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43화 (443/805)
  • 443화

    “그러면 아까 내가 물었던 일에 대한 답은?”

    질문이 아주 물처럼 자연스럽게도 이어졌다.

    초대 타인 공작의 일기를 다시 한번 함께 읽어 보자고 말해 주었던 제안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시선을 느끼며, 유더는 잠시의 공백을 두고 느리게 대답했다.

    “제가 일을 잘 끝낸다면, 말씀하신 대로 따르고 싶습니다.”

    일을 잘 끝낸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이기는 했으나, 결국 키시아르가 내민 손을 잡겠다고 말한 건 변함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여러 가지 의미 또한.

    “이런. 그 일이 어찌 끝나든 이건 별개라 생각하지만, 그리해야 마음이 편하겠다면 그렇게 하지.”

    장난스러운 대꾸가 끝나기 전, 목적지인 별저 후문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평소처럼 그곳에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유더는 문득 낯익은 이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논?’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이논이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남자가 발소리를 듣고는 눈을 치뜨며 시선을 돌렸다. 유더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 뚱한 표정 대신 평소보다 조금 더 누그러진 미소가 살짝 어렸다가는 사라졌다.

    그가 이 시간에 이곳까지 올 이유로 짐작되는 사유를 떠올린 유더의 마음속에서 일순 파란이 일었다.

    ‘설마……. 정말로 키시아르에게 정체를 밝히러 온 건가? 지금 여기서?’

    혼자뿐이었다면 직접적으로 물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공교롭게도 키시아르가 함께 있었다. 마치 내가 안 올 줄 알았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이논을 향하여 한 발짝 앞서 나선 키시아르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유더를 만나러 왔나? 공교롭게도 나와 내 보좌는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있어 긴 용건이라면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네만.”

    “아뇨. 오늘 제 방문 목적은 저 녀석 쪽이 아닙니다. 그리 긴 용건도 아니고 말입니다.”

    고개를 숙여 성의 없는 인사를 한 이논의 시선이 키시아르를 똑바로 향했다. 그의 용건이 제게 있음을 알아차린 키시아르의 두 눈이 일순 조금 커졌다가는 깊은 흥미를 드러내며 가늘어졌다.

    “그래? 궁금하군. 무슨 일이지?”

    유더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 후 들려온 답은 그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어제, 치안 관리단 지하감옥 밑에서 제법 재미있는 물건이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보좌에게 들었나?”

    “예.”

    유더는 다시 눈을 떴다. 두 사람은 유더 쪽을 보지 않고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맞아. 꽤 흥미로운 역사적 사료가 발견되었지. 그런데?”

    “그 물건, 제가 잠시 살피고 싶습니다.”

    공작이자 단장을 대한다기에는 너무나 거침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논에게는 기이할 만큼 그러한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존재했다.

    키시아르 또한 그의 태도와 관련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이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들었다면 알겠지만, 그 물건에는 고어와 초기 제국어의 흔적이 뒤섞여 있어 나조차 빠르게 읽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자네가 그것들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읽지 못했다면 오지도 않았겠지요.”

    “놀랍군. 요즘은 신전에서도 고어를 가르치는 곳이 드문데 말이야.”

    순수한 감탄처럼 대꾸한 뒤 키시아르의 눈빛이 조금 더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것을 꼭 읽어야겠다는 이유는?”

    짐짓 가벼운 분위기처럼 느껴지는 대화였으나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내부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가슴을 터질 듯이 메운 긴장감을 한계까지 가라앉히느라 극도로 싸늘해진 유더의 얼굴을 흘긋 돌아본 이논이 문득 혀를 한 번 차며 짧은 한숨을 토했다.

    유더 스스로조차 모를 그의 속내를 전부 읽은 듯한 눈빛이었다.

    잘 봐둬라. 문득 그가 입술 모양을 움직여 그렇게 속삭인 듯했다. 그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 이논이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일단 대답 전에 말하자면, 일전에 지하감옥 4층을 감추고 있던 피의 보호에 대해 저 녀석에게 알려 준 게 접니다.”

    “…….”

    “마법에 대해 문외한인 녀석이 갑자기 그런 답을 어디서 알아내어 왔겠습니까? 이번 몬스터를 연구하는 동안 제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쯤은 이미 충분히 보고가 들어갔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닙니까?”

