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아주 이상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분명 욕을 진탕 먹고 혼이 나고 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마치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둘이 뭐, 싸우기라도 했어요? 목소리가 너무 큰데?”
이논이 계속해서 투덜대는 소리를 들었는지, 결국 술을 마시던 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잔뜩 취해 얼굴이 붉어진 믹이 이논과 유더에게 스스럼없이 한 팔씩 걸쳐 어깨동무를 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유더가 부정하자 믹이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었다. 조금 늦게 다가온 칸나도 만만치 않게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유더를 살폈다.
“정말 싸운 거 아냐? 유더가 약사님한테 혼나는 줄 알았는데.”
눈을 날카롭게 뜨려 노력하고 있는 듯하기는 한데 여태 본 칸나의 얼굴 중 가장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평소 주량보다 훨씬 더 마신 게 분명해 보였다.
“아. 칸나 씨. 몬스터 보고 싶다고 했었죠? 요기 있어요.”
유더가 대답하기 전에 믹이 몬스터가 든 우리를 툭툭 치자 모두의 관심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유더는 이논과 시선을 마주하며 나누던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자는 암묵적인 신호를 주고받았다.
“연구의 목적도 끝났으니 슬슬 이 녀석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할머니와 제가 제법 고민하는 중이었죠.”
“이름요? 몬스터 이름을 두 분이 그냥 지으실 수 있는 건가요?”
“그럼요. 본래 그런 건 이전에 없던 몬스터를 새로 발견한 사람이면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먼저 발견한 마병단과 공작님, 그리고 서부 마법사 연합에서 이름을 지정해 주지 않았으니 저희가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랬군요. 몰랐어요.”
“모르는 것도 당연해. 매년 수많은 몬스터가 새로 나타나니 이름 따위에 의미를 둘 리 없잖니. 그래도 관련자들의 수고를 덜어 주고 싶다면 발견한 이들이 직접 이름을 지어 보고해 주는 게 좋기는 하지.”
헬렘이 끼어들어 대답해 주었다.
“괜찮다면 온 김에 두 사람도 함께 고민해 주면 좋겠구나.”
“음…….”
칸나가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 이름이라면 몰라도, 대삼림에서 저 몬스터가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기억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게 기꺼운 기분은 아닐 터였다.
“참고로 저는 긴꼬리 검보라 펜펜이라는 이름을 추천했는데, 할머니는 더 무서운 이름으로 짓는 게 좋을 것 같대요.”
“펜펜요?”
“지푸라기를 뭉쳐서 만든 인형을 북쪽 지방에서 그렇게 불러요. 저 녀석 생긴 거랑 좀 비슷하잖아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칸나 또한 유더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시선을 피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몬스터 이름을 그렇게 귀엽게 짓는 건 안 돼.”
“법적으로 안 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요. 어차피 아무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고 금방 잊혀질 텐데 대충 짓자고요.”
헬렘의 타박에 믹이 크게 항의했다. 유더는 그의 말 중 어느 한 부분에서 문득 낯선 기분을 느꼈다.
‘금방 잊혀진다……. 그런가. 이번은 그렇게 되겠지.’
이전 생의 페투아멧은 제국에 거대한 피해를 입혔기에 그 위험성을 널리 기억하고 알리기 위하여 전설 속 악마의 이름에서 명칭을 땄다. 이후에도 그 이름은 새로운 몬스터 관련 사건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비교를 위해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이전 생처럼 저 몬스터에게 페투아멧이란 이름을 붙이자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유더는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믹의 말마따나 하찮은 이름으로 새로이 정해지는 쪽이 이번에는 훨씬 나을 듯했다.
“유더는 어떻게 생각해?”
“믹 씨의 의견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칸나가 유더의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거봐요. 보좌님은 역시 뭘 알아.”
믹이 크게 웃으며 흡족해했다. 헬렘이 한숨을 내쉬며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유더는 여러 사람이 우리 주변에 몰려들어 위협을 느낀 듯 또다시 꼬리 끝이 보랏빛으로 물든 작은 몬스터를 바라보다 문득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 목적을 다시금 떠올렸다.
‘몬스터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낸다……라.’
신의 말씀을 담았다 전해지는 경전은 몬스터의 존재를 검은 달의 저주받은 피라 설명한다. 비록 검은 달의 힘은 태양신의 힘을 증명해 낸 이들에게 밀려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지만, 그의 저주가 담긴 피가 아직 남아 있기에 틈이 생기면 세상 속으로 침범해 들어오며 그것이 곧 몬스터라는 이야기였다.
