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35화 (435/805)

435화

“으음, 보좌님이 취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하나도 안 취했죠?”

믹이 혀가 반쯤 꼬부라진 목소리로 다음에는 더욱 강한 술을 준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 봤자 소용없을 텐데 헛된 노력이었다.

그의 휘청대는 등을 귀찮은 얼굴로 붙잡아 당긴 이논이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정뱅이는 올라가서 잠이나 자. 그리고 넌… 시간이 늦었는데 그냥 쉬고 가면 안 되는 거냐? 꼭 지금 바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

몬스터를 잠시 보고 가겠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반드시 지금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 칸나처럼 여기서 하룻밤 쉬고 간다 해도 문제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유더는 침묵 끝에 고개를 저었다.

키시아르가 숙소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안은 고맙지만 그냥 갈게.”

유더의 생각을 모를 텐데도 이논은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들으란 듯 혀를 찼다. 그는 열었던 입을 다물고 무언가 하려던 말을 삼킨 뒤 부축하던 믹을 추슬렀다.

“그래라, 그럼. 내일 보자.”

“응.”

“아! 그러고 보니 말인데요.”

막 돌아서려던 순간, 갑자기 이논에게 기대어 고개를 푹 꺾고 있던 믹이 고개를 쳐들며 소리를 쳤다. 심장이 약한 이가 여기에 있었더라면 깜짝 놀라 까무러쳤을 법한 모습이었으나 유더도, 이논도 아무런 반응 없이 그의 모습을 보았다.

“보좌님. 저번보다 구멍이 몇 개쯤 사라졌어요. 내가 계속 세어 봤는데 맞는 것 같아. 아니, 아닌가? 으응? 아까는 그랬는데 지금은 또 아닌가 싶기도 하고?”

“…….”

“하하핫, 그냥 그렇다고요. 몸이 나아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고요… 있죠, 다음에는 우리 공작님도 같이 마셔요. 공작님도 술을 아주 잘 마시는데…….”

취한 이답게 웅얼대던 믹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시 머리를 꺾으며 늘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이논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놈은 취하면 자다 말고 자꾸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러 대서 시끄러워.”

“자주 봤나 보네.”

“아주 술 중독 수준이야. 무슨 핑계를 대서든 하루에 한 병은 꼭 마시더라고. 그나마 토하거나 바닥을 기어 다니지는 않아서 다행이지. 이러고도 상단 주인이라니, 정말 제대로 된 곳이 맞기는 한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함께 연구를 하는 동안 이런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했다. 유더였다면 방해가 된다고 느껴지는 즉시 해결 수단을 강구했겠지만 투덜대면서도 믹이 벽에 머리를 더 박지 않게 도와주는 이논은 역시 타인에게 물렀다.

그걸 알기에 다른 이들도 결국 이논에게 조금씩 더 기대게 되는 것이리라. 루산이 그랬고, 이제는 믹도 그러하며,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어도 유더 또한 그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논이 퉁명스레 물었다.

“안 가?”

가야 한다. 그러나 유더는 금방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벌레 울음에 섞여 믹이 코를 한껏 드르렁대며 골아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참의 고요한 침묵 끝에, 유더는 그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논.”

“왜 또. 아니지. 너 아까 내가 형님 대접하라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냐? 하긴, 할머니란 호칭도 싫다고 봐달라던 놈이 뭐는 하겠냐마는…….”

“형.”

눈썹을 치켜올리며 매섭게 말을 이어나가던 이논이 일순 우뚝 멈추었다.

“너…, 방금 뭐라고?”

“오늘은 고마웠어. 하지만 내일은 굳이 안 와도 돼.”

유더는 바람을 밟고 뛰어올랐다.

아래쪽에서 무어라 지르는 소리가 나는 듯도 했지만 무시했다.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감각들이 몸속에서 지글대며 끓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거대한 빌름 가의 저택에 빠른 속도로 도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불이 꺼진 별저 안으로 들어서서 소리 없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유더의 존재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숙소의 문을 아주 작게 두드린 유더는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손잡이를 느리게 돌렸다. 시간이 늦어 침대에서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사내는 그곳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뿌리는 마석 난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키시아르가 보였다.

