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무슨 일이지?”
허락을 받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온 에문이 키시아르와 유더의 앞에 놓인 술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시선을 돌리고 용건을 말했다.
“에버가 지하감옥 4층에 바로 와 주실 수 있으신지 여쭈어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렇게만 말하면 아실 거라고…….”
“알겠네. 마차를 대기시키고 칸나에게 그리로 오라 전하도록. 칸나의 빈자리는 자네가 잠시 대체하면 될 테니까.”
에문이 바삐 빠져나가고 나서 키시아르는 조금의 취기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일어났다. 유더는 그를 뒤따라 몸을 일으키며 의아하게 물었다.
“감옥 4층이라뇨. 칸나까지 부르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일단 가면서 이야기하지.”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을 살피던 칸나는 급히 그들과 합류해 마차에 탔다. 그녀도 왜 부름을 받았는지 짚이는 곳이 없는 듯 의문스러운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을 실은 마차가 어둠 속에서 빠르게 달려가는 동안 키시아르가 비로소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 귀족들을 조사하던 도중, 나는 코엘트 남작에게 약간의 협조를 요청했네. 코엘트 가에는 지하감옥 4층에 대한 정보가 아직까지 암암리에 전해 내려왔던 모양이더군.”
한때 서부 곳곳에서 빌름 가만큼이나 타인 공작가의 명으로 많은 일을 했던 코엘트 남작가에는 여러 귀한 정보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몰락하기는 하였으나 제법 이름이 알려진 저명한 역사학자이기도 한 현 코엘트 남작은 키시아르가 은근슬쩍 끄집어 낸 지하감옥 4층과 관련된 이야기에 큰 흥미를 드러냈다. 할아버지에게 옛이야기처럼 들은 적이 있었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는 듯했다.
그 또한 타인 공작가의 방계 출신이니 지하감옥 4층을 열 자격이 충분하며, 앞으로 새로워질 서부를 맡아 줄 자이기도 하니 조사시키기에 이보다 마땅한 인재가 또 없었다.
“그래서 그를 조사가 끝나는 대로 에버와 함께 지하감옥 4층으로 향하라 명했지. 내부에서 무언가 발견한다면 연락을 보내라 말했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사람을 보냈군.”
키시아르의 설명을 통해 코엘트 남작이 키시아르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파티에 남아 있던 이이자, 프루엘레에게 몰래 정보를 전해 준 정보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칸나는 만나기도 전부터 그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낀 듯했다.
“전 타인 1공자님도, 그분도 잘 모르지만 이곳에 온 뒤 읽어 낸 정보들 속에서 그분들의 이름을 자주 봤어요. 과연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셨을지 궁금하네요.”
“곧 볼 수 있게 될 거야.”
어둠이 내린 치안 관리단 앞은 수많은 불을 밝혀 두어 대낮처럼 환했다. 키시아르가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단원들에게 큰일이 있어 돌아온 건 아니니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유더의 곁에 있던 칸나가 문득 망설이는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걸었다.
“유더. 혹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아니. 왜?”
“그냥 마차에서부터… 평소보다 그런 게 많이 느껴져서. 답하고 싶지 않다면 무시해도 돼.”
케일루사 황제의 소식과 내일 당장 시도해야 할 키시아르와의 시험 때문에 평소보다 기분이 무겁기는 했지만 딱히 드러내어 표 내지는 않았는데, 능력이 부쩍 발전한 칸나의 앞에서는 소용없었던 모양이었다.
유더는 혹여나 제가 기분 나빠할까 염려하는 칸나의 선량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작게 저었다.
“괜찮아. 고마워.”
“으응.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주는 거다?”
키시아르와 황제의 몸 상태는 기밀이니 실제로 도움을 청하기는 어렵겠지만, 칸나에게서 느껴지는 진심이 유더의 기분을 다소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지하감옥 3층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넓은 감옥을 꽉 메운 자들이 제각기 아우성치는 소리 때문에 귀가 아릴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중범죄자를 가두는 3층은 훨씬 조용했다. 물론 그건 창살로 칸막이를 친 옥에 나뉘어 갇힌 두 사람을 발견하기 전까지였다.
“네가 감히 나를 팔아먹다니! 네놈의 그 헛소리만 아니었더라도 내가 이곳에 갇힐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냐!”
“형님이야말로 머리가 돌아가는 수준이 고작 그 정도입니까? 형님이 어떤 천인공노할 짓을 했는지 내 반드시 잊지 않고 타인 공작 전하께 낱낱이 전할 테니 그리 아십시오!”
“타인 공작 전하께서 네 말 따윌 믿을 것 같으냐?”
“닥치십시오. 공작 전하의 신뢰는 제게 더 향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남작인 형님보다 저를 믿는다며 이 브로치까지 하사하셨는데 감히 그분의 뜻을 의심하십니까?”
