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안녕하세요. 헬렘 마법사님이시죠?”
“그래요. 그쪽은……?”
유더가 나서서 칸나의 소개를 하려 했으나, 그보다 믹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할머니. 칸나 완드 씨예요. 마병단 부단장 중 한 분이라는데 나와 악수 한 번 나누자마자 바로 믹 씨라고 부른 거 알아요? 하하핫. 정말 대단한 능력이죠.”
“뭐?”
“두 분이 늘어났으니까 잔을 더 가져올게요! 술도!”
제 할 말만 마친 뒤 사라진 믹을 두고 칸나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방금 들으신 대로 칸나 완드라고 합니다.”
그녀는 접촉을 통해 정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혹 헬렘이 보자마자 자신을 경계할까 조금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헬렘은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믹이 제 성으로 불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 사실을 접촉 한 번만으로 알아내고 배려해 준 게 대단하지 않다면 뭐가 대단하겠어요? 주군을 보필하는 이라면 누구든 환영하니 편하게 있다가 가도록 해요.”
“네. 감사합니다!”
칸나가 냉큼 유더의 곁에 앉아 이논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술자리 참여로 굳어져 가는 듯하여 유더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몬스터는 어디에 두셨습니까?”
“여전히 저쪽에 있죠. 지금 바로 보러 가려고요?”
“예.”
“어허, 그건 안 되죠 보좌님! 저번에 저와 약속했잖아요? 우리 슈덴이 자랑하는 수입주 콜렉션은 마셔 보시고 가야 한다고요.”
그러나 유더가 일어서기도 전에 새로운 잔 두 개와 병 몇 개를 안고서 달려 들어온 믹 때문에 그의 시도는 그대로 좌초되고 말았다.
“이건 남국에서 들여온 27년 된 별의 눈물! 그리고 또 이건 저 북쪽의 일 년 내내 겨울인 신비의 섬 엑시타에서 가져온 50년 된 빙하의 숨결! 이런 걸 마셔 볼 기회가 어디 그리 흔한 줄 알아요?”
“와. 전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그럼요. 이런 건 황제께서도 보기 어려운 것들일걸요.”
“말은 잘해.”
칸나가 신기해하며 답하자 믹이 자랑스럽게 병을 흔들었다. 헬렘이 곁에서 술을 마시며 픽 웃었다. 그 어디에도 유더의 거절 의사가 반영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
“포기해. 몇 잔은 마셔야 보내 줄 테니까.”
유더와 시선이 마주친 이논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몹시도 익숙해 보였다. 믹의 술자리에 한두 번 참여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건배!”
결국 유더는 그들의 술자리에 끼게 되었다. 설마 이런 멤버로 술을 마시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오랜 상인 생활로 다져진 믹의 화술 덕에 자리는 예상 외로 떠들썩했다.
처음에는 믹이 상단의 일원으로 무역을 하며 겪어 본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을 떠들어 댔지만 시간이 흐르고 칸나가 술에 취해 귀가 붉어지기 시작할 때쯤에는 마병단과 키시아르가 중심 화제로 떠올랐다.
믹은 마병단에 대해 제법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아직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어 잘 모른다며 몹시 궁금해했다. 헬렘의 경우 믹만큼 적극적이거나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잘 웃고 보기보다 입심이 센 편이었다.
유더는 칸나가 마병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가끔 부연 설명을 필요로 할 때 말을 조금씩 보탰다. 처음에는 그 이상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으나, 헬렘과 믹이 조금씩 이야기하는 펠레타에서의 키시아르 이야기에는 도무지 귀를 닫기가 어려웠다.
헬렘은 키시아르가 펠레타의 새로운 주인이자 공작이 되어 그 척박한 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갔던 순간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호위를 해 줄 기사 몇 명과 나단 한 명, 그리고 나만 데리고서 그곳에 갔는데, 성이라고 하나 있는 게 금방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에 수백 년은 청소를 안 한 것처럼 낡았지 뭐니. 시종은커녕 집사조차 없었어.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돌아가 따지고만 싶었지만 그분께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기서 태연하게 잠을 주무시더구나. 심술을 부리던 관리관도 그 모습에는 혀를 내둘렀단다.”
“와. 주커만 경도 그때부터 단장님을 모셨군요.”
어느새 헬렘과 말을 편히 하기 시작한 칸나가 놀란 얼굴로 감탄했다.
“그래. 그렇게 성실하고 귀여운 아이는 처음 봤어.”
“귀여운 아이…요.”
귀여운 아이라 불리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뚝뚝해진 지 오래인 나단 주커만을 떠올린 듯 칸나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아는 듯 헬렘이 웃음을 흘렸다.
“그때는 주군께서도 그저 어린 소년이셨단다. 정말로… 그랬지.”
유더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10대의 키시아르를 떠올려 보았다.
