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다른 모든 힘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성질이라. 유더의 눈빛을 본 키시아르가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힘들과 뒤섞여 있으면서도 크게 반발력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그릇을 보호할 수 있는 것도 그 성질 때문일지 모른단 뜻이지. 음… 마치 형태가 잡히기 이전의 반죽 같은 느낌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걸 감싸 제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무슨 느낌으로 말씀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각성자의 힘에는 이렇다 할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편의상 과를 나누어 두었지만 서로 똑같은 능력이 하나도 없는 마병단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비슷해 보이는 능력을 지닌 자들을 모아 두어도 세부적인 부분은 모두 다르니 누구도 각성자에 대해 다 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유더의 손을 통해 흡수된 힘만 해도 그랬다. 그 힘이야말로 그저 ‘힘’이라는 사실만 실감할 수 있을 뿐, 정확히 무엇을 해낼 수 있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힘의 원형이었다.
“그래. 그 점을 잘 파악한다면 폐하의 그릇을 볼 때도 충분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군.”
무엇으로든 변화할 수 있는 반죽 같은 힘.
그 힘의 원형 자체는 이논이 순수한 독이라 표현했을 만큼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는데, 반죽이라 표현하니 어쩐지 우습고도 부드럽게 여겨졌다.
“예. 알겠습니다.”
유더는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 시도해 보기 전, 기회가 되는 한 몇 번 오늘처럼 더 해 보도록 하지. 힘들겠지만… 괜찮겠나?”
“물론 괜찮습니다. 제가 먼저 부탁드리려 했던 일입니다.”
키시아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깊이 숨을 내쉬고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니 이제 그만 누우라는 신호였다.
유더는 잠자코 일어나 여태까지 계속 머물렀던 키시아르의 오른편 자리에 누웠다. 그가 눕자마자 얼굴을 볼 수 있는 방향을 향하여 몸을 돌린 사내가 등불 아래 번진 희미한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내일 마지막으로 이곳에 남겨두고 갈 나그란의 별을 만나고 나면 모든 일이 끝날 텐데, 수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어떤가?”
“아직 실감은 잘 안 납니다.”
“돌아가면 아마 나게 될 거야. 좋은 쪽으로도, 좋지 않은 쪽으로도.”
그건 잘 모르겠지만, 돌아가서 다시 마병단 숙소로 들어설 생각을 하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다. 이전 생과 달리 엄청나게 적은 피해로, 훨씬 짧은 기간 안에 모든 일을 끝냈음을 알면서도 그리 묘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더의 시선이 키시아르의 얼굴로 향했다.
‘돌아가게 되면 이렇게 한방에서 머무는 일은 없겠지.’
빌름 남작이 잡혀갔으니 사실상 더는 애인 역할을 연기할 필요가 없지만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침실을 따로 사용하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병단 동료들은 그게 단순히 같은 숙소 내의 다른 침실을 사용하는 중이어서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듯했으나, 유더는 그렇지 않음을 알았다.
본래대로라면 하늘처럼 먼 사람일 단장의 바로 곁에 태연히도 눕다 못해 오히려 잠 한 번 설치지 않을 만치 이 상황에 적응했다. 평생을 혼자 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빠른 변화였다.
‘아, 그렇군.’
잠들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는 눈의 윤곽을 덧그리다 보니 불현듯 답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토록 묘한 기분이 드는 게 분명했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상대가 이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과 가장 가깝고도 친숙한 존재가 된 게 이상했던 것이다. 가족과는 전혀 다른데도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가까운 듯도 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단장님은 어떠십니까.”
유더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조용히 물었다.
“나 말인가?”
유더가 저에 대해 뭔가를 물으면 언제나 기꺼워하는 사내가 씩 웃었다.
“더 생각해야 할 점도,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오기 전 예상보다 모든 일이 훨씬 잘 끝나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기자면 10 중 5 정도일까.”
“좀 더 매겨 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마병단은 10을 넘어 20, 30에도 육박할 만큼 좋은 결과를 냈다. 유더도 아쉬운 점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이전 생에 보고 겪은 수많은 인명피해가 없었단 사실만으로도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키시아르 또한 누구보다도 모든 일을 잘 지휘해냈다. 스스로에게 고작 절반의 점수밖에 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보좌는 내게 후한 점수를 주었나 보군. 과분하게도.”
“후한 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번에 마병단이 해낸 건 단순한 임무 성공을 넘어서…….”
뒷말을 할지 말지 조금 망설였으나, 유더는 결국 참지 않고 말하기로 했다.