“고작 브로치 하나로 유세를 떨어? 그분께서 내게 네놈의 멍청함을 한탄하며 일 처리를 잘 감시하라 몇 번이나 당부하셨는지……!”
철창 안에서 쉴 새 없이 싸워 대는 빌름 남작과 그의 동생을 본 칸나가 볼 근육을 씰룩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음, 흐흠. 굉장히 바빠 보이시네요.”
“정확히는 입만 바쁜 것이겠지. 시끄러우니 다른 쪽으로 지나가자고.”
키시아르가 매끄럽게 답하며 길을 꺾었다. 철창 너머로 손을 뻗어 몇 번쯤 서로 쥐어뜯은 듯 꼴이 엉망이던 두 사내가 그렇게 멀어져 갔다.
“단장님, 와 주셨군요.”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지하감옥 3층의 끝. 감추어진 4층의 입구가 존재하는 곳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에버와 코엘트 남작이 제각기 반가움과 긴장을 드러내며 인사를 했다. 유더는 에버와 눈인사를 짧게 나눈 뒤 키시아르와 대화를 나누는 코엘트 남작을 관찰하다, 문득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은……?’
이야기는 어제부터 들었지만 실제로 그의 얼굴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라 몰랐었는데, 보자마자 이전 생의 어떤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래. 분명해. 서부 임무 때 거의 유일하게 호의를 보여 주었던 그 사람.’
타이누의 영주 빌름 남작조차 도망치고 무너질 대로 무너져 가던 서부. 아무도 마병단원들을 환영하지도, 도우려 하지도 않았던 삭막한 곳에서 우연히도 그들을 만나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피난하던 중이었고, 유더는 그들이 도망쳐 나온 마을로 들어가 몬스터를 토벌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마병단원들을 꺼리던 다른 이들과 달리 그 사내는 전에 없이 정중한 태도로 쉴 만한 집이 남아 있는 곳과 유용한 지형지물의 정보를 알려 준 뒤 길을 떠났다.
그리고 마을 내를 점령하고 있던 몬스터들을 다 정리한 뒤 유더가 발견한 것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또다시 몬스터 떼를 만나 전멸한 그 남자의 일행이었다.
‘그때는 행색이 너무 초라해 귀족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통성명을 나누기는커녕, 몇 분이나 될까 싶은 시간 동안 마주쳤을 뿐인 짧은 인연. 그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 나온 촌장 정도쯤이라고만 여겼던 남자가 알고 보니 남작이었고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라 더욱 당혹스러웠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코엘트 남작에게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보다 더욱 확실하고 빠르게 그의 인간됨을 믿기로 했다.
“무엇을 발견했기에 그리 급히 연락을 보냈나, 코엘트 남작.”
“감옥 4층의 실제 용도와 역사를 알 만한 단서를 찾은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자세한 것은 내려가 직접 보심이 파악하시기 편하실 겁니다.”
이전 생과 달리 행색이 멀쩡한 코엘트 남작은 단정하고도 꼿꼿한 인상이 몹시도 학자답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안경 너머로 비친 눈동자와 흠잡을 곳 없이 바른 자세에서 강직한 성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키시아르의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비굴하게 자신을 낮추지 않았고, 반대로 에버나 유더, 칸나의 앞에서 저가 더 높은 듯 굴지도 않았다.
“좋아. 내려가지.”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코엘트 남작이 타인 가의 문장이 새겨진 벽 앞에 서서 손바닥을 대었다. 이미 한 번 칼로 그어 상처를 냈던 자리에서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덕에 곧 바닥과 벽이 움직이며 4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드러났다.
‘저곳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인 계단을 따라 모두가 내려오자마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등불을 든 에버가 앞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여긴… 위층과 좀 다르게 생겼네요.”
드디어 4층에 발을 디딘 칸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감옥 4층은 위층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무언가 달랐다. 일단 옥 앞을 가린 창살이 검은 쇠가 아니라 흰 돌이었고, 천장도 훨씬 낮았다.
각각의 감옥 안쪽 바닥에는 오래된 티가 나는 마법진이 하나씩 크게 그려져 있어 기이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했다. 그곳이 바로 감옥에 갇혀 있던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있던 장소인 모양이었다.
‘저 안에서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살 수 있었다고 했던가…….’
“이 앞에는 텅 빈 공간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저는 거기에도 분명 무언가 있으리라 생각하여 주변을 뒤져 보았습니다.”
코엘트 남작이 고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위에 있던 출입구와 같은 방식으로 작은 문장이 한쪽 벽에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지요. 거기에도 피를 묻혔더니…….”
그의 말과 동시에 말했던 바처럼 텅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지금은 한쪽 벽이 열려 안에 있던 다른 공간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누군가의 연구실이 드러났습니다.”
“연구실?”
“네. 아주 오래된 마법사의 연구실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