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화
“일단 먹고 시작하는 쪽이 낫겠지?”
하인들이 숙소에 미리 가져다 둔 간단한 식사거리와 포도주를 향해 다가간 키시아르가 유더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방금까지 이논과 나누었던 놀라운 대화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듯 보였다.
유더는 그가 가리킨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런 상황에 배가 고플 리 없었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빵도, 신선한 과일도 지금은 모래로 빚은 흙덩어리와 다름없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거절 따위에 아랑곳할 사내가 아니었다.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식사는 거르지 않는 편이 좋아. 아니면 설마, 나 혼자 쓸쓸히 먹도록 둘 셈인가?”
“…….”
“정말로?”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웃는 그 얼굴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유더는 약간의 자괴감과 함께 그의 앞에 앉았다. 키시아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꿀에 절인 사과를 저며 올린 빵을 집어 선뜻 건네주었다. 처음에는 정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 딱 하나만 먹고 일어날 생각이었으나, 다 먹자마자 쉴 틈도 없이 또 다른 빵 하나가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받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더니 팔이 아프다는 듯 소리 없이 흔드는 통에 결국 또 건네받고 말았다.
두 번째 빵을 다 먹자 이번에는 세 번째가, 뒤이어 네 번째가 이어졌다.
“…….”
말 한마디 없이 자신 몫의 요리를 크게 베어 물면서 유더의 몫까지 쉬지 않고 내주는 사내의 손길을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점차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혀끝이 근질거리며 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처음은 꿀의 달콤한 단맛이었다. 그다음은 하얗고 부드러운 크림의 담백함. 이어서 아삭이며 씹히는 과일의 새콤한 신맛. 그리고 마침내 버터 위에 뿌린 소금의 짠맛까지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유더는 제 안에서 딱딱히 굳어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던 무언가가 어느새 놀랄 만큼 물렁하게 녹아내렸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것을 녹도록 만든 이는 당연히도 눈앞의 사내였다.
키시아르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빵 조각을 반으로 능숙하게 갈라 건네주었을 때, 유더는 그것을 받아들고 나서도 입에 넣지 않았다.
대신 내뱉은 것은 이전에 비해 한결 힘이 빠진 질문이었다.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정답도 맞추지 못했다는데 놀랄 일이 뭐가 있겠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매끄러운 답이 돌아왔다.
“위험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에 대한 신뢰는 내 앞에 있는 이가 이미 확실하게 증명해 주었으니까.”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들고 있던 손이 멈칫 떨렸다.
아주 오랫동안 이 답을 해 올 순간을 기다려 왔던 이처럼, 키시아르의 눈이 유더를 향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서 그가 그간 보여 준 성정과 뜻까지 모르는 건 아니라네. 누군가에 대해 꼭 모든 걸 다 알아야만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누군가에 대해 꼭 모든 걸 다 알아야만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는 그 말의 무게가 유더의 머리를 둔중하게 두드렸다.
눈조차 깜박이지 못한 채 자신을 보고 있는 한 쌍의 어두운 눈동자를 보며, 키시아르는 살포시 웃었다.
“하루를 기다려 처음으로, 보좌가 드디어 나를 제대로 보아 주는군.”
“…….”
“제법 길었어.”
아니다. 유더는 내내 그를 살피고 있었다.
살피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가슴 속의 목소리가 은밀히 의문을 표했다.
정말로 그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오늘 하루를 보내는 내내 키시아르를 ‘관찰’하지 않고 정말 제대로 마주했었던가?
그리고 유더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까지 보고 있다 여겼던 오늘의 키시아르는 무엇이었던 걸까.
하나 확실한 건 키시아르가 어젯밤 일을 잊었던 것도, 유더의 생각처럼 마냥 아무렇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셨습니까.”
“그래.”
“그냥 먼저 물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키시아르가 소리 없이 웃었다.
“원치 않는 이에게 억지로 답을 요구하는 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 그게 너라면 더욱 그렇지.”
결국 유더가 원치 않음을 알았기에 그 또한 움직이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기다리니 이렇듯 먼저 입을 열어 주지 않았나. 그러니 하루를 기다린 보람은 충분해.”
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말하였으나 유더는 그렇지 않았다.
“…그 기대와 믿음에 제가 부응해 드리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리는 없다네. 왜냐하면 다행히도 내겐 기다릴 시간이 넘쳐났거든.”
