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오늘 내내 어젯밤 일어난 일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듯 하루를 보낸 이가, 해가 져 가는 시각을 앞두고 던진 의미심장한 한마디.
유더의 시선이 키시아르의 등 너머로 서서히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로 향했다가는 키시아르의 눈을 향해 다시 내려왔다. 칸나와 이논이 했던 말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떠돌며 막 입을 열려 했던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긴장감을 끊었다.
“대답은 오늘의 마지막 업무가 끝난 뒤 주게.”
작게 중얼거린 사내가 유더를 향해 살짝 미소 지은 뒤 고개를 돌렸다. 나단 주커만이 안으로 들어섰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가져왔습니다.”
방금 일어난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의 교류를 모를 사내가 묵묵하게 손에 쥐고 있던 상자를 올렸다.
“전부 가져왔나?”
“네. 두 가지 모두 있습니다.”
대답을 만족스레 들은 키시아르가 충직한 부관을 향하여 장난스러운 얼굴로 칭찬을 건넸다.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수고했다 나단. 다른 보고할 부분은?”
“쫓던 자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나한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다. 유더는 복잡했던 생각 대신 나단 주커만의 입에 집중했다.
“그자가 제게서 벗어난 뒤 지하 수로에 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는 이전 보고는 이미 아실 것입니다. 이어진 출구가 많아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행적이 불분명했습니다만, 모두 뒤진 끝에 북문 쪽에서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북쪽?”
“예. 이것을 보아 주십시오.”
나단 주커만이 품속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어딘가에 걸려 찢어진 듯한 짙은 푸른색 천에는 본래의 색을 짐작하기 힘들 만큼 검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경매장에서 도망친 상인들을 쫓던 이들이 발견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인들의 물건이리라 생각한 모양입니다만, 피와 물에 젖어 있는 점이 수상쩍어 제게 가져왔습니다.”
비밀 경매장에서 도망친 남국인 상인들은 북쪽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사라졌다. 그들의 흔적을 찾던 이들이 우연히 북문 근처에서 발견한 찢어진 옷 조각을 본 나단 주커만은, 그것이 자신과 싸우던 나한의 옷임을 빠르게 알아보았다.
“하필 상인들이 도망친 곳과 같은 방향에서 발견된 옷조각이라.”
나단 주커만의 보고를 들은 키시아르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적의 적은 상황에 따라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지. 상인들과 나한이 탈출 도중 마주쳐 서로를 도왔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겠군.”
그날 치안 관리단에서 마주쳤을 때, 남국인 상인 측과 나그란의 별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눈 사이였다. 남국인 상인 측은 나그란의 별이 자신들의 경매 물품 보관 창고를 털었다고 오해 중이었고, 나한을 비롯한 나그란의 별은 타인 공작과 빌름 남작의 수하인 상인들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보였다.
하지만 탈출한 남국인 상인들은 사실 타인 공작에게 진실된 충성을 바친 게 아니었으며, 동시에 각성자이기도 했다.
그들이 같은 방향으로 탈출했다 하더라도 마주쳤을 확률은 적지만, 시간대가 비슷하니 키시아르의 말대로 만의 하나는 고려해야 했다. 나단 주커만 또한 같은 생각을 한 듯 신중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나한이라는 자의 능력이라면 꼭 상인들이 아니더라도 저와 마주친 이들에게 힘을 발휘해 자신을 돕도록 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생각 중입니다.”
“그쪽이 훨씬 확률이 높기는 하지. 하지만 가능성은 모두 열어 두고 추적하도록.”
“네.”
“그 조각은 나가는 대로 칸나 완드에게 전달해. 그것이 발견된 주변의 정보도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너희는 남쪽으로 이동하는 길을 위주로 찾아라.”
“알겠습니다.”
타인 공작의 비밀 무역품들은 본래 일부가 경매장으로, 그리고 인신매매를 당한 사람들을 포함한 나머지는 불법 격투장이 성행 중인 남쪽으로 향할 예정이라 짐작되는 중이었다. 키시아르는 마약 가루 한 포대만을 가지고 도망친 남국인 상인들이 여전히 그곳으로 향하리라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유더의 생각 또한 키시아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디 남부에서 무역업을 하다 타인 공작과 만났다고 했고, 출신 또한 남국이니 무조건 남쪽으로 가려 하겠지.’
그리고 아까 들은 로벨의 말에 의하면 그가 서부 거점으로 옮기기 전까지 현자를 만나러 가 있었다는 나그란의 별 본거지 또한 남부였다. 혼자가 되어 도망친 나한이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 있다면, 그 또한 남부로 향하려 했을 확률이 높았다.
“이제 더 보고할 점은 없나?”
“네. 끝입니다.”
“그러면 드디어 네게도 조금 쉬는 시간이 생기겠구나. 수도로 귀환하는 준비는 천천히 하고, 잠시라도 쉬어 두도록 해.”
