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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27화 (427/805)

427화

“황제 폐하께서…… 말씀입니까?”

“그래. 지병 때문에 갑작스레 발작이 일어나 쓰러졌다가 반나절 만에 겨우 눈을 뜨신 모양이야.”

유더의 눈빛에 복잡한 심경이 스쳤다. 케일루사 황제가 이전 생에서 지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난 시기까지 몇 달 남지 않았으니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전과 같았다면 서부에서 이미 죽었을 가케인도, 그 외 다른 마병단원들도 이번 생에는 모두 건강하고 멀쩡히 살아남았다. 이리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케일루사 황제의 죽음만은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다못해 암살 시도나, 미리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다른 요인에 의한 죽음이었다면 이미 해결하고도 남았을 텐데.’

“…라고 외부에는 발표되겠지만,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는 조금 다르지.”

생각에 잠겨 있던 동안 갑자기 이전의 말을 뒤집은 키시아르 때문에 유더는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예?”

“폐하의 지병은 내가 각성자가 되기 전까지 대외적으로 병약한 이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맥이 같다고 했던 것, 기억하나.”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느냐고, 붉은 눈동자가 고요히 물었다. 유더는 그 눈을 들여다보다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추측에 입을 열었다.

“설마, 황제 폐하의 상태가 더 나빠지신 게 아닙니까……?”

“…알 수 없지. 아직은.”

케일루사 황제는 예전의 키시아르가 그러했듯 그릇 문제로 나날이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키시아르는 황제를 위해 붉은 돌의 힘이 도움이 되리라 여겨 타이스 율만의 연구를 지원했다 말했으나, 여태까지는 관련하여 다른 소식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쓰러졌다는 것이 나쁜 소식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키시아르가 다시 한 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평소 갑옷처럼 두르던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 뜻을 알기 어려운 짙고도 깊은 그림자가 머물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한잔 마시고 잠들어야겠군. 함께 나누며 듣겠나?”

키시아르의 다양한 모습을 나름대로 보아 왔다 생각했으나, 지금과 같은 표정은 또 처음이었다. 유더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제가 감히 들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보좌가 듣지 못할 이야기는 없어. 다만 내 곁을 지키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가도 좋네.”

“그렇지 않습니다.”

단호한 부정에 키시아르가 그제야 눈을 조금 휘었다.

“…그래. 그러면 곁에서 이야기도 들어 주고, 대작 상대도 되어 주게.”

그는 곧 하인을 불러 술을 가져오라 명했다. 병과 잔이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키시아르는 투명한 독주를 직접 잔에 따라 한입에 모두 털어넣은 뒤 깔끔하게 내려놓았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술이 아니라 물을 마셨다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가 고통스러울 만큼 독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곳이라고는 불길을 막 당긴 등불처럼 일렁이기 시작한 눈동자뿐이었다.

“자, 보좌도 한 잔.”

유더는 키시아르가 따라 준 잔을 마찬가지로 물처럼 삼켰다. 그의 경우는 정말 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지만 키시아르는 흔쾌하게 웃었다.

“굳이 따라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속이 아프진 않고?”

“괜찮습니다.”

“혹 이 정도 술도 내 보좌가 취하지 않는 범위에 들어가나?”

“…네.”

“그렇다면 잘되었군.”

두 사람은 이후 주거니 받거니 몇 잔을 더 마셨다. 작은 잔으로 마셨음에도 오래지 않아 한 병이 동났다.

키시아르가 입을 연 건 두 번째 병을 열고서 첫 잔을 마셨을 때였다.

“폐하께서는 본디 나보다 그릇이 튼튼하셨지. 크게 무리하지 않으신다면 천수를 누리실 수 있으시리라고들 말했네. 그런 그분께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힘이 그릇을 버티지 못할 만큼 커진 탓에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가 아니야.”

그러면 왜 지금은 그리되었단 말인가.

유더의 시선을 마주한 키시아르가 서늘히 입술 끝을 올렸다.

“나와 폐하는 그것이 공작들의 술수라 생각하네.”

“생각하신다는 건…….”

“남은 증거가 없으니 말이야.”

