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긴장감을 최대한 숨기고 조심스레 물으려 노력했지만 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키시아르의 시선이 잠시 흐려졌다. 먼 곳을 보며 기억을 돌이켜 보려는 듯했던 사내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좋은 꿈 같지는 않았지만… 벌써 기억이 나지 않아. 보좌가 그리 놀랄 정도였다면 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나 보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는 분명 어떤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죽어 사라진 이름이었다.
아무리 잠에 취한 채 내뱉느라 뭉그러진 속삭임이었다고 해도 유더가 그 이름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깨울 때 제게 말을 하셨는데…… 그것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말?”
키시아르가 눈을 감았다 뜨며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짚이는 부분이 없군. 무슨 말이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걸까.’
딱히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더는 한참 동안이나 키시아르의 얼굴을 살폈다. 반응이 워낙 심상치 않았기 때문인지 키시아르 또한 잠이 모두 가신 눈으로 유더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 눈 속에서 엿보이는 감정은 모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하고 깨끗했으며, 유더를 향한 의문과 깊고 조심스러운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리하여 유더는 결국 확신했다.
‘…진짜군.’
키시아르는 정말로 자신이 방금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한계까지 집중했던 눈 안쪽에서 힘이 풀렸다. 유더는 사그라지는 당혹과 충격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짧은 순간 그의 질문에 답해 주어도 될지 아닐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들으면 무언가 기억나지 않을까.
그러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형태 모를 새카만 그림자가 뱃속을 파먹듯 꿈틀댔다.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것을 피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 심경이었으나, 그의 불안을 읽은 듯 깊고 신중한 눈빛을 한 붉은 눈동자를 본 순간 결국 어떤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토록 깊은 혼란이 심장을 할퀴는 순간에도, 유더의 안에 켜진 열망의 불꽃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키시아르가 알기를 원한다면, 그는 말해야 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는 감각을 느끼며, 유더는 천천히 입을 열어 답했다.
“……‘아니지, 유드레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키시아르의 미간이 몇 번 미약하게 찌푸려졌다가는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들어도 역시… 기억이 안 나는군.”
그의 눈은 이번에도 역시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맥이 탁 풀리자 격렬하게 뛰던 심장도 늘어져 숨을 골랐다.
유더는 눈을 내리깔고 아주 느리게 숨을 조금 삼켰다. 삼킨 숨을 멈추었다가 속으로 1을 세고 다시 내쉬기를 세 번 정도 반복하는 동안, 차가워졌던 손에 조금씩 온기가 되돌아왔다.
잠시 생각에 잠긴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정 효과는 확실했다. 우습게도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유더에게 가르친 가장 간단한 진정법이었다. 여태까지는 그게 필요할 만한 일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이런 순간이 닥치니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유더는 그제야 아직까지도 자신이 키시아르와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의자 팔걸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키시아르의 시선이 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뒤따라왔다.
“나보다 오히려 네가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정말 밖에서 별일이 없었던 게 맞나? 칸나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내뱉은 목소리도 이전에 비해 훨씬 멀쩡하게 들렸다. 유더는 그 사실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칸나는 헬렘 님의 배려로 그곳에서 묵고 내일 돌아올 예정입니다.”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술 때문이겠군.”
“……예.”
보지 않아도 뻔하다는 듯 키시아르가 대답했다. 취하지도 않았고 술에 옷이 젖은 것도 아니라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후각이었다.
유더는 그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짧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키시아르의 표정은 그가 몇 시간 전 보았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익숙한 모습. 익숙한 얼굴.
그리고 그 위로 겹쳐지는 메마르고 병색 어린 눈을 지닌 같은 얼굴의 또 다른 사내.
그를 생각한 순간 유더는 진정을 위해 노력한 보람이 없게도, 또다시 죽어 사라진 이름을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떠올리고 말았다.
‘아니지, 유드레인…….’
본인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키시아르는 대체 어떻게 알지도 못할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그도 자신처럼 꿈을 통해 이전 생을 볼 수 있다는 소름 돋는 가정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나, 깨어나면 기억을 하지 못하니 확실치는 않았다.
그렇다면 애초에 대체 왜 키시아르일까.
그는 유더처럼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꿈을 통하여 이전 생을 보고 있다면, 분명 원인이 있을 터였다. 치열하게 그 원인을 찾아 헤매던 유더의 머릿속에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연결.’
키시아르는 거대한 페투아멧과 싸우는 유더를 찾으려 한 순간 가느다란 실과 같은 기이한 연결을 보고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끝을 따라가자 유더가 나타났다던 믿기 힘든 경험은 이후 얼마 전 유더에게도 똑같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키시아르를 간절히 찾으려 했을 때 잠시 나타났던 단 한 가닥의 빛나는 연결고리.
이전 생에서는 본 적 없는 것이지만, 키시아르와 ‘연결’되었다고 느꼈던 적이라면 그때도 있었다. 2성 발현의 날 일어난 사고 이후부터였다.
왜인지 그때와 관련해 많은 기억이 잊혀졌다가 최근에야 조금씩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때의 유더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감정과 키시아르의 감정을 구분하기 힘들 만큼 그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서로 뒤섞여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만한 끔찍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키시아르가 죽고 나서는 확실히 그런 감각을 느낀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꿈속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키시아르는 그 ‘연결’의 정체를 어떻게든 파악한 듯했고,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죽은 뒤로 끊어진 연결. 그리고 이번 생에 또다시 발견된 두 사람 사이의 실과 같이 이어진 무언가.