    이논의 반문에 침묵을 지키던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여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 맞네. 이번에 자네가 보여 준 활약상은 이미 충분히 듣고 있었지. 평범한 약사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몬스터 연구자 중 하나이리란 평을 받았던 헬렘과 대등하게, 아니. 그를 압도할 만큼의 지식과 결과를 낸다는 건 보통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헬렘이 이논의 능력에 감탄을 표했다는 말은 이미 들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들으니 그 의미가 새삼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유더의 등줄기가 긴장감으로 뻣뻣해지든 말든, 이논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는 약을 사러 온 손님을 대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 외에도 있을 텐데요.”

    “나단은 자네에게서 지나가듯 받은 조언과 약 덕에 수련 도중 막혀 있던 부분이 원활히 뚫렸다고 말한 적이 있고, 믹 또한 자네의 안에서 아주 오래된 고목에서나 보일 법한 시간의 흔적을 보았다 보고했었지. 백 살이 가까운 노인들에게서나 아주 조금 보일 법한 것들이 자네에게는 너무나 많아서, 고민하다 물었더니 그냥 보이는 대로일 뿐이라며 간결하게 인정했다고 말이야.”

    이 말은 유더조차 지금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간 제가 모르는 곳에서 대체 무슨 일들을 겪고 다닌 것인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이논은 가뿐하게 유더의 시선을 무시했다. 당연히 그런 답이 돌아오리라 예상한 얼굴이었다.

    ‘어제 정체를 알리는 쪽이 일하기에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던 게… 단순히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었던 건가.’

    “뭐, 그쯤 들었다면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겠군요.”

    그래서, 그간 들은 보고들을 통해 키시아르 라 오르가 내린 결론은 무엇인가. 이논의 시선을 받은 키시아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마법사도, 검사도, 사제도 아니나 그 모든 지식에 해박하며, 수백 년 묵은 고목보다도 오래된 시간의 흐름을 지녔다는 자. 한낱 인간으로선 정체를 감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멈추었던 목소리가 잠시 후 다시 이어졌다.

    “-한때 이 땅에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아직 남아 있는 이종족 정도라면 말은 되겠다 싶더군.”

    순간, 귓가를 스치며 바람이 크게 불었다.

    유더는 거세게 뛰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이논이 여태 흘려 준 그 약간의 정보만으로도 키시아르가 내놓은 해답은 거의 정답에 근접한 상태였다. 답을 들은 이논의 얼굴 위로 뜻을 알기 어려운 희미하고도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뭐, 그리 말해도 틀리지는 않겠군요.”

    “흠. 이게 완전한 답이 아니라니 역시 세상은 넓군. 좀 더 정진해야겠는걸.”

    농담 같은 대답을 담담히 내어놓은 키시아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놀라지는 않는 건가?’

    아무리 감정을 숨기는 데 능한 이라지만 이렇게 놀라운 대화를 나누면서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으나 유더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저보다 한 발짝 앞에 나선 이의 뒷모습과 옆얼굴뿐이었다.

    그때, 이논의 시선이 또다시 유더에게로 잠시 향했다.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아 지그시 바라보던 노란 눈동자가 다시 키시아르에게 돌아갔다.

    “지금 확실히 말해두지요. 제가 여기 들어온 이유는 저 녀석 때문이고, 앞으로도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지금처럼 조용하게 지낼 생각입니다. 아무 일도 없다면 여태까지와 앞으로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마 단장께서도 이와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여기는데, 맞습니까?”

    상대를 떠보는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뭔가를 확인하는 듯도 한 이논의 말에 키시아르가 내민 답은 흠 없는 웃음과 악수를 위해 내민 손이었다.

    “정확해. 먼저 그리 말해 주어 고맙군.”

    이논과 키시아르의 사이에 딱히 믿음의 확인 같은 말은 따로 더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모든 확인과 용건이 다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제 가져온 그 물건은 그러면 내일 그쪽으로 보내도록 하지. 어차피 내게는 아직 역사적 사료 이상의 가치가 없으니까.”

    “그래 주십시오.”

    ‘…이걸로 끝난 건가?’

    정말로?

    유더가 당혹감을 삼키고 있는 동안, 키시아르와 손을 한 번 맞잡았다가 놓고서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이논이 그를 스쳐 지나가며 무어라 작게 속삭였다.

    “…….”

    유더는 한참 동안 사라지는 이논의 등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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