‘……자는 건가?’

유더는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평소의 키시아르라면 이쯤에서 눈을 떴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당혹스러웠다.

입을 열어 키시아르를 부르려 했던 유더는 문득 그의 곁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에 시선을 돌렸다. 치안 관리단의 지하 감옥에서 가져온 낡은 일기, 그리고 이곳에서 나가기 전까지 보고 있었던 편지 둘. 거기까지는 예상했지만 펼쳐진 채 놓인 새로운 편지가 눈길을 새롭게 사로잡았다.

편지를 봉하는 임무를 마치고 뜯겨진 밀랍 인장 조각의 문양이 몹시도 익숙했다. 그건 태양궁에 머무는 황제가 비밀리에 서신을 전달할 때 쓰는 문장이었다.

제가 이논을 만나고 돌아오는 사이에 벌써 케일루사 황제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단 말인가? 생각보다 연락이 너무나 빨랐다.

“…….”

유더가 저도 모르게 그곳에 시선을 둔 동안, 갑자기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단장…….”

키시아르가 일어났다고 생각해 서둘러 몸을 돌린 유더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흰 얼굴과 마주쳤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지도 않은 상태였다. 자세를 바꾸며 가늘게 내쉬는 숨결이 평소보다 거칠었다. 찌푸린 미간 아래 긴 속눈썹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타닥이며 타오르는 불꽃 그림자가 어린 관자놀이 사이로 맺힌 땀까지 본 뒤 유더는 더 볼 것도 없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단장님? 단장님.”

대답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낮은 소리가 키시아르의 목 안쪽에서 희미하게 울렸다.

“단장님. 일어나십시오. 단장님!”

이전보다 더 거침없이 어깨를 흔들던 유더는 일단 장갑을 벗고 사내의 목과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대어 보았다.

‘차가워.’

피부에 닿은 싸늘한 냉기에 놀라 소스라치게 떨어지려 한 순간, 올라온 손가락이 유더의 손을 빠르게 잡아챘다. 균형을 잃은 몸이 키시아르의 몸 위로 쏟아졌다.

“…….”

신음을 삼키고 일어나기 위해 빠르게 자세를 추스르려 했을 때였다.

유더의 머리 위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지, 유드레인…….”

무겁게 뭉그러진 한마디 중얼거림.

일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전신의 피가 모두 발아래로 쏟아져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찔했다.

호흡조차 잊은 채 멍하니 굳어 있던 유더는 한참이 지난 뒤 제 손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유더의 손이 저항 없이 툭 떨어져 키시아르의 몸을 때림과 동시에 사내의 몸이 움찔 움직였다.

비로소 눈꺼풀이 흔들리며 붉은 눈동자가 선명히 드러났다. 키시아르는 제 바로 앞에서 창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을 보며 잠시 현실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듯 고요히 눈을 깜박였다. 손이 움직여 유더의 머리칼과 뺨을 가볍게 매만지더니, 잠시 후 비로소 불이 들어온 듯 평소와 같은 희미한 미소가 입술 끝에 스르르 어렸다.

“……이건 뭐지? 내 보좌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잠을 깨워 주는 재주도 있었군.”

“…….”

그가 부드럽게 농을 했음에도 유더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날카롭게 흘러나오는 숨결 사이로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쉴 새 없이 키시아르의 얼굴을 훑었다.

그러자 비로소 키시아르도 묘한 기색을 느낀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나.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단장님께서,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잠깐 사이에 유더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꽉 잠긴 상태였다.

“아. 너무 깊이 졸아서 놀랐나? 가끔 이럴 때가 있기는 해.”

“아뇨. 그냥 일어나지 않으신 게 아니라…….”

유더는 방금 제가 본 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다 이를 한 번 악물었다.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이토록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어 손바닥을 파고드는 따끔한 고통의 힘으로 겨우 어렵게 목소리를 내었다.

“나쁜 꿈을, 꾸신 것 같아서 깨우려 했습니다만…….”

“음…….”

“무슨 꿈을 꾸셨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