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38화 (438/805)

438화

유더는 키시아르가 이야기하는 그간의 일처리에 솔직하게 감탄을 표하는 황제의 사람들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까 소개를 듣기로는 직위가 제법 높은 관리들이었음에도 그자들의 얼굴은 유더에게 몹시 낯설었다. 이전 생에서 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던 탓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케일루사 황제가 여기까지 믿고 보낼 만큼 신임하는 자들이라면, 카치안 황제 즉위 이후로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들과 이전부터 안면이 제법 있었던 듯 친밀한 농담을 뒤섞어 차후의 일을 논하는 키시아르의 건강하고 화사한 얼굴을 바라보며, 유더는 어젯밤 있었던 일들을 또다시 떠올렸다.

어제 제법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오늘 그와 유더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진행되었다. 식사도, 일도, 무엇 하나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유더는 때때로 저 아름다운 얼굴 안에 제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키시아르 본인은 잠꼬대에 대해선 모두 잊은 듯 보이는데도 은밀하고 집요하게 관찰하는 것을 멈추기 어려웠다.

“…렇군요. 저 청년이 그 소문의 마병단 보좌입니까.”

그때, 케일루사 황제가 보낸 관리 한 명이 유더에 대해 물으며 시선을 보냈다. 유더는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유더가 내 보좌인 건 맞으나, 그 소문이라고만 말하면 잘 모르겠군, 멜리나?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굳이 듣고 싶으십니까?”

웃는 얼굴로 호기심을 내비친 키시아르의 질문에 멜리나라 불린 관리가 거침없이 대꾸했다.

“몬스터를 때려잡고 나서는 꼭 피를 마시는 취미를 지녔다는 이야기부터, 제2성을 지닌 각성자가 지닌 신비한 능력으로 전하를 단숨에 함락시켰다는 말, 보자마자 눈이 번쩍 뜨일 미인이란 말까지 아주 다양했지요. 특히 파티에서 휴게실 하나를 끝날 때까지 점거한 끝에 침대를 부쉈다는 소문은 타이누 너머에서도 떠들썩하더군요.”

저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돌아다닐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걸 이리 대놓고 직설적으로 듣기는 처음이었다.

몬스터 피를 마시는 취미가 있다는 흉흉한 소문은 아마 페투아멧의 피로 인한 얼룩을 본 이들 때문에 생겼을 테고, 침대를 부쉈다거나 미인이라는 소문은 키시아르가 계획한 공작의 애인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레 의도한 바이니 문제 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제가 2성을 발현한 자라는 소문은 또 어디서 퍼져 그런 식으로 섞였을까. 유더가 침묵하는 사이, 키시아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말하는 걸 들으니 자네들은 하나도 안 믿는 모양이군?”

“무엇이든 쉽게 믿지 않는 게 저희의 일이지요. 전부 헛소문인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 관리들의 얼굴은 직설적으로 소문을 이야기한 것치고는 아무런 사적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좋은 자세야.”

키시아르가 웃는 얼굴로 칭찬을 한 뒤, 유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시선이 고요한 호수처럼 깊고도 잔잔했다.

“하지만 쉽게 믿지 않는 것과 진실을 파악할 노력도 않고서 무조건 모두 거짓이라 생각하는 건 조금 다르지. 세상에 완벽한 거짓은 거의 없어. 대부분 거짓에는 진실의 파편이 함께 들어 있게 마련이야.”

관리들에게 하는 말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어쩐지 유더는 그 말이 저를 향한 듯이 느껴졌다. 세상에 완벽한 거짓은 없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그렇습니까? 제가 말한 부분에 진실의 파편이 있다니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전하께오서 사실이라 말씀해 주시는 부분에 한해서는 저희도 유념하여 새겨 두도록 하지요.”

“이런, 멜리나. 딱 보면 무엇이 진실의 파편인지 모르겠나?”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심각하게 물었다.

“내 보좌가 엄청난 미인이란 사실보다 더 정확한 진실의 파편이 어디 있지?”

“…….”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더에게 쏠렸다가는 침묵 속에서 도로 돌아갔다. 그가 2성에 대해 말할 줄 알았던 유더 또한 간만에 머리가 비는 경험을 했다. 다행한 것은 관리들이 말끝을 흐리며 재빨리 화제를 돌려 주었다는 점이었다.

“음…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전하, 차후 몇 가지 중요 사안의 처리와 관련하여 의견을 여쭙고자 합니다만, 잠시 다른 이들을 물려 주실 수 있으실지요?”

아무래도 펠레타 공작이 진짜 진실에 대해서는 말하기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여기는 눈빛으로 보낸 관리의 요청에 키시아르가 승낙했다. 유더는 덕분에 밖에 잠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오늘 내내 일하고 있던 장소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빌름 남작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본저 내의 공간이었다. 외부를 지키고 있던 마병단원들이 일제히 유더를 쳐다보며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왜 혼자 나왔어? 단장님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신다고 해서.”

