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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53화 (453/805)

453화

호산라가 오래 깨어나지 않으니 자연히 그의 감시도 어느 정도는 약해졌다. 본래대로라면 그와 손목을 엮은 감시자 한 명이 붙어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손목에 엮은 긴 끈만 마부석 창 바깥까지 이어져 있는 게 그 때문이었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쉰 뒤 호산라의 몸 위에 가볍게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쪽에서 금빛이 반짝이며 보이지 않는 기운이 휘돌았다.

평범한 각성자들의 힘을 가늠하는 건 본래도 어느 정도 가능했던 일이라 키시아르 때보다 훨씬 쉬웠다. 굳이 몸 안을 들여다보는 형태로 힘을 발하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유더는 감각만으로 호산라의 몸 안에 존재하는 힘을 빠르게 파악했다.

‘역시 아직도 거의 회복되지 못한 상태군.’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깨어난다 해도 어쩌면 이전과 같은 수준의 능력을 쓰는 것 자체가 힘들 수도 있다. 힘을 쓰다가 큰 부상을 입은 각성자들 중에는 간혹 그런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 잡힌 나그란의 별의 일원, 에르시처럼 말이다.

에르시는 능력이 폭주하기 전 에버에게 제압되어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힘이 쇠퇴한 상태였다. 호산라와 달리 정신은 빨리 차린 편이었지만 치료를 거부하고 공격적으로 구는 통에 몇 명의 단원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심지어는 조사를 위해 들어갔던 칸나조차 목의 급소를 찔릴 뻔하는 아찔한 상황이 있었다.

에르시는 빌름 남작이 잡혔다는 말도, 비밀 경매가 파탄이 났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나한의 도주 소식이나 살아남은 인신매매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아랑곳없이 그저 모두가 한통속이라 외치며 공격을 시도할 뿐이었다.

그랬던 에르시가 얌전해진 건 에버와 다시 만났을 때였다.

본래는 필요 이상의 자극이 될까 싶어 한발 물러나 있었던 에버는 칸나가 다칠 뻔하자마자 무서운 얼굴로 나서서 에르시를 독대했다. 거기서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에르시는 부쩍 조용해졌다. 칸나도 그제야 제대로 그녀를 읽을 수 있었다.

각성한 마티를 만난 이후로는 더 얌전해졌다고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키시아르를 만났을 때는 홀로 식사까지 할 만큼 호전된 상태였다.

‘드디어 죽음의 시간인가.’

주변의 모든 걸 태우다 못해 결국 자기 자신까지 모조리 불사른 광기에서 다소 벗어난 에르시는 이전보다 훨씬 담담한 모습이었다. 당연히도 자신이 즉결 처형되리라 생각한 듯했으나, 키시아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지?’

‘반대로 묻지. 왜 죽여야 하지? 자신이 여기서 사형당해 마땅한 이유를 댈 수 있나.’

그 말에 에르시의 눈 안에서 불이 훅 일었다. 꺼진 줄 알았던 불이 사실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음을 그때야 알았다.

‘내가 죽인 놈들의 이름을 스스로 모두 대기라도 하라는 건가?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했는지 알지도 못할 위선자들이! 1년 전에 같은 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도움을 바랐을 때 너희들은 무얼 했나! 난 죽여 마땅한 놈들을 죽였어! 날 여기서 죽이지 않는다면 다음은 너희 차례가 될 것이다! 그 잘난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 내장에 처넣어 주겠어!’

사나운 외침에 유더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 키시아르가 손을 들어 막았다. 입에 담지 못할 저주와 욕설을 들으면서도 그의 웃는 얼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는 1년 전에는 마병단이 없었다는 대답을 하는 대신, 전혀 다른 반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하나 묻지. 글레힘 빌름의 하인들도 죽어 마땅했다 생각하나?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인 타이누의 평범한 사람들과 맡은 일을 다하기 위해 순찰을 돌았을 뿐인 병사들은?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혹시 아나?’

키시아르의 입에서 순식간에 수많은 이름들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번 사건 내내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이 일으킨 사건에 휘말려 다치거나 죽은 이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평범한 이름들이 하나하나 흘러나올 때마다 주변에 선 단원들의 표정이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고, 에르시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그냥 여기서 죽이면 되잖아!’

‘아니. 넌 여기서 죽지 않을 거다.’

키시아르가 조용히 선언했다.

‘네가 죽는다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지. 네가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 진짜 원인도 복수로 인해 해결되지 못했듯이.’

‘…….’

‘그러니 나는 네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무슨 소리지?’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향하여 복수해야 할지, 그리고 스스로 저지른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 모든 대상을 다시 똑바로 볼 수 있도록 해 주겠다. 그 이후 방금의 대화를 다시 나누도록 하지.’

