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그 이후로도 일어났을 때 그리 좋지 않은 꿈을 꾼 듯한 느낌이 어렴풋이 든 적이 몇 번 있었네. 그때는 다른 이가 곁에 없어 홀로 자고 일어났기에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은 정말 전혀 안 나시고 말입니까?”
“전혀.”
키시아르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나단 주커만이 그를 깨웠다던 입단 접수 시기 때는 이번처럼 잠꼬대를 하지 않았었다고 했다.
본인이 기억을 하지 못하니 말마따나 그 일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더에게는 그리 여길 수밖에 없는 무엇보다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유드레인.”
마음을 읽은 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바삐 이어져 나가던 생각이 우뚝 멈추었다. 손끝이 크게 움찔거렸으나 그래도 어젯밤에 이어 두 번 들어서인지 세상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역시 그게 고민의 원인이 맞나 보군.”
유더의 표정을 본 키시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더는 그가 당연히 그 뜻을 물으리라 여겼으나, 키시아르가 물은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혹 아까 나단이 가져왔던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있나?”
“쿠키…라고 들었습니다만.”
영문 모를 질문에 답하자 키시아르가 테이블 구석에 올려 두었던 그것을 끌어당겨 겉을 감싼 천을 풀었다.
“그것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네.”
천 안에는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쿠키 상자가 있었다. 키시아르가 상자를 열자, 부서진 곳 하나 없이 정성을 다하여 포장된 쿠키와 함께 오래된 책자 하나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고어를 배울 때 사용하는 책이었다.
“그게 마냥 의미 없는 헛소리가 아니라면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할 것 같더군. 아무래도 느낌이 고어에 가까운 듯하여 코엘트 남작에게 연락을 넣었었네.”
수도였다면 키시아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대신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서부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그들과 연이 생긴 코엘트 남작은 고어에 능통한 학자였기에 키시아르가 찾던 책도 가지고 있었다.
유더는 나단 주커만이 그 상자를 키시아르에게 내밀며 ‘두 가지 모두’ 가져왔다고 보고했던 사실을 기억했다. 당연히 쿠키 종류와 관련된 이야기이리라 여겼으나 아니었다. 진실은 여기에 있었다.
유더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음에도 그는 이미 이토록 빠르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알아낸 모든 걸 그대로 계속 침묵 속에 묻어 두었겠지.’
키시아르가 책을 폈다. 처음부터 찾으려 한 부분이 명확했던 듯 거침없이 책장을 넘기는 긴 손가락을 유더는 막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때 제 것이었던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유드레인. 그 이름은 이전 생에 그가 마병단 단장 자리에 오르기 전 하사받은 선물로, 솔직히 말해 얼마 전까지는 관련된 부분을 거의 잊고 있던 상태였다. 꿈에서 그 이름에 대해 이야기하던 키시아르를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지어 준 이가 누구였고 어떻게 받았는지 잊고 지냈으리라.
‘그걸 고어로 지었다는 것까지는 꿈에서 들었었는데.’
하지만 뜻은 듣지 못했다.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아도 제 이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는 그조차 확연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던 것이, 어차피 지금은 버린 이름인 데다 다시 찾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 다시 듣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영영 묻고 살 수도 있었겠지.’
입맛이 썼다. 그리고 그쯤에서 그가 귀족다운 이름으로 일부러 개명하여 과거를 지우려 수작질을 한다며 비웃던 놈들의 얼굴이 한가득 떠올랐기에 유더는 회상을 멈추었다.
보통 이름을 하사받는 건 명예로운 선물이자 미담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은 카치안 황제가 그에게 이름을 내렸으리라 지레짐작했고, 유더는 그 오해를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을 지어 준 이는 지금 눈앞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저 사내였다.
과연 이름을 지니고 있던 본인조차 모르던 뜻을 지금의 그는 다시 찾아낼 수 있을까. 누군가 뱃속을 손톱 끝으로 근지럽히는 듯한 감각 속에서 유더는 잠자코 키시아르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정확하게 들어맞는 단어는 역시 없군.”
“그렇습니까.”
“한 개의 단어라 생각하면 그렇지.”
책을 내려 유더도 볼 수 있도록 놓은 키시아르가 묘한 미소를 띤 채 어느 한 부분을 짚었다.
“고어에서 ‘레’는 단어와 단어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한다네. ‘~와’ 같은 느낌이지. 유드레인이라는 단어의 ‘레’가 그런 뜻이라는 가정하에 앞뒤 글자들의 원형을 찾아보면……. 보이나?”
키시아르의 손끝 위로 ‘유드’라 쓰여진 발음의 단어가 보였다.
“유드. ‘시작’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이쪽의 인은 ‘끝’. 그리고 두 개를 잇는 ‘레’가 중간에 끼면…….”