“그렇구나. 우린 곧 교대할 건데, 같이 가서 바람이라도 쐴래?”

유더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단원들은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으나 지금은 그들에게까지 쓸 신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유더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창문으로 다가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경매의 날 이후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은 타이누는 오늘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유더의 마음은 그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집무실 안에 있을 이를 향해서만 쏠려 있는 상태였다.

‘이쯤 같이 지냈는데도 여전히 알다가도 모르겠군.’

거짓과 진실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싶더니, 갑작스레 또 분위기를 바꾸어 농담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배려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극도로 제 생각을 숨기는 듯도 한 모습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어제 있던 일들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유더 아일이 내비친 평소와 달랐을 여러 언행들을 이번에도 또 묻고 넘어가 주려고?

‘…황제의 건강을 생각하면 지금은 다른 데 신경을 쓸 때가 아니긴 한데.’

이전이라면 이대로 넘어가리란 추측을 떠올린 순간부터 침착함을 되찾았을 마음이 지금은 그리 좋지 못했다.

평온이 오히려 사람을 초조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유더에게는 지독히 낯선 순간이었다.

저답지 않게 폭풍우 치는 날의 수면처럼 튀어 오르는 감정들이 못내 낯설었다.

“…유더!”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대를 위해 방문한 단원들 사이에 낀 칸나였다. 아직 숙취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든 칸나가 어기적거리며 곁으로 다가와 등을 때렸다.

“어제 나만 거기 두고 가면 어떻게 해? 일어났더니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나만 헬렘 할머니 방에 누워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제 그렇게 심하게 마셨는데도 의외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칸나보다 빨리 일어난 상태였다고 했다. 이왕 늦었으니 식사까지 하고 가라는 믹의 태연한 권유 속에 숨겨진 놀리려는 의도를 읽고서 거절한 뒤 뒤늦게 빌름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유더는 또다시 키시아르에 대한 생각을 했다.

칸나 같은 힘이 있었다면 어젯밤 들은 믿기 힘든 잠꼬대의 진실도 금방 알 수 있었을까. 잠을 잔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정보를 힘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이 기이한 ‘연결’에 대해서도…….

“…혹시 무슨 일이 있었어?”

이어지던 생각이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은 물음에 뚝 끊겼다. 한참 조잘대던 칸나의 눈빛이 어느새 이전과 전혀 다른 빛을 띠고서 유더를 보고 있었다.

“…….”

“유더 너한테서 순간적으로 엄청 거대한 부정적인 느낌… 이 아니라, 감정이 잠깐 읽힌 것 같아서……. 아니, 그게 내가 읽으려고 한 건 아닌데 말야…….”

유더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짙은 푸른색 눈동자 속에서 투명한 아지랑이가 언뜻 아른거렸다. 걱정과 당혹 사이를 오가면서도 신중하게 훑는 눈빛 속에 조심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바로 말해 주었다는 건, 그만큼 칸나가 그를 믿고 걱정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저도 모르게 읽어 버릴 만큼 제 마음의 빗장이 느슨해져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할 터였다.

그녀보다 알맹이는 열 살도 더 먹은 주제에 이리 손쉽게 속내를 들키다니. 약간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칸나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 대견하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잠시 찾아들었다.

“으음, 아, 아니다. 내가 숙취 때문에 몸 상태가 별로라 잘못 느낀 걸 수도 있어. 괜히 이상한 말을 해서 기분 나빴다면 정말 미…….”

“괜찮아. 틀리지 않았으니까.”

유더는 그와 눈을 맞춘 상태에서 점점 눈썹을 누그러뜨리다가는 결국 사과하려 드는 칸나를 막고 짧게 대답했다.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정말?”

유더는 희미하게나마 입술 끝을 올렸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인지 칸나의 안색이 겨우 조금 밝아졌다.

“유더. 진짜 무슨 일이 있었어?”

그는 대답 대신 숙취로 인해 평소보다 눈 밑이 검은 칸나를 살피다 느리게 입을 열어 물었다.

“내게서 부정적인 감정이 읽혔다고 했지. 정확히 어떤 게 읽혔는지 물어도 될까.”

“어… 그건, 음.”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 줘.”

걱정스레 눈을 굴리던 칸나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초조함이나 걱정… 뭐 그런 느낌이었어. 그리고… 두려움.”

초조함, 걱정, 그리고 두려움. 유더는 칸나의 말을 따라 되뇌었다.

“처음엔 네게서 느껴지는 게 아닌 줄 알았어. 나까지 순간적으로 가슴 안쪽 뼈가 찌릿할 정도로 강하게 읽혀서… 그런데 표정은 평소랑 똑같으니까…….”

“…….”

“유더 너도 무서운 게 있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