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46화 (446/805)

446화

유더는 그 감정이 시키는 대로 손을 뻗어 키시아르의 뺨을 만져 보았다. 사내가 한술 더 떠 손목을 붙잡아 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묻었다. 뺨을 비비듯 미끄러져 올라간 입술은 얇은 장갑 끝에 닿았을 때 잠시 멈추었으나, 이내 손끝을 머금듯 입을 벌렸다가는 끝을 살짝 물어 잡아당겼다.

작은 천 덩어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순간, 유더의 눈 안에서 일렁이던 감정 또한 일시에 새카맣게 보일 만큼 분명하게 정체를 드러냈다.

키시아르가 드러난 맨 손가락과 핏줄처럼 얼기설기 손등을 물들인 검붉은 얼룩 위에 다시 입을 맞추며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유더는 저와 다를 바 없이 짙은 열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감촉을 제 피부를 통해 소름이 돋을 만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자극을 이기지 못한 손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순간, 전율과 함께 달린 열기가 배 속 깊은 곳에서 훅 퍼졌다. 유더는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사내의 입술에 제 것을 급히 다시 겹쳤다. 키시아르는 그가 앞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받친 채 기꺼이 그 입맞춤을 달게 받아들였다.

또다시 한참 동안 시간을 잊을 만큼 얽혀 있던 입술이 가쁜 호흡 사이로 조금 떨어져 나갔을 때, 고혹적으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말해 주게.”

무엇이든 좋으니까, 더.

그 부름에 홀린 듯이 유더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조금의 틈도 없이 끌어안은 사내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단장님과 제 사이의 그 연결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무슨 힘이 있는지도,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꿈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언젠가는 그것을 통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실지도 모르지요.”

“그게 두렵나?”

유더는 이마를 기댄 채 침묵하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전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끊는 방법을 찾을까.”

여상한 반문에 일순 유더의 호흡이 멈추었다.

“내가 더 이상 보좌에 대해 아무것도 찾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그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나?”

키시아르가 더 이상 유더와 관련하여 아무런 정보도 찾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끊어낼 방법을 찾아낸다.

참으로 달콤한 제안임에도 유더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키시아르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부터 정말 그렇게 해 주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것에 따른다고 모든 두려움이 깨끗이 사라질 수 없다는 건 이미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유더 아일의 내부에서 가시 돋은 열매 껍데기처럼 구르며 고통을 선사하는 비밀들은 그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리 살아 숨 쉬며 키시아르를 바라보는 때마다 어김없이 비명을 지르며 날뛸 터였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으면서까지 눈앞의 존재에게 빠져든 대가였다…….

“아니요.”

유더는 머리를 기댄 단단한 목줄기 바로 옆에서 풍기는 키시아르 특유의 향을 들이마시며 재차 반복해 말했다.

“아닐 겁니다.”

“어렵군.”

키시아르가 유더의 등을 반복하여 쓸어내리면서 웃음을 흘렸다. 유더는 그 손길을 느끼며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유드레인은, 제 이름이었습니다.”

“어쩐지 뭔가의 명칭에 가까운 단어일 것 같더라니, 그랬군. 누군지는 몰라도 좋은 이름을 지어 주었어.”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고어를 잘 아는 이들조차도 책을 다시 찾아보아야만 알 수 있을 만큼 까다로운 문법을 적용해 지었으니 보통 정성을 들인 게 아니겠지. 내가 지어 준 나단의 이름보다도 훨씬 깊이 고민해 지은 듯한데 좋은 이름이라 해도 되지 않겠나?”

여기서 나단 주커만의 이름도, 유드레인도 모두 그가 지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유더는 대답 대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 이름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단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뜻이 아마 맞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지어 준 이가 뜻은 알려 주지 않았나?”

“알려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모르겠군요.”

그는 메마른 목소리 너머에 숨겨진 제 감정을 부디 키시아르가 알아채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 알게 되어 낫다 여겼다면 그만이야.”