신앙심이 강한 이들이든, 아니든 누구나 당연하게 상식적으로 인지해 온 몬스터의 기원. 유더가 아닌 그 누구에게 물어도 그 이상의 답을 내놓지 않을 터다.
하지만 천 년 전의 초대 타인 공작은 어쩌면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치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묻는 것 같은 기분이군.’
이논이라면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대화를 나누려면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했다.
유더가 생각에 잠긴 사이 몬스터를 살필 만큼 살핀 이들의 화제는 재차 바뀌었다. 칸나에게서 마병단과 황궁기사단의 사이가 좋지 않으며, 특히 디아카 공작가의 키올레는 유더에게 결투까지 신청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헬렘이 들고 온 술잔을 홀짝이며 고개를 저었다.
“디아카 가의 막내? 그 아이가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세상에. 헬렘 할머니는 그 기사분도 아세요?”
“안다고 하긴 무엇하고, 괘씸해서 기억에 남았다고 해 두자.”
“왜요?”
키올레의 이름이 나왔을 때까지는 솔직히 아무런 흥미도 들지 않았지만 그 다음은 조금 달랐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디아카 공작이 황태후께 직접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 청했었단다. 그리고 황태후께서 내린 이름이 그것이었는데……. 주군, 아니. 당시엔 2황자님이셨지. 아무튼 그분의 이름과 의도적으로 비슷한 철자를 너무 많이 사용한 이름을 내린 게 분명하다고 당시에 아주 시끄러웠어.”
여기서 갑자기 또 키시아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유더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칸나가 조심스럽게 ‘그게 큰 문제였나요?’하고 물었다.
“큰 문제고말고. 같은 시기에 나라를 이끌 황자, 황녀님들의 이름과 자신의 자식 이름을 그렇게 비슷하게 지으려 하는 귀족은 없어.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고 의도를 의심케 할 만한… 아무튼 많은 이들을 불쾌하게 한 행위였지.”
의도를 의심케 할 만하다고 말하다가 끝을 흐리며 표현을 바꾸었지만, 헬렘의 표정을 보아서는 이미 그 부분에 대해 어떤 확신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현 황제 폐하와 주군의 이름에 같은 소리를 내는 철자들이 많이 들어간 건 선황 폐하께서 존경하던 영웅을 닮으라는 의도를 담아 지으신 결과이자, 황실의 작명 법칙에 따른 바이기도 하단다. 하지만 디아카 공작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첫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부터 은근하게 선을 넘었지.”
그러다가 결국 막내인 키올레의 이름을 지을 때쯤 되어서는 주변에서도 키시아르와 키올레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말이 나올 만큼 폭발했다는 이야기였다.
듣기에는 자식 이름 문제로 불거진 작은 옛날 사건처럼 들려도, 그 이면에는 더 깊은 이야기가 있을 법했다. 그러나 헬렘은 그 이상 더 말을 잇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술잔만 내려다보다 깊이 숨을 내쉬었다.
“재미없는 옛 이야기는 그만하자꾸나. 취하면 이래서 좋지 않아.”
그녀는 남은 술을 모두 들이켠 뒤 이제 슬슬 정말로 쉴 때가 된 듯하다고 말했다. 가장 많이 취했으면서도 술을 더 마시고 싶어 했던 믹은 아쉬워했으나 유더는 그 결정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뵈어 죄송했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가 보려 합니다.”
“괜찮다는데도. 그런데… 유더는 가기 전에 나를 할머니라 한 번 불러 줄 생각은 없는 건가?”
편히 부르라는 말에 알겠다고는 했어도 그건 역시 조금 어렵게 여겨졌다.
“죄송합니다. 헬렘 님 정도로 봐주십시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고집이 강하구나. 주군이 곁에 두시려 생각하신 이유를 알겠어.”
“…….”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묵하는 유더를 보며 헬렘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칸나는 아무래도 여기서 자고 가는 쪽이 낫지 않을까 싶구나.”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린 유더는 그사이 어느새 몹시 졸린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칸나를 발견했다. 꾸벅꾸벅 머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니 걸어서 함께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그래 보이는군요.”
“내 방에서 함께 자면 되니 괜찮다. 내일 보내마.”
“감사합니다.”
헬렘이 칸나를 추스르는 사이, 믹과 이논이 유더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