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지금까지는 내가 돌아온 이유나 방법, 잃은 기억을 찾는 것보다 키시아르를 살리고 이전 생에서 기억하던 재앙들을 막는 게 먼저였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 둘 다 비슷한 우선순위에 두고 움직인다.’
유더는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속의 키시아르를 떠올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만 여겼던 그의 죽음마저도 많은 부분이 불명확한데,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계속 두려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이 결심을 다지는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 그러면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가운을 두르고 나온 키시아르가 쾌활한 얼굴로 다가와 침대에 누웠다. 유더는 미리 곁에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아 무방비하게 드러난 가슴과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목욕의 열기가 남은 상기된 뺨, 끝이 젖어들어 평소보다 짙어진 금빛 머리칼에서 유더와 같은 비누향이 폴폴 풍겼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상이 다소 어지러워지는 광경이었다.
“자세는 어떻게 한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되나?”
한 톨의 긴장감도 내비치지 않고 가슴 위쪽에 두 손을 모아 올린 사내를 보며 유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곱기는 한데 참으로 찝찝했다.
‘아무래도 관에 들어간 자세 같은데.’
그가 정확히 저 자세로 관에 들어가 누운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자의 앞에서 취하기에는 영 좋지 않은 자세였다.
“…그냥 주무실 때처럼 편하게 계십시오. 굳이 자세를 바꾸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네.”
키시아르가 얌전히 손을 내렸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느끼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크게 박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몇 번의 심호흡을 한 뒤 키시아르의 배 아랫부분에 손을 얹으니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이의 체온이 묘하게도 마음 깊은 곳을 자극하는 듯했다.
유더의 오른 손등 위에 있는 검붉은 얼룩은 아직 반응이 없었다.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이 안에 깃든 붉은 돌의 힘이 발휘되는 건 아마… 제가 목적을 명확하게 바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는 건, 아까도 그랬었단 건가?”
“그때는…….”
정신이 다소 없었기에 제가 했던 생각들이 조금 불명확하긴 했으나, 뭘 바랐었는지는 확실히 기억했다.
키시아르를 더 깊이, 그리고 많이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육체가 맞부딪치는 쾌감보다도 그 바람이 더욱 압도적으로 커져 순식간에 모든 생각을 잡아먹었을 때 손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왔었다.
이전에 키시아르의 내부를 들여다보았을 때는 그의 안에 있을 각성자의 힘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를 파악해 보려고 했었던 게 시작이었다. 했던 생각과 목적이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키시아르를 알고 싶어했던 마음의 결만은 비슷했다.
그게 제 안에 흡수된 붉은 돌의 힘을 불러 일으키는 열쇠가 되었다면 이번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유더는 그 결론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대답했다.
“…네, 뭐. 좀 다르지만 적어도 제 안의 힘은 비슷하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
키시아르의 표정이 웃을 듯 말 듯 변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몸 위에 올린 손을 내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이전과 비슷하게 일단 그의 내부에 있는 각성자의 힘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혹시 아프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키시아르는 걱정 말라고 대답했으나, 영 믿기지 않으니 제가 더 조심해야 했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며 그의 내부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힘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했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손등 위를 핏줄처럼 뒤덮은 검붉은 얼룩이 서서히 불룩대며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더는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그에 맞춘 듯 훅 하고 빛이 일었다.
성공이었다.
물론 잠깐 키시아르의 내부를 엿보았던 아까처럼 모든 게 빠르고 손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유더의 손에서 빛이 일어남과 동시에 키시아르의 내부에서도 상당한 저항력이 일어나며 그 빛을 밀어내려 했기 때문이었다.
유더는 순간적으로 밀릴 뻔한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잡아 내리눌렀다. 누워 있던 키시아르의 표정 또한 일변했다.
‘그래도 예전에 처음으로 키시아르의 내부를 봤을 때보다는… 저항감이 훨씬 약해.’
억지로 버티고 있으려니 붉은 빛이 닿은 범위 내의 피부가 점차 기이하게도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유더의 한쪽 눈이 금빛으로 물들며 바람이 일었으나 그는 급속도로 집중한 탓에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잠시 후, 줄다리기라도 하듯 팽팽하던 저항감이 드디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키시아르의 내부에서 여러 가지 색을 띤 기운들이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떠올라 모습을 드러냈다.
희고 선명한 신력, 푸른 바람처럼 움직이는 오러, 나무처럼 수많은 가지를 뻗친 황금빛 마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을 감싼 각성자의 붉은 기운.
그 네 가지 힘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며 각자의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상태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군. 중간중간 엉킨 부분들도 여전하고……. 마력 양이 조금 줄었나?’