에르시를 비롯하여 키시아르를 따라온 소수의 단원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너와 네 동료들은 몸이 회복되는 대로 이곳에서 여러 일을 하게 될 거다. 원치 않는다면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든 죗값을 치를 일은 해 주어야겠지. 그리고 타이누의 회복이 모두 끝나고 재판들이 마무리된 뒤 정말로 원했던 게 무엇인지, 마병단에게 무엇을 바랐는지 그때는 제대로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군.’

에르시의 눈동자가 의문과 경계로 흔들렸다. 키시아르는 그녀를 두고 돌아서려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이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내 얼굴에 대해 남겨 준 객관적인 칭찬은 잊지 않겠네. 예상치 못한 탓에 인상적이었거든.’

‘…….’

에르시의 눈빛이 방금과는 좀 다른 의미로 변했다. 저 가볍기 짝이 없는 사내가 정말 황족이며 공작이 맞는지, 제가 지금껏 놀아난 건 아닌지 진의를 심각히 의심하기 시작한 얼굴이었다.

모두를 어이없게 만든 키시아르의 웃음을 떠올리던 유더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흘렸다.

그때는 유더조차도 잠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그게 아무 의미 없이 나온 말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키시아르는 각성자를 전담하여 관리하고 처벌할 수 있는 마병단의 권한을 이제껏 제대로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한 발언은 그가 앞으로 마병단을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 나갈지 단원 모두에게 제대로 알리는 신호가 될 터였다.

누군가는 그의 행보를 게으르고도 안이한 방향이라 말하겠지만 유더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들에게는 기사들의 규칙이, 마법사들에게는 마법사의 규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키시아르 라 오르는 각성자들만의 규칙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새로이 쓸 것이다.

“유더! 여기 있었구나! 이제 곧 출발한대!”

호산라의 상태를 살피는 일을 끝내고 막 나가려던 찰나,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칸나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출발 직후에는 내가 이 사람 담당이니까 걱정 말고 자리로 돌아가.”

“알겠어.”

칸나가 호산라의 담당이라면 걱정할 일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리자 칸나가 그와 교대하듯 마차에 올라탔다. 문을 붙잡은 두 사람의 손이 살짝 스친 순간, 칸나가 문득 움찔하며 아주 작게 어깨를 떨었다. 돌아보는 눈이 빠르게 깜박이며 얼굴과 목 부분을 가려 덮은 상의, 마차 문에 닿은 손끝 등을 스쳐 지나갔으나 유더는 알지 못했다.

“그럼 이제 갈게.”

“아, 잠깐. 유더. 혹시, 어제… 숙소에서 뭐 했어?”

묻는 목소리가 유난히 작고 조심스러웠다. 아무래도 또 뭔가 감정의 변화가 읽힌 모양이었다. 유더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다 간략하게 대꾸했다.

“단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 어어. 그렇겠지. 단장님과……. 같은 숙소니까.”

당연한 말을 하던 칸나가 방금보다 한층 더 입을 움츠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면, 그… 혹시 이전에 고민하던 일도 이제 잘 해결된 거야?”

“그래. 덕분에.”

“그렇구나. 다행…이네. 진짜로, 다행…….”

이어지던 목소리가 조금씩 느려지더니, 마침내는 귀 끝이 발갛게 변했다. 아무래도 태도가 평소보다 조금 묘했다.

“무슨 할 말 있어?”

무표정하게 반문하는 검은 머리 청년의 얼굴을 보며 칸나는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입술을 꼭 다물었다.

“아니, 아니야! 여기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자꾸 이상한 정보가 읽히니까 내가 지금 정신이 좀 없나 봐. 심지어 아까는 프루엘레 공자님 손수건을 전해 주려다가도 막……!”

유더는 과도하게 목소리를 높여 떠드는 그녀의 말을 막았다.

“조심해. 피로하면 내가 그냥 여기 있을 테니까.”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강하게 고개를 내저은 칸나가 유더의 어깨를 밀어내려다 말고 움찔 손을 거두었다.

“얼른 가. 나중에 보자.”

“…그래.”

유더는 아무래도 칸나의 주변 환경을 잘 신경 써 줄 필요가 있겠다는 건의를 키시아르에게 하기로 마음먹으며 물러났다.

‘본인이 원하여 읽는 정보라면 몰라도 원치 않는데 때때로 읽히는 정보는 힘들겠지. 그간 문제없이 잘 버텨 주어서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때는 칸나의 그러한 묘한 태도가 수도로 돌아간 이후에도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

나한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다 화상을 입지 않은 쪽의 눈동자를 굴려 옆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덜거덕거리며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마차 소리와 퀴퀴한 냄새가 났다.

“드디어 깨어났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곁에서 말을 건 이가 천천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뒤로 넘겼다. 붉은 피부색이 두드러진 남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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