키시아르는 그 이름을 지어 준 이가 누구인지, 왜 유더가 그 뜻을 몰랐는지는 묻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든 말하고 싶은 대로 더 하라는 듯 또다시 손과 뺨에 입을 가볍게 맞추었을 뿐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아까 이논이 읽고 싶다 청했었던 초대 타인 공작의 일기는 그가 아닌 제가 먼저 알기를 원한 것입니다. 어제 단장님께서 읽으셨던 부분을 듣는 순간, 그것이 혹 제가 알고 싶었던 의문들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주받은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시간 또한 우리의 편이 될 수도 있다.”

키시아르가 자신이 읽었었던 부분을 다시 한 번 그대로 읊었다.

“몬스터가 어디서 오는지 알아내겠다던 그 대담한 연구 목적 말인가.”

그것도 있지만, 정확히는 거기서 시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망설이는 동안, 키시아르가 유더의 뒷머리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내게는 아무리 보아도 그저 제법 흥미로운 생각을 담은 역사적 자료 중 하나일 뿐이었으나, 보좌에게는 그렇지 않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어렵다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원하는 대로 하게. 내일 이논에게 그것을 내어주는 것 말고 내가 더 할 일은 없나?”

“…예.”

“아쉽군.”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입술이 귀 옆을 스쳐 입맞춤을 내렸다. 다른 곳보다 예민한 곳을 스친 탓에 키시아르의 옷을 붙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자 그가 작게 웃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금 더 부드럽고 진득하게 변했다.

그 감각이 유더에게 문득 어떤 새로운 생각과 충동을 부여했다.

“단장님께서는, 시간이 누군가의 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보통은 시간이 인내하는 자의 손을 들어준다는 식의 격언이 많지만 일기에 적힌 내용이 그런 의미를 담은 건 아니겠지. 말 그대로의 뜻대로 생각하자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네. 그랬다면 이미 수많은 마법사들이 시간을 제 뜻대로 부리며 그 결과를 내보였을 테니까.”

상식적이고도 예상했던 범위 내의 대답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한 시간과 관련된 마법을 성공한 이는 없다. 대마법사 루마 또한 그러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흥망성쇠를 거쳐 바람 속에 스러진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과 위세를 지낸 이도 그 절대적인 법칙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만 갑자기 거꾸로 흐르는 일은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일어날 수 없을 테지만, 유더에게는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언젠가 키시아르가 그 답에 도달하는 날이 온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무슨 얼굴을 하고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지금은 조금도 알 수 없으나, 유더는 다만 그때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지금까지와 같아서는 안 되었다.

키시아르가 보여 준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하려면, 자신 또한 주어진 믿음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진실의 증거를 찾을 노력이 필요했다.

유더의 생각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그리고 더 먼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안, 또다시 흘러나온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는 어떨지 모르겠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생각에 잠긴 듯 짙어진 붉은 눈이 유더를 보며 다정하게 휘었다.

“지금은 마법사의 시대가 저물고 각성자의 시대가 떠오르는 때가 아닌가. 마치 천 년 전, 사제의 시대가 저물고 마법사의 시대가 떠오른다는 말이 공공연히 퍼졌었듯이 말이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유더가 눈을 깜박이자 키시아르가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려 주었다.

“저 일기에 그리 적혀 있더군. 그때처럼 지금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시대이니, 오늘 해 준 말들도 잘 생각해 보지.”

“…….”

“생각하고 판단하는 건 말을 들은 이가 할 일이지, 해 준 이의 몫은 아니야. 내 힘으로 생각해 보고 답을 내어 가져올 테니, 그때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려주는 건 보좌의 몫으로 해 주게.”

이 정도면 괜찮겠느냐고 물으며 사내가 웃었다.

키시아르 특유의 향과 전신을 꽉 감싼 단단함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던 고통을 다른 감정들로 일시에 바꿔 놓았다.

눈앞의 존재에게 닿고 싶은 충동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유더는 그의 목을 감으며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의자 아래로 떨어지기 전, 키시아르가 그의 몸을 받아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대화를 이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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