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나단 주커만을 상대하느라 단시간에 능력을 많이 사용한 탓에 상태가 나빠진 것도 오랜 기절에 한몫했겠지.’
루산, 이논과 함께 호산라를 살핀 결과, 유더는 그가 아무래도 한동안은 능력을 제대로 쓰기 힘들 듯하다 판단했다. 이동 능력은 다른 능력들에 비해서도 특히 사용이 까다롭기로 이름난 편이었는데 그런 것을 몸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마구 써 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깨어나 혹시라도 탈출을 시도할 가능성에 대비해, 유더는 호산라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반드시 그와 손목을 함께 끈으로 엮어 두도록 부탁했다.
여태 직접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호산라가 타인과 함께 이동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와의 가까운 접촉이 필요했다. 그리고 유더가 이전 생에 만난 이동 능력자들의 경향으로 파악해 볼 때, 그건 즉 호산라가 능력을 사용할 때 접촉한 이는 능력을 쓴 본인의 의사 없이도 무조건 함께 이동 가능할 확률이 몹시 높다는 뜻이었다.
이동 능력자들은 대개 이동시킬 사람이 늘어날 때, 그리고 거리가 늘어날 때 그에 비례해 필요한 힘도 껑충 늘어난다고들 말했다.
호산라가 아무리 이 시기에 보기 드문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는 해도 저와 이어진 사람까지 데리고 먼 곳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 외에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칸나가 읽어 낸다면 좋겠는데…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군.’
이전 생에서는 카치안 황제의 명을 받은 마법사들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용 제압구와 마법사용 제압구의 구조를 바꾸어 각성자용 제압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었다. 카치안 황제가 유더에게 본격적으로 비밀 임무를 시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의 일이었다.
비록 시험을 위해 차 본 유더에게는 잘 통하지 않아 황제는 결과에 불만족스러워했지만, 본디 기사나 마법사용 제압구도 힘이 아주 강한 이들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 그런 물건이 있었다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제압해 두는 데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그때 그걸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관심을 좀 더 가져 볼 걸 그랬나.’
사실 아쉬운 것이 그뿐만은 아니었다. 이번 일이 계획한 대로 대부분 잘 끝났다지만, 거기에도 놓친 부분들은 존재했다.
나단 주커만이 내뿜은 소드마스터의 오러를 맞고 3층에서 떨어졌음에도 기어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 나한이나 숨겨진 의도가 그리 좋지는 않아 보이는 남국인 상인들, 그리고 이번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희생된 죄 없는 이들과 재산 피해는 또 어떠한가.
그 모든 것이 타인 공작과 빌름 남작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해서 마냥 안도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남국인 상인들도, 나한도 모두 이전 생에도 존재했던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전과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건 마병단이, 그리고 유더가 먼저 변화하여 그들을 만났기 때문일 터였다.
고작 한 사람의 변화로 바뀌었던 작은 것들이 점차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곳까지 이어지고 이어지며 멀리 확장되어 가는 감각.
이전 생의 유더가 알았던 일보다 어쩌면 그때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이제는 더 많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비하려면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파악하고 움직여야 했다.
이전보다 더 빠르게. 지금까지와도 다른 방식으로…….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그때, 겉옷을 벗어 둔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상념에서 막 벗어난 유더의 속눈썹이 깜박 흔들리는 모습을 훑었다.
“이번 일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이번 일이라. 오늘 누군가 파티 도중 우리가 밤새 휴게실에 있었다는 소문을 경망스레 입에 담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 그건가?”
예상치 못한 말에 유더는 순간 빠른 답을 하지 못했다.
오늘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을 보러 가기 전, 유더는 칸나를 악의적으로 내쫓은 기사를 찾아 빌름 남작저 대문에 거꾸로 매다는 일부터 수행했었다.
그때 그자가 그 소문을 고래고래 떠들며 악을 지르기는 했는데, 유더는 당연히도 그 말이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기에 한 톨의 신경도 쓰지 않고 머릿속에서 밀어낸 지 오래였다.
“……아뇨, 아닙니다. 그런데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키시아르는 분명 유더보다 훨씬 빨리 치안 관리단으로 향했을 텐데, 오늘 여기서 있었던 사소한 일을 어찌 알았는지 의문이었다.
“오는 길에 다른 이들이 어찌나 열심히 떠들어 대는지 모를 수가 없더군.”
“그랬군요.”
“아니라면 되었네. 그래서, 보좌는 어떤 일에 대해 생각했다고?”
유더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느리게 답했다.
“그냥, 다음에도 이런 임무가 생긴다면 어떤 대처를 준비해 두어야 할지… 그런 것들을 잠시 생각했을 뿐입니다.”
“흥미롭군. 어떤 대처가 필요하다 여겼는지 나도 듣고 싶은데.”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게 아니라면 더 편하게 말해 줄 수 있겠지?”
어떻게든 바라는 바를 성취하려는 능글맞은 말솜씨가 참으로 키시아르다웠다.
‘어차피 생각이 정리되면 키시아르에게 건의하려 했던 부분들이었으니 지금 해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단장님께서는 혹 마병단 지부를 만드시는 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부?”