“…어쩌면 더 커져 서부와 제국 전체로까지 번질 수도 있었던 혼란과 비극을 막아낸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단장님께서 계셨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눈을 조금 크게 떴던 키시아르가 낮게 웃었다.
“그거 마치 예언 같은 말이군.”
“…….”
“내 보좌의 새로운 친우를 자처하던 넬라른의 왕자가 그 비슷한 말을 떠나기 전에 남긴 적이 있었지. 마치 그가 각성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 절묘한 조언을 해 주었었다고.”
넬라른 2왕자 에제인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온 바람에 유더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도로 표정을 되돌렸다.
“그는 그리 말했으나 네게 예언 능력이 없다는 건 직접 한 말이니 그게 진실은 아니겠지. 그때 나는 힘에 유독 예민한 보좌라면 어쩌면 정말 각성을 앞둔 이를 알아차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네.”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역시 이것도 아닌가.”
키시아르가 조금 아쉬워하며 답했다.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분께서 곧 각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야기한 건, 사실입니다.”
“예언이 아님에도?”
“네.”
“그렇다면 방금도 진짜 그럴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이야기했다 생각해도 되는 건가.”
이번에는 대답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키시아르의 시선이 한층 깊게 가라앉았다.
“너는 모든 것에 그러한 확신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 그러니……. 아마 확신을 지니고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의 차이가 정답에 닿는 열쇠가 되겠군.”
무언가 저릿하게 터지는 듯한 감각이 가슴 속에서 작게 퍼졌다.
그러나 유더는 이내 그 감각을 갈무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히 생각에 잠겨 있던 사내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맙네.”
그리 말해 주어서.
작은 속삭임 뒤에 짧은 입맞춤이 이마 위에 내렸다가는 떨어졌다. 드물게도 풋풋한 기쁨을 머금은 그 웃음을 유더는 멍하니 바라보다 눈썹을 찌푸렸다. 꾹 다문 입술 안쪽의 목이 간질간질했다.
***
드디어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수도로 귀환하는 날이 왔다.
마병단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단복을 차려입고서 정렬하여 섰다. 타이누의 제국민들이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그들의 떠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처음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네요. 그때는 저희에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관심을 주어 봤자 적대감뿐이었는데 말이에요.”
에버가 몹시 감회가 새로운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적대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게 신기해요.”
에문을 포함하여 이곳에 남을 인원을 확인하고 나머지가 떠날 채비를 마무리하는 동안, 코엘트 남작이 바삐 달려와 마차에서 내렸다. 빌름 남작을 대신하여 벌써부터 타이누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 그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가득했으나, 표정은 훨씬 밝고 보람차 보였다.
여기도 저기도 검은 단복 투성이라 당혹한 남작이 주변을 둘러보다가는 유더를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아일 경. 이리 헤어지게 되어 아쉽군요. 공작 전하께서는 혹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 안에 들어가셨습니다만 곧 나오실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대로 곧 키시아르가 나단과 함께 나왔다. 그의 흰 단복 차림을 본 수많은 이들이 잠시 넋을 잃는 통에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한결 조용해지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물론 키시아르의 외모에 제법 익숙해진 마병단원들은 단장의 얼굴에 넋을 잃는 이들을 보며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오, 코엘트 남작이 왔군.”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무릎을 굽혀 인사한 코엘트 남작은 키시아르에게 아부나 선물을 주는 대신, 몇 가지 일 처리에 대한 이야기를 바쁘게 나누었다. 그중에는 치안관리단 지하감옥 4층에 있는 오래된 마법사의 연구실에 대한 이야기 또한 있었다.
“그때 가져간 일기를 바로 돌려줄 수 없게 되어 미안하네. 들여다보니 생각 외로 흥미로워 수도로 가져가 좀 더 살핀 뒤 보내 주게 될 듯한데 괜찮겠나?”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살펴 주십시오. 저도 지금은 일 때문에 그곳을 살필 여유가 마땅치 않으니 제대로 연구를 시작하려면 몇 달은 지나야 할 겁니다.”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 헬렘과 함께 서 있는 이논을 향하여 슬쩍 시선을 돌렸다. 믹은 상단 일이 있어 돌아가기로 했으나, 헬렘은 결국 마병단과 함께 수도로 올라가기로 했다. 헬렘이 들고 있는 천으로 가린 상자 안에는 아직까지도 살아남은 페투아멧, 아니. 펜펜이 숨겨진 상태였고, 이논이 메고 있는 가방 속에는 초대 타인 공작의 일지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