“…….”

“폐하께서는 본디 후사를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에, 양자를 들일 생각을 갖고 계셨지. 공작가를 제외한 황가의 먼 방계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둔 아이가 있어 그 아이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었어.”

키시아르는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공작들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며, 정당한 경쟁을 통하여 가장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택해 모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리하여 결국 양자로 들어갈 황태자 자리를 두고 각 공작가와 황가의 방계들이 각기 후보를 내미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황태자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여 황제 측 후보가 승리한다면 누구도 두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황제는 결국 승인을 내렸다.

황태자 후보들은 몇 번의 시험을 치르며 치열히 싸웠다. 각 가문의 힘을 업은 아이들의 싸움은 때로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위험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자 후보들이 모두 참석하는 사냥 대회에서 마차 전복 사고가 크게 일어났다.

“명백히 폐하가 선택한 후보를 노린 사고였지. 그러나 두 분 폐하의 마차까지 휘말리는 바람에 사건이 크게 번졌어.”

본래대로라면 죽고도 남았을 사고였다. 그러나 황제는 절체절명의 순간 황후와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모두 짜내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살아남아 무사히 돌아왔고 케일루사 황제가 양자로 삼고 싶어 하였던 후보는 결국 죽고 말았다.

그리고 황제의 그릇 또한 손상을 입었다.

“그 뒤는 알고 있는 대로, 지금의 황태자와 디아카 가가 승리를 거머쥐고 그 자리에 섰네.”

그 사고를 일으킨 자들이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그릇 문제를 알고서 저지른 건 아니었겠지만, 결국 황제가 밖에 나올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궁극적으로는 큰 성공을 이룩한 셈이었다.

“그때 나는 펠레타에 있었기에 사정을 제대로 몰랐어. 각성자가 되어 몸이 낫고 나서야 형님께서 밖에 나올 수 없는 괴이한 지병을 핑계로 틀어박히신 이유를 알았지.”

황제가 바깥에 나가지 않고서 일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알면서도 그 외의 방법이 없었다. 디아카 가의 후보였던 카치안이 황태자가 된 이상 황궁 안에서조차 이제는 더 이상 방심할 수 없었다.

그때 각성자가 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키시아르는 그들에게 있어 잃어버린 줄 알았던 희망이 다시 돌아온 것과도 같았다.

“전에도 말했었지. 나는 붉은 돌의 힘이 나를 살렸듯, 폐하의 그릇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네. 각성자의 존재로 인해 세상이 급변하는 것도 어찌 보면 좋은 기회였으니까.”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는 붉은 돌을 보호하고 조사하는 한편,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다시 한 번 그들의 목표를 이룰 꿈을 꾸었다.

“이전에 타이스 율만이 붉은 돌에서 분리해 낸 힘을 넣은 마석들. 기억하나? 나는 그것을 폐하께 전해 드렸네.”

붉은 돌의 힘에 가까이 있을수록, 그리고 더 많이 노출될수록 각성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게 맞다면 케일루사 황제에게도 같은 기적이 찾아올 환경을 조성해야 했다. 때문에 그는 연구용으로 쓸 양을 제외한 대부분을 황제의 방에 넣고 한시도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넣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결과를 확인하기도 전에 돌아온 건 황제가 쓰러졌다는 한 통의 편지였다.

“…폐하께서는 인내심이 아주 강한 분이시지. 금이 간 그릇이 점차 무너져가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일을 놓지 않을 만큼.”

그런 그가 쓰러졌다는 건 이제는 그 인내에도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일까.

키시아르는 묵묵한 얼굴로 한 잔의 술을 더 마셨다.

“내가 보낸 선물이 효과를 보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나… 한 번 쓰러졌다 하여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지. 마음이 좋지는 않지만, 돌아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하고 싶군.”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유더는 제 앞에 놓인 술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도 폐하와 같은 과정을 겪으셨던 것이지요.”

키시아르의 손이 멈칫했다.

“……그래. 그랬지.”

“그렇다면 단장님이 보시기에,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 생각하십니까.”

직설적이고도 대담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려서 물을 만한 말재주는 유더에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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