“네. 기사단들도 규모가 큰 곳은 지역별로 지부를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마병단에도 지역별 지부가 있다면, 이번에 만난 나그란의 별처럼 고향을 떠나 도망쳐야 했을 만큼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먼저 파악하고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은 들은 것처럼 했다지만 실제로는 이전 생에 이미 했던 일들이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서부 사건이 거의 정리된 뒤 뒷수습을 위하여 몇 명의 서부 출신 단원들을 남기고 돌아왔다. 그는 단장 자리에서 물러나기 직전 그곳을 최초의 마병단 지부로 승격시켰고, 그것이 이후 전국에 거미줄처럼 설치된 수많은 지부들의 모태가 되었다.
타국의 부러움을 샀던 전국 각성자 관리력을 마병단이 일찌감치 갖출 수 있었던 건 키시아르가 처음에 만들어 두고 간 지부 체계가 흠잡을 곳 없이 깔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의 키시아르도 어쩌면 이미 그런 지부를 만들고자 생각해 두었을까.
유더는 입술 아래를 느리게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키시아르의 입에서 기다렸던 답이 흘러나왔다.
“재미있군. 사실 그 비슷한 걸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마병단을 만들 때부터 했었다네. 아니, 본래는 애초부터 지역별로 모집할 생각이었다 말하는 쪽이 맞겠지.”
“그러셨습니까?”
2대 단장조차 몰랐던 사실에 놀라자 키시아르가 씁쓸하고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하지만 내내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룰 수 없었어. 결국 타협안으로 수도에 먼저 작은 규모의 단을 창설하여 성과를 보인 뒤 재차 협상하자는 의견에 동의해야 했지. 모집 과정도 내 힘만으로 온전히 정할 수 없었고 말이야.”
“……몰랐습니다.”
마병단 입단 시험 때 2차가 되어서야 키시아르가 얼굴을 숨기고 시험관으로 동석한 것도 그 일환이었던 모양이었다. 단순히 단장이 아닌 척하고 사람들을 편하게 살피려던 목적만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얼굴에 해묵은 감정이 얼핏 스쳤다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시 한 번 재협상이 가능하겠지. 실은 수도로 돌아가 2차 단원 모집 시기를 당기면서 지역별 모집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보좌의 말대로 이곳에 먼저 지부를 만드는 것도 좋겠군.”
“정말이십니까?”
건의를 듣고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줄 알았는데, 결정이 놀랄 만큼 빨랐다. 게다가 2차 단원 모집을 앞당길 생각이기까지 했다니. 유더가 얼떨떨하게 반문하자 키시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온 김에 내일 당장 시작해 볼까. 이곳에서 체포한 나그란의 별이나 다른 이들을 조사하기에도 수도로 데려가는 것보다는 지부를 만들어 남기고 가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나? 그들에게든, 우리에게든 말이야. 아, 물론 호산라 그자만은 데려가야겠지만.”
“장소는 어디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침 치안관리단의 주인이었던 타이누 기사단 단장이 곧 자리를 비워 줄 예정이지. 임시 본부가 거기 있으니 처음부터 준비할 필요도 없고 딱 좋군. 이런 건 선점이 중요한 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키시아르가 화사하게 웃었다. 사사건건 마병단을 눈엣가시처럼 보던 타이누 기사단의 단장 제이머 필은 이번 일로 수년간 빌름 남작의 명에 따라 저질러 온 수많은 죄가 밝혀져 곧 해임당하고 재판장에 설 예정이었다.
“좋아 보입니다만… 혹 서부 사람들이 반대하지는 않겠습니까?”
“내가 오늘 마지막으로 만난 이가 코엘트 남작이라네. 슬쩍 운을 떼어 물어보니 타이누를 관리하는 가문으로 복귀하는 걸 거부하진 않을 것 같더군.”
여론이란 위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손쉽게도 달라진다. 빌름 남작가가 위에 서 있던 지금까지는 그의 뜻에 동의하던 이들이 득세했겠으나, 코엘트 남작가가 위에 선다면 여태 숨죽이고 있던 이들이 나서 의견을 내줄 터였다.
“다행이군요.”
“다행이지. 그리 되면 예정보다 더 빨리 돌아갈 수도 있을 텐데…….”
즐거운 얼굴로 무어라 계획을 더 말하려 했던 키시아르가 갑자기 창 쪽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날아든 작은 새들이 창을 부리로 두드리며 존재를 알렸다.
“수도에서 온 전서조군.”
문을 연 사내가 새 두 마리를 손가락에 앉혀 다시 돌아왔다. 그중 한 마리는 유더의 눈에도 상당히 익었다. 그건 마병단에서 보낸 새였다.
물을 달라 지저귀는 새들을 컵 근처에 앉힌 뒤 쪽지를 꺼낸 키시아르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쳐 봉인을 뜯고 빠르게 내용을 읽었다. 마병단에서 보낸 편지를 읽을 때는 지극히 평온했던 얼굴이 두 번째 편지를 본 순간 일변했다.
“단장님?”
“……아무래도 더 빨리 돌아갈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하겠어.”
“무슨 일입니까.”
손안에 편지를 쥔 키시아르의 눈빛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