입을 열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렸으리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장난스레 할 수 있는 것도 재주는 재주였다. 그리고 그 말에 속절없이 이끌려 흔들리는 자신은 더욱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숨을 내쉬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열기가 눈 안쪽을 달구며 훅 치고 올라왔다. 유더는 눈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는 정말 당해낼 수가 없군요.”
“재미있군. 그건 내가 보좌를 보며 매일 하는 생각인데 말이야.”
농담처럼 대꾸한 사내가 턱을 괸 채 웃었다.
“무엇이 보좌를 그리 망설이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만약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되어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네.”
무엇이냐고 물어야겠지만 혀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유더는 빛처럼 곧은 시선에 사로잡힌 채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고민이란 건 결국 그만큼 중요하다 여기는 것에만 할 수 있는 행동이란 걸 알고 있나?”
“…….”
“내 마음을 짊어지고 가져가 버린 이가 나로 인해 고민한다면, 나란 자는 그게 뭐든 결국에는 기꺼워할 인간이라네. 이래 봬도 엄청난 기회주의자거든. 아, 이미 알고 있던가?”
키시아르의 마음을 짊어지고 가져가 버린 이.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불시에 찔러 들어온 공격에 일순 모든 생각이 멈추었다. 대삼림의 깊은 숲속에서 그가 했던 말들이 순식간에 들불처럼 일어나 온 머릿속에 번졌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말을 잃은 유더를 보며 키시아르가 눈을 휘어 부드럽게 웃었다.
“농담 같나? 진심인데.”
그는 유더의 반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튼, 그래. 내 보좌처럼 빙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이가 다른 이를 통하여 나의 반응을 보아야 할 만큼 뭔가를 고민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희망을 느껴.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르겠지만 아까는 그렇더군.”
지나친 추측이라 말하고는 있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유더는 이논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 다 보여 줬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해.
이논은 자신의 정체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비밀을 제물로 하여 키시아르가 어떤 태도로 대응하는지를 유더의 눈앞에서 제대로 보여 주었다. 덕분에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 또한 그 대화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거의 다 알아차리고서도 아닌 척 돌려 말하는 모습이 실로 그다웠다.
사실 그가 느낀 감정이 온전히 희망만은 아니었을 터였다. 유더의 눈은 키시아르의 미소 속에서 잘 갈무리된 다른 감정의 흔적들도 희미하게 읽어냈다.
‘그런데도 희망만을 언급한 건 아마도…….’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아무리 강하고 대단한 이라도 때로는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이야. 나와 이야기하여 편해질 수 있다면 그리하고, 아니라면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유더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오늘 하루가 그와의 전술 게임 대국이었다면 유더는 방금 완벽하게 졌다. 그런 느낌이었다.
‘이전 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이겨 본 적이 없기는 했었지.’
숨을 모두 뱉어 낸 입이 드디어 그보다 더 깊은 아래 고여 있던 말을 토해 냈다.
“말씀대로, 저는 단장님과 관련하여 오늘 내도록 고민한 것이 맞습니다.”
꺼내기 전까지는 지독하게 어려웠던 말이, 정작 입 밖으로 나가고 나니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유더는 그 감정을 내리누르며 이어 질문을 던졌다.
“단장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고민했다 생각하십니까?”
이논의 정체에 대해서도 거의 근접한 답을 내놓은 사내가 과연 저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고 있었을까. 여태까지는 궁금해하지조차 않으려 했던 부분부터 알아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의미를 담은 유더의 시선을 받아낸 키시아르가 이내 입을 열어 답했다.
“글쎄. 어젯밤 내가 꾸었다는 꿈과 기억나지 않는 잠꼬대가 아마도 가장 가능성 높은 범인으로 추측되지만… 확신은 어렵군.”
그는 역시 그때부터 유더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유더는 그가 어루만지고 있는 포도주 잔 안에서 출렁이는 검붉은 액체를 바라보며 새로운 질문을 하나 더 했다.
“피곤하실 때 가끔 그리 주무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 혹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억하십니까?”
“꿈이란 걸 전부 기억하기는 힘들어 정확한 답을 주기는 어렵겠군. 하지만… 이번처럼 누군가에게 깨워진 뒤 악몽을 꾸었느냐는 말을 들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적이 한 번 있기는 했었지.”
“그게 언제입니까.”
“마병단 입단 접수 시기. 나단은 내가 몹시 과로한 탓에 몸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더군.”
‘마병단 입단 접수 시기라면…….’
공교롭게도 유더가 과거로 다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순간도 그때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