키시아르가 나단 주커만에게 대놓고 쉬라는 말을 하는 건 처음으로 보았다. 나단 주커만의 모양 좋은 짙은 눈썹이 슬쩍 위로 움직였다. 내내 방탕한 기사 노릇을 해 오느라 고통받았던 그는 쉬라는 말이 아무래도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곳에 온 뒤로 줄곧 충분히 쉬었습니다만…….”
“쉬라고 할 때 쉬어라. 나한을 단신으로 상대하고 나서도 며칠이나 휴식 없이 추적을 했으니 지금은 잠시 물러나야 할 때다. 아무리 네가 멀쩡하다 해도, 그자의 능력을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되지. 그 시절의 모습을 보았었다면서.”
“단지 본 것뿐이라 영향은 전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키시아르가 부관에게 굳이 휴식을 권한 이유를 알게 된 유더의 시선이 나단 주커만의 얼굴로 향했다.
그가 나한과 호산라를 동시에 상대하고도 제대로 된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부상을 입지 않았다 해서 그가 나한의 환상을 하나도 안 보고 싸웠다는 뜻은 아닐 터였다.
나한의 능력은 사람의 머리를 강제로 열어 온갖 끔찍한 환상을 보여 주어 정신을 붕괴시킨다. 몸의 상처보다 정신에 입은 상흔이 때로는 더 무섭고 회복이 어려운 법이었다.
나단 주커만이 보았다는 ‘그 시절’의 환상이 뭔지는 몰라도, 키시아르가 저렇게 염려할 정도라면 아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향이 없다는 건 네 판단이지. 이건 그자의 능력을 몸소 겪어 본 나의 판단이니 지나친 걱정이 아니야. 보좌도 아마 그렇다고 말할걸.”
갑자기 화살이 유더에게로 튀었다. 그러고 보면 여기 있는 세 사람 모두가 나한의 능력 맛을 본 이들이었다. 유더는 저를 보는 나단 주커만의 시선을 마주하며 조용히 동의를 표했다.
“…네. 단장님의 말씀에 따르시는 쪽이 추후의 활동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나단 주커만이 포기를 선언하고는 작은 한숨과 함께 인사를 했다. 임무 활동을 보고하러 왔다가 졸지에 휴식을 얻어 나가게 된 기사의 너른 어깨가 어쩐지 조금 힘을 잃은 듯 보였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할 일은 거의 다 끝났군.”
노을이 완연해진 창밖을 향해 눈을 돌린 키시아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 볼까.”
“단장님, 숙소로 돌아가십니까?”
문 앞을 지키던 단원들이 키시아르를 향해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래. 자네들도 이제 돌아가 맛있는 저녁을 들 시간이지. 수고했네.”
“아, 아닙니다! 정문 쪽으로 나가시면 아직 시끄러운 이들이 남아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아직도 있나? 기력들도 좋군. 알겠네.”
단원들이 지칭하는 건 파티가 끝난 다음 날부터 몰려와 빌름 남작의 저택 앞을 둘러싸고 키시아르를 만나려 하는 귀족들의 하인을 뜻했다. 그들은 비밀 경매에 참여하거나 빌름 남작과 엮인 범죄와 관련되어 감옥에 갇힌 이들의 친지가 보낸 자들이었다.
본래는 이번 일이 일어난 뒤, 갇힌 귀족들을 빼내기 위한 온갖 간접적 압박과 뇌물이 키시아르와 마병단에 잔뜩 몰려들어 조사와 일 처리에 큰 지장이 생길 뻔했었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리 예상했다는 듯 그 모두를 고스란히 돌려보내고, 대신 저택과 치안 관리단 앞에 거대한 종이를 하나 붙여 두었다.
- 이 시간 이후로 죄인들의 구명을 위한다는 이유로 조사를 방해하는 자들은 마병단 단장과 직접 만나 자신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해명해야 할 것이다. 당당한 자들은 몸소 나서 재판에서 의견을 표하라.
귀족들은 펠레타 공작이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라며 욕을 해 댔다지만, 파티에서 키시아르가 맨발로 벌인 온갖 행각이 널리 소문난 상황에서 감히 그를 독대하고 싶어 하는 간 큰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기껏해야 하인들을 보내 정문 밖에서 억울함을 토로하게 시키는 것뿐이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정원을 걸었다. 빌름 남작과 그의 가족들이 사라진 저택 곳곳에는 아직도 다 청소하지 못한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밤에 해 보기로 했던 일에 대해서는 많이 알아보았나?”
한 발짝 앞서 걷던 키시아르가 질문을 던졌다. 유더는 다문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가는 아무렇지 않게 열어 답했다.
“예.”
“음? 평소에 비해 자신이 좀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
놀리듯 내뱉는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아닙니다.”
“잘할 수 있겠나?”
“……해 봐야 알겠습니다만, 단장님의 몸에 위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