그 두 가지는 분명 다르다 생각했지만, 어찌 보면 키시아르와 유더의 사이를 잇는다는 점에서만큼은 같았다.
‘혹 그 정체 모를 실로 연결되어 있는 게 키시아르에게 영향을 미친 것 아닐까.’
감정이 뒤섞일 수 있다면, 기억이라고 뒤섞이지 못하라는 법은 없을 터다. 연결된 뭔가를 통해 유더의 기억에서 영향을 받았다 생각하는 게 이유 없이 키시아르만 이전 생의 꿈을 꾼다는 가정보다는 그나마 나은 답인 듯했다.
‘하지만 이전 생과 달리 이번에는 2성 발현 때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애초에 그 연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지.’
이전 생에 존재했던 연결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가 아니던가?
키시아르가 살아 있는 시간으로 되돌아오자 그것도 복구된 것일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 실은 대체 왜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까.
고민한다고 논리적으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유더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키시아르 또한 유더의 시선이 또다시 저를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유더.”
유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밤이 늦었는데 거기서 쉬지 않고 여기로 와서 보고까지 하느라 피곤했겠지. 걱정까지 끼쳐 미안하군.”
“…아닙니다.”
아무래도 키시아르는 유더의 반응이 자신을 향한 지나친 걱정 때문이라고 일단 판단하기로 한 듯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바쁜 날이 될 테니 빨리 쉬게. 보좌가 없는 동안 폐하의 연락도 왔거든. 속도를 보아서는 깨어나시자마자 바로 편지를 보내신 것 같더군.”
그 말에 시선이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로 향했다. 키시아르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름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궁금해했었던 황제의 편지를 보고서야 키시아르의 기이한 꿈과 연결에 대한 온갖 추측으로 날카로워지던 신경이 조금 느슨해졌다.
“폐하께서… 빠른 귀환 명령을 내리신 겁니까.”
“아니.”
편지를 내려다보며 답하는 키시아르의 표정에 평소보다 조금 더 짙은 웃음이 흘렀다.
“내용은 간결하네. 우선 빌름 남작과 불법 경매 건을 확실히 조사시키기 위해 파견한 이들이 곧 이쪽에 도착할 거라는 안내, 그리고 서부에서 활약한 마병단은 반드시 모두 함께 같은 날 수도로 돌아오라는 명령뿐이야.”
듣기에는 급작스레 쓰러졌었다는 이가 보냈다고 믿기지 않는 공적인 내용뿐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곧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병단이 모두 같은 날 수도로 돌아오라는 건…….’
“…즉, 이전에 받은 연락 내용이 어떻든 우리는 이곳에서 할 일을 모두 제대로 마치고 느긋하게 돌아오라는 말씀이지. 예정과 달라지는 게 없도록 말이야.”
키시아르가 유더의 추측과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
죽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뿐인 동생에게 당장 돌아오지 말고 오직 일에만 신경 쓰라는 내용을 적어 보낸 딱딱한 편지. 나는 무사히 깨어났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된 편지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씁쓸함이 감도는 것은 사실이었다.
케일루사 황제는 자신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은 동생이 자신만이라도 최대한 빨리 돌아가려 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예상하고서 곧바로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상태를 애써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대응이 때로는 주변에 더욱 안도를 줄 때도 있으나, 전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잠에서 깨어난 이후 키시아르의 얼굴에 감도는 평소보다 미묘하게 짙은 서늘함을 보면 편지의 내용이 안심만 안겨 준 게 아닌 건 확실했다.
유더는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는 폐하의 명대로 따르실 겁니까?”
“일단 받았으니 명은 지켜야겠지. 다만 모든 절차를 다 지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그걸 최대한 줄일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과연 키시아르는 얌전히 그 명에 잘 따라 줄 생각은 아닌 듯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바빠질 것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키시아르가 탁자 위에 여전히 펼쳐진 채 놓여 있던 편지를 들어 다시 접은 뒤 봉투에 넣었다. 그가 마석 난로에 편지를 던져 넣어 태우는 모습을 보며, 유더는 케일루사 황제에 대해 생각했다.
이전 생에는 어떤 이인지 잘 몰랐던 전 황가의 마지막 황제는 생각보다 훨씬 침착하고 계획적인 사람인 듯했다. 자신의 죽음이 고통과 더불어 점점 코앞에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텐데도 예정된 일을 더 우선시하고 주변의 걱정을 단호하게 밀어낼 수 있다는 건 보통 냉정함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점이, 실로 놀랄 만큼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란히 서 있을 때 보았던 황제와 키시아르의 분위기는 정반대였으나, 피를 나눈 형제이니 닮은 점도 많을 것이다. 같은 곳에서 자라 같은 세월을 보내고 같은 목표를 두고서 협력하는 두 사람의 행동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케일루사에게서 느껴지는 것들을 통해 이전 생의 키시아르 또한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도 생각이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는군.’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키시아르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사이 편지가 재가 된 모습을 확인한 키시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의 대화가 없으리라 여기고 잘 준비를 하려는 듯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새벽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하루 내내 많은 일을 하고, 황제가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났다는 소식까지 접한 이에게 당장 악몽에 대해 더 묻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