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이곳에 존재할 만한 연구실의 주인이라면, 역시 초대 타인 공작일까.
이전에 프루엘레와 키시아르가 정보를 나눌 때 들었던 바에 의하면 초대 타인 공작은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대마법사 루마의 제자였다. 루마는 타이누에 그를 보러 자주 방문했었고, 제자의 재능은 몰라도 연구 능력만은 인정했었다고도 했다.
이제는 알 수 없는 그의 연구 내용에 대해 이논은 뭔지는 몰라도 위험한 것이라 장소까지 감추려 한 게 아니느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로 4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내부에서 그런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공간을 찾기보다는 그곳에 갇혀 있던 이들을 구하고 빌름 남작을 잡아들이는 일이 먼저였기에 유더는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루었었다.
드디어 그 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유더가 키시아르를 향하여 남몰래 시선을 옮김과 동시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키시아르 또한 그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움직임에서 같은 생각 중이었음이 느껴졌다.
그들은 드디어 검게 입을 벌린 연구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예상 외의 광경과 마주쳤다.
‘……버려진 자루뿐인데? 연구실이라 추측할 만한 게 어디에 있단 거지.’
그곳은 그리 넓지 않았다. 어둑한 동굴처럼 파 둔 내부의 벽에는 여러 가지 무늬로 그려낸 그림이 가득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는 오래되어 낡은 천 자루들만 잔뜩 굴러다녔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엇을 보고 마법사의 연구실이라 판단한 걸까.
허리를 숙여 그 자루 하나를 슬쩍 집어 올린 칸나가 바로 무언가를 알아낸 듯 입을 열었다.
“이건… 얼마 되지 않은 쓰레기들이네요. 본래 뭔가가 들어 있었고, 이 안으로 가져왔다가 처분을 위해 버리고 간 거예요.”
“혹 지금 능력을 쓴 건가?”
코엘트 남작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네. 이런 정보를 읽어내는 게 제가 가진 힘이죠.”
“대단하군. 이런 때만 아니라면 좀 더 듣고 싶지만… 아무튼 그것들은 빌름 남작이 이전에 남기고 간 쓰레기로 추정되니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쪽입니다.”
학자다운 호기심을 바로 갈무리한 코엘트 남작이 몸을 돌려 벽에 가득한 무늬들을 가리켰다.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전술 게임의 패들이군.”
들어서자마자 벽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키시아르가 낮게 답했다.
“맞습니다. 각 패를 상징하는 문양들입니다. 아주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정형화된 형태로 패를 만들지 않아서, 아무 재료에나 저 문양을 적으면 그게 곧 해당 패가 되었다고 하지요. 저의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초대 타인 공작께서도 저것을 무척 즐겼다고 합니다.”
그제야 유더의 눈에도 벽의 무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되어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덧붙여져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말로 전술 게임에 사용되는 패들의 밑바닥에 새겨지는 문장과 거의 같은 형태였다.
그것을 모두 훑은 뒤 유더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게임에 사용되는 패는 총 24개. 이곳에 그려진 문장도 24개로 같아. 그런데……. 왜 종류의 개수는 조금씩 다르지?’
전술 게임에는 8종류 24개의 패가 사용된다. 가장 수가 많은 일반패, ‘융’이 10개, 그 위로 각기 다른 패 5종이 각각 2~3개씩, 그리고 게임을 좌우하는 군주의 패가 2개였다.
그런데 벽에 그려진 문장들은 종과 패의 수가 규칙과 조금씩 어긋났다. 어떤 패는 4개가 그려져 있거나, 또 어떤 패는 1개밖에 그려져 있지 않은 식이었다.
“아마 빌름 남작도 이 장소까지는 발견했겠지만, 저 문장들의 비밀을 크게 중요히 생각지는 않고서 비밀 창고로만 사용했겠지요. 이전에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지 모를 다른 분들도 그 부분을 깊이 파고들어 갈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연구를 해 온 코엘트 남작은 그것을 본 순간 오래된 군사 암호임을 알아차렸다.
“아주 옛날에나 사용된 암호입니다. 풀이하면, ‘왕을 온전히 돌려놓아라’라는 뜻이 됩니다.”
“이곳에 그려진 군주의 패 ‘이믐’은 1개뿐. 하지만 사제의 패인 ‘셴’이 하나만 남았을 때 그것은 일시적으로 이믐이 될 수 있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제의 패는 본래의 3개가 아닌 2개만 그려져 있죠.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이렇게 가렸더니…….”
키시아르의 말에 동의한 코엘트 남작이 문장 하나를 손으로 짚으며 가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 난 상처의 피를 머금은 문장이 빛을 내더니, 텅 빈 창고처럼 보이던 내부가 갑자기 소리 없이 진동하며 떨렸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키시아르나 다른 이들이 위험할까 싶어 주변을 경계했다.
