 목표에 의함인가? 너희 일당들의 정체는 뭐지?”

나한은 대답 대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 힘을 쓰는가 싶어 미간을 찌푸린 사내가 뒤로 물러나자 나한이 입을 열었다.

“그걸 알면 무엇이 달라지지?”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너희와 우리 사이에 주고받을 도움이 좀 더 길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단순히 타인 공작의 개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대답하기에는 어려운데.”

“목숨을 담보로 두고도 대답할 수 없다는 뜻인가?”

남국인 사내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나한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남국인 사내의 몸에서 슬그머니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어날 뻔한 순간, 여태껏 검을 쥔 채 상황을 관망하던 제3의 남국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 협박이 통할 놈이 아니다, 오나쾬. 물러나라.”

“하지만 아톤 님.”

“그자는 우리의 계획을 거꾸러뜨린 놈이 아니야. 상대에게서 제대로 된 협조를 얻고 싶다면 우리 또한 그만한 패를 내놓아야 마땅하지. 지금 중요한 게 뭔지 잊지 마라.”

오나쾬이라 불린 사내는 결국 잠자코 뒤로 물러났다. 아톤은 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검을 놓고 모자를 벗었다. 검은 머리칼로 오해할 만큼 짙은 갈색 머리칼 아래, 날카로운 진청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평범해 보여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인상의 오나쾬과 달리 아톤은 선이 얇고 귀족적인 생김새를 지닌 미남이었다.

“지금 수도에서는 타인 공작가와 관련한 재판 예고가 한창이다. 현 타인 공작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리라는 의견이 다수이며, 그가 서부에서 진행해 온 무역 사업 또한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생겼지. 그를 그렇게 만든 중심에는 마병단이 존재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한다 생각하는가?”

“높은 이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 없어.”

“그러면 너는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지?”

“형제자매들의 자유. 불필요한 것들이 사라져 깨끗해질 세상.”

거칠게 갈라졌으나 기묘한 광기를 띤 불길 같은 목소리. 오나쾬이 코를 찡그리며 대체 무슨 헛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한을 뚫어져라 살피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군. 네게 있어 사라져야 할 불필요한 것들은 각성자가 아닌 이들이며 현재 윗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기도 하단 소리군.”

“…….”

“잘 알겠다.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하지. 약속대로 남부에 도착한 뒤 내려줄 테니 너 또한 그사이에 우리를 향하여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을 지켜라.”

아톤은 도로 모자를 뒤집어 썼다. 대화가 진짜 이대로 끝나는 것인지 궁금해진 오나쾬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돌아보았으나 나한은 이미 기력이 다한 듯 눈을 감아버린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한이 정말로 재차 기절했음을 확인한 뒤, 오나쾬이 목소리를 죽여 남국 말로 물었다.

“아톤 님. 왜 그러셨습니까?”

“저자의 눈빛을 보았나?”

“예? 보기는 했습니다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자다. 더불어 위험하기도 하지. 저자가 바라는 건 우리와 비슷하지만 양립할 수 없으니 이대로 내버려 두는 쪽이 나아. 굳이 들쑤실 필요 없다.”

“그러면…….”

“저자를 남부에 내려준 뒤 어디로 향하는지 쫓아라. 분명 또 다른 동료들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아니더라도 말이 통할 이들이 분명 있을 거야.”

확신을 지닌 말투로 내뱉은 뒤, 아톤은 나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마지막 말을 끝냈다.

“힘을 지닌 이들로만 구성된 조직이 제국 가장 아래 웅크리고 있단 걸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소득은 이미 충분하다. 대족장께서도 만족하시겠지.”

대족장이라는 말에 오나쾬의 눈빛이 변했다.

“…알겠습니다.”

“잊지 마라. 도착하는 즉시 쫓아야 한다. 극도로 위험한 자이니 그에 맞는 능력을 지닌 자들을 뽑아. 스윈과 네가 직접 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지닌 자가 어쩌다 이런 상처를 입고 제국 같은 곳에 있었는지는 솔직히 조금 궁금하군요.”

같은 민족을 향한 호기심을 드러낸 오나쾬의 질문에 아톤이 무심히 답했다.

“어디 출신이든 피부색이 몹시 옅은 편인 걸 보면 아마도 피가 섞인 이겠지. 그리고 피가 섞인 이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해.”

“그건 그렇습니다만.”

“얼굴이 저 상태가 되었음에도 하나도 가리지 않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미 보통의 인간들과는 거리가 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라 해도 조금도 방심하지 말아라.”

“예.”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오나쾬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달리던 마차가 덜컹이며 그들 사이에 있던 자루가 흔들거렸다.

그와 동시에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훅 퍼진 퀴퀴한 냄새를 맡은 오나쾬이 코를 킁킁거리다 짜증스런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크… 그건 그렇고 저 가루는 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리 갈수록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지 모르겠군요. 젖은 것도 아니고 최대한 애써서 운반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생산지에서 가져오다 다른 게 섞이기라도 한 걸까요.”

“…….”

대답은 하지 않았어도 같은 생각을 한 듯, 아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중상을 입었다 깨어난 나한조차 일어나자마자 맡았던 그 퀴퀴한 냄새는 단순히 짐마차가 낡았거나, 말이 흘린 분변 때문이 아니었다.

그 모든 냄새는 남국인 상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하여 소중히 운반해 온 칼라네사 가루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설마 썩은 건 아니겠죠. 저기서 원래 이런 냄새가 나는 게 맞는지 알 수가 없는데 물어볼 이도 없으니 고역이군요.”

“…마부석 쪽 창을 열어 좀 더 빨리 달릴 수 없느냐고 물어라.”

“예…….”

빌어먹을 마병단 놈들만 아니었어도 이런 고역 속에서 저걸 운반할 일은 없었으리라. 멍청하기 그지없는 타인 공작의 비호 아래 유통만 성공하면 모든 일이 잘될 예정이었는데. 온갖 남국식 욕설을 내뱉으며 마부석 창을 여는 오나쾬과 묵묵히 고개를 돌린 아톤의 고역은 그로부터 한동안 계속되었다.

***

오르 제국의 남쪽 끝에는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다. 건너는 데 수십 일이나 걸리는 그 사막은 본래의 이름보다 ‘별의 무덤’이란 별칭으로 더 자주 기억되고는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남국에 가야 하는 이가 아니라면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지 않고, 세금을 걷으러 올 관리조차 없는 척박한 땅.

그런 곳 근처에 전국에서 몰려든 각성자들이 숨어 있는 마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서부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그곳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이 마병단에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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