헬렘과 믹의 이야기가 그리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무섭도록 아름다운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들을 홀려 놓고 믿지 못할 일들을 곧잘 해냈다는 그 모습만은 어쩐지 잘 상상이 되었다.
취기는 조금도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난 상태였다.
그 사이 그는 믹과 말을 놓게 되었고, 헬렘에게서 호칭을 편히 불러도 좋다는 허락을 들었다. 격식을 차린 호칭보다는 할머니라 불러 주는 쪽이 훨씬 좋다며 상냥한 노부인처럼 웃는 그녀가 전 궁중마법청장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유더는 몹시 낯선 기분을 느꼈다.
칸나 또한 두 사람과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아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헬렘 할머니. 펠레타가 그렇게 춥다면 마병단 쪽으로 오시는 건 어떠세요? 단장님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요, 지금 저희 단에 머물고 계신 다른 마법사님도 계세요.”
“그래? 누구지?”
“진주탑에서 오신 타이스 율만 님이세요.”
“타이스? 그자가 마병단에 있단 말이니?”
몇 잔째일지 모를 술을 마시던 헬렘이 멈칫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안경 너머로 비친 주름진 눈가가 슬쩍 가늘어졌다.
“그분을 아시나요?”
“알다마다. 내가 젊은 시절 진주탑에 있었을 때부터 그자는 유명했지. 연구에 필요하답시고 말도 안 되는 짓을 자주 했단다. 지금은 좀 얌전해졌다면 좋겠다만…… 어떻니?”
“하하…….”
칸나가 슬쩍 웃으며 답을 하지 않자 헬렘이 흠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게지. 그자가 주군의 곁에 있다니, 그건 확실히 좀 걱정이 되기는 하는구나. 살펴보러 가 보아야 하나.”
“어어, 할머니. 설마 진짜 수도에 가 볼 생각이야? 손주가 그렇게 돌아와 달라고 편지를 해도 한 번도 안 갔다면서.”
새로운 술을 따르던 믹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수도에 안 가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셨어요? 제가 혹시 말을 잘못한 건가요?”
“아니, 아니란다 칸나. 내가 수도에 안 돌아갔던 건 거기서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을 뿐이야. 늙어서 매일같이 집에만 머물며 가족의 짐이 되는 건 딱 질색이거든.”
주군께서 마침 할 일이 아주 많은 곳에 영입 제안을 주셨고 말이야. 부드럽게 대답한 헬렘이 잔을 매만지며 시선을 내렸다. 유더는 어쩐지 그 답이 전부는 아닐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에 보아하니… 주군께서 앞으로 펠레타에 전처럼 오래 머무실 일은 없으실 것 같더구나.”
그렇게 말한 헬렘은 어쩐지 유더를 향해 눈을 돌리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믹 또한 목까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대다가는 움직임이 너무 컸던 탓에 벽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덕분에 유더는 그 이상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헬렘은 이번 일이 끝나고 펠레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 있는 건가.’
그녀 같은 몬스터 전문가가 와 준다면야 앞으로도 상당히 도움을 받을 수 있기는 할 터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유더는 문득 테이블 아래로 옆구리를 쿡 찌르는 손길에 흠칫하며 눈을 돌렸다. 이논이 아주 희미하게 입술만을 움직여 말을 건넸다.
“다들 이제 취할 만큼 취했어. 몬스터를 보러 갈 거면 지금 일어나.”
“…….”
유더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저들만의 이야기에 몰입한 세 사람을 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더와 이논이 연이어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도 떠들썩한 대화가 등 뒤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정말 몬스터만 보러 왔어?”
“아니.”
“그럴 줄 알았다.”
유더는 등불 하나로 겨우 어둠을 밝힌 응접실 가운데 놓인 페투아멧의 우리 앞에 섰다. 조그만 몬스터가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와 창살에 매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까지도 당근을 씹던 중이었는지 주황색 덩어리가 몬스터의 머리 주변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유더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만나자마자 말을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뭐야.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방금 전까지 지하감옥에 다녀왔었어.”
“지하감옥?”
“4층.”
피의 보호로 숨겨진 4층을 발견한 뒤, 거기에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구해 왔다는 사실까지는 알고 있었던 이논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거기서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실이 발견되었어.”
“연구실이라. 뭐 놀라운 거라도 있었나 보지?”
유더는 최대한 모호하고 간략하게 그곳에서 발견한 것들을 전달했다. 초대 타인 공작이 연구한 것으로 보이는 몬스터 그림들. 고어가 뒤섞여 작성된 오래된 일기. 그리고 키시아르가 읽어낸 의미심장한 한 문장.
“거기에 써 있던 말이 정말 연구의 목적이 맞다면, 이전에 네가 말했던 부분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순간 이논의 눈빛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