“시작과 끝입니까.”
낯설게 느껴지는 뜻을 어색하게 읊자 키시아르가 작게 웃었다.
“직역하자면 그렇지. 하지만 두 단어의 뜻이 지닌 연관성과 고대의 문법을 토대로 하여 지금의 말대로 번역한다면 조금 다른 뜻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거든. 뭔지 알겠나?”
“…….”
“영원.”
시작과 끝은 그 사이를 잇는 글자를 통하여 영원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이후로도 무어라 더 자세히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유더의 머리에 그 이상은 들어오지 않았다.
좋은 뜻을 넣어 만든 이름이니 소중하게 여겨 달라 말했었던가.
농담처럼 건조하기 짝이 없던 꿈속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오랜 시간을 돌아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된 이름의 뜻 앞에서 유더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 눈을 내리감았다.
인두로 눈을 지져졌던 때도 느끼지 못했던 뜨거운 감각이 심장이 뛰는 속도에 맞추어 머리 안쪽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도무지 그 감각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단장님.”
“음?”
유더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불렀다.
“왜 그리 무서운 얼굴이지? 내 추측이 이번에도 정답을 비껴갔나?”
“일전에 대삼림에서, 저를 찾으려 하셨을 때 연결된 무언가를 보셨다고 말씀하셨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농담기가 어렸던 키시아르의 표정이 순간 조금 변했다. 유더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 또한 얼마 전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남국인 상인과 비밀 창고 안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싸울 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던 키시아르를 간절히 찾기를 바라자 한 가닥의 실과 같은 무언가가 나타나 길을 알려 주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도 제게 이어진 실의 끝에 키시아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리고 저는, 단장님과 제 사이에 존재하는 그 알 수 없는 연결이…….”
흩어져 가는 목소리가 자신의 것임에도 멀게 들렸다. 유더는 목울대를 한 번 울린 뒤 뒷말을 끝냈다.
“어쩌면 단장님의 그 꿈과도 연결되어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만이 알고 있는 것들을 단장님께서 잠에 취한 채로라도 입에 올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
전부 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 말만으로도 키시아르라면 분명 또다시 무언가를 짐작했으리라.
“그 사실이 확실시되는 것이 두려워 망설였습니다.”
유더는 붉은 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을 향하여 흐릿하게 웃었다.
“세상의 다른 것이 아닌, 오직 단장님만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그 안에 담긴 해묵은 감정을, 무어라 설명할 수조차 없는 기억들은 모두 삼키고 유더는 참담한 고백을 털어놓았다.
“아마도 저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당신뿐이시겠지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침묵 속에서 키시아르가 마신 잔을 타고 물방울 하나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차가운 술이 담긴 잔을 느리고 빠르게 미끄러지다 마침내 손잡이 밑으로 툭 떨어진 물방울이 흰 레이스 테이블보에 조그맣고 짙은 자국을 남겼다.
어쩌면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느끼는 유더 아일의 두려움 또한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으리라. 아주 작은 얼룩인 줄 알았던 것이 점점 커져, 마침내 짙게 물든 색이 본래의 색을 모조리 바꾸어 도무지 감출 수 없게 될 정도로.
유더는 묵묵히 답을 기다렸다. 어느 정도 속을 토해 놓고 나니 약간 허하면서도 떨어질 칼날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된 듯한 심경이 찾아들었다. 물방울이 사라진 자리를 타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새로운 물방울이 또다시 잔 바깥에 고이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혹 내가 그리로 가도 되겠나?”
하나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시선이 교차했다. 침묵 속에서 유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마자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바닥에 걸린 의자가 뒤로 넘어가 굴렀지만 누구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다가오자마자 아무 말 없이 부서져라 끌어안는 품속에서 짙은 향이 훅 풍겼다.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 만큼 강한 향이었다.
“단…….”
부르기도 전에 깊이 겹쳐진 입술이 말을 막았다. 한참 동안 유더를 의자와 품 사이에 가둔 채 깊이 입을 맞추던 사내가 비로소 입술을 떼고 겹쳐진 호흡 너머로 작게 속삭였다.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이도 하나뿐이야.”
귓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거칠고 낮게 잠긴 목소리에, 살갗 위로 소름이 일었다.
“그리고 그 이는 지금 내 앞에 있지.”
이상하게도 그제야 비로소 칸나의 말을 진짜로 이해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을 깊이 파고들려 하면 할수록 그것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앞을 볼 수 없게 만든다. 한 꺼풀 떨어진 상태로 보면 상대 또한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을, 왜 알아보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키시아르 라 오르를 이루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이렇게나 맹목적으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는데.
말을 시작하기 전 한없이 망설이고 꺼려졌던 게 마치 거짓말처럼, 그간 억눌러 참아 왔던 감정이 뜨겁게 치솟아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