잠시 후 그들의 눈앞에 방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수도 없이 쓰고 그린 종이 뭉치들, 제목이 없는 책 한 권, 말라 버린 펜, 그 외의 온갖 도구들을 보며 칸나가 작게 목소리를 흘렸다.
“세상에. 진짜 마법사의 연구실이네.”
“나도 아까 잠깐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에버가 중얼거리자마자 앞으로 나아간 키시아르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일기인가. 고어가 많이 뒤섞여 작성되었군.”
“네. 적은 이가 마법사란 건 확실합니다. 주인이 초대 타인 공작이실 확률이 높기는 하겠지만… 아직 다 본 것이 아니라 확언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코엘트 남작 또한 초대 타인 공작이 마법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고어에 능통했기에 그 내용을 어렵지 않게 해석해 냈다.
“대부분은 연구에 대해 적혀 있더군요. 여기서 몬스터에 대한 연구를 했다는 사실도 덕분에 알아냈습니다.”
“몬스터?”
“저기 쌓인 종이의 대부분이 몬스터를 관찰하여 묘사한 그림입니다. 아마 포획해 온 몬스터를 이 감옥에 가두어 두고 연구를 진행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둘둘 말린 채 쌓여 있는 종이 더미를 흘긋 본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하감옥의 비밀이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몬스터 연구는 꺼려지는 편인데, 그 시기에 그걸 연구했다니……. 숨겨 둔 것도 나름대로 이해는 되는군.’
이논은 대마법사 루마가 다른 이들 몰래 시간을 돌리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했다. 여기서 몬스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이가 초대 타인 공작이라면 그 사이에 딱히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루마의 연구에 대해 뭔가를 더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쉬웠다.
‘일단 이논에게 알려 주기는 하겠지만…….’
“연구의 목적은 무엇이었다고 써 있던가?”
그때, 일기를 뒤적거리던 키시아르가 물었다.
“주변에 철저히 비밀로 하고 이런 연구를 했다면 그만큼 무언가 바라는 바가 있었다는 뜻일 텐데.”
“그게……. 추측할 만한 부분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제가 보기에는 조금 황당무계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제가 해석을 잘못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해 말하지 않았다는 코엘트 남작의 말을 들은 키시아르가 정확한 페이지를 알려 달라 요청했다. 남작이 키시아르가 들고 있던 책을 건네받아 특정 페이지를 펼쳤다.
“여기 이 부분입니다.”
흘려 쓴 글씨가 가득한 데다 고어까지 뒤섞여 있어 유더는 읽을 수 없었지만 키시아르의 시선은 침착하고도 빠르게 그 페이지를 전부 읽어내렸다.
“그 저주받은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시간 또한 우리의 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도 같은 의문을 품고 같은 것을 바라지 아니하십니까. 그리 말하였을 때, 나의 영혼의 아버지이신 분께서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으시었다……. 이 부분인가.”
“네. 그저 단순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읽어낸 부분 중에서 연구의 목적이라 할 만한 뜻이 담긴 곳은 그 정도입니다.”
코엘트 남작이 키시아르가 고어를 몹시 매끄럽게 읽어내는 모습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며 답했다.
“확실히 자네의 말대로 다소 황당무계하기는 하군. 보좌는……. 유더?”
말을 이으며 평소처럼 제 보좌의 생각은 어떠한지 묻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키시아르가 문득 묘한 눈빛으로 이름을 불렀다. 그때까지 키시아르의 뒤편에 서 있던 검은 머리 사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다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예?”
유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내어 답했다. 언뜻 보아서는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얼굴과 달리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아차린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키시아르가 조용히 물었다.
“보좌가 보기에는 방금 그 이야기가 어떻던가?”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 무어라 말씀드리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래, 그렇군.”
고개를 돌린 키시아르가 손에 든 일지를 덮었다.
“칸나. 이곳에서 읽히는 정보는 어떠했지?”
“현재까지는 이렇다 할 정보가 읽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마법으로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곳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칸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군. 그러면 코엘트 남작. 앞으로 바빠지겠지만 맡길 이가 자네뿐인 듯하니 틈틈이 계속 이곳을 살펴 주었으면 좋겠네. 이 일지는 내가 가져가서 먼저 살핀 뒤 보내 주어도 되겠나? 개인적으로 흥미가 조금 솟아서 말이네.”
“물론입니다. 이곳을 살피는 건 오히려 학자로서 제가 더욱 부탁드리고 싶었던 일이니 영광이지요. 여기 있는 물건들을 살펴 새로운 정보를 발견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