서로 어지럽게 얽힌 네 가지 기운이 뭉쳤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흐르는 한 곳을 향하여 유더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것들이 도달하는 최종 목적지인 명치 부근에는 마치 제 2의 심장처럼 보일 만큼 커다란 힘 덩어리가 존재했다.
투명한 붉은 기운에 감싸인 채로 형태를 유지한 채 힘있게 약동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강렬한 힘을 내뿜는 그것이 바로 키시아르 라 오르의 ‘그릇’이었다.
간만에 보아도 강렬한 힘을 느끼게 만드는 그것을 보며 유더는 몸에 힘을 주었다. 이전에는 이때쯤 되어서 통증이 상당했었던 듯한데 이번은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힘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던 눈이 덜 아팠던 게 가장 큰 변화라 할 만했고,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도 그때보다는 훨씬 덜했다.
그리고 아프지 않으니 자연스럽게도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자세히 그것들을 살필 여유도 생겨났다. 유더는 완전히 모든 기운이 드러났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린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 보이십니까?”
“그래. 놀랍군.”
아까도 그랬지만 유더의 손에 닿아 비친 내부의 힘은 키시아르의 눈에도 보였다. 그에게만 보이는지, 제3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는 것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법 의미 있는 발견이라 할 만했다.
난생 처음 볼 스스로의 내부를 기이한 눈으로 살피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유더를 보았다.
“이상한 느낌이나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다만…….”
무표정한 눈빛 속에 날카로운 긴장감을 거두지 않은 자신의 보좌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던 키시아르가 조용히 물었다.
“지금 눈이 다시 황금빛으로 변한 건 아나?”
예기치 못한 질문에 유더가 눈을 깜박였다.
“예?”
“빛이 아주 강해. 이렇게 올려다보니 밤하늘의 별 같군.”
유더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옆의 작은 거울을 보았다. 어둑한 방에서 한쪽 눈만 빛나는 광경이 제법 괴기스러웠다. 아무리 보아도 별은 아니었다.
‘아까 잠깐 비쳤을 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붉은 돌의 힘을 지금 본격적으로 쓰고 있어서 그런 건가?’
이논이 그 눈을 보고 혜안인지, 뭔지라 부르며 길게 설명했던 기억이 났다. 전보다 힘을 쓰는 게 더 편해졌다 여긴 데는 어쩌면 그 눈의 영향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더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
“이 네 가지 기운 중에서 붉은 빛을 내는 게 각성자의 기운입니다. 이전에 제가 만질 수 있었던 힘도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감싸고 있는 중앙의 가장 큰 덩어리가 아마… 단장님의 그릇이리라 생각됩니다.”
“예상은 했으나 그다지 보기 좋지는 않군. 내게도 못생긴 부위가 하나쯤은 있어 주어 다행인가.”
키시아르가 농담을 하며 웃었다. 유더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이전에는 엉킨 부분 중 한 곳에 손을 댔더니 제게 흡수가 되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함부로 거기까지 손대지는 않겠습니다.”
“그래. 일단 의지에 따라 볼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는 게 중요하지.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힘은 도로 거두게.”
유더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손등 위로 뻐근한 통증이 달리며 힘이 사그라졌다. 눈 안쪽을 밝히던 빛 또한 마찬가지로 함께 사라졌다.
“괜찮은가?”
키시아르가 곧장 유더의 손을 붙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누워 있기만 했다지만 그의 이마에도 땀이 송글송글했다.
“……괜찮습니다.”
유더의 안색을 살피던 사내가 정말로 괜찮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유더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힘이 좀 더 제 의지에 잘 따르는 느낌입니다. 이 정도라면 폐하의 몸을 살피는 시도도 곧바로 충분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으니 이제는 키시아르도 더 무어라 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제 몸을 내려다보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도에 올라간 뒤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지.”
그 뒤, 키시아르는 유더와 함께 그의 몸 속에 존재하는 기운의 흐름과 위치에 대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이전에 봤을 때도 힘의 상태가 그랬었는지를 물은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러 정보를 얻기에는 충분했던 듯했다.
“각성자의 힘이 그릇을 감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야. 레블린 샨 아페토의 내부를 보지 못해 아직 확신하기는 어려우나, 어쩌면 그의 안쪽도 나와 비슷할 수도 있겠군.”
아페토 공작가의 3공자 레블린은 본디 유전병으로 몸이 아주 허약했으나 각성자가 되면서 건강해진 경우로, 키시아르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이건 그저 나의 추측이지만, 아무래도 각성자의 힘에는 다른 모든 힘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성질이 있는 게 아닐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