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25화 (425/805)

425화

그 시각, 수도의 타인 공작가 본저.

평소였다면 이미 도박장으로 나가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으나 타인 공작은 아직도 자신의 서재를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리를 맴돌다가는 진정하려는 듯 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지만 시선은 한시도 쉬지 않고 불안정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이토록 불안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미 모든 일이 끝났을 텐데도 서부에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빌름 남작도, 충직한 남국인 상인들도 누구 하나 소식이 없었다. 빌름 가와 연결된 연락 마도구를 가동시키기 위해 마법사까지 불러왔는데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비록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다고는 하나, 달리 말하자면 하루나 지난 것이다. 초조함을 참지 못한 공작은 결국 가문의 문장을 새겨 만든 짧은 담뱃대에 연초를 채웠다. 그가 막 불을 붙이려 했던 순간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전하, 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장 들여라!”

손님이 방문했다는 말에 잠시 환해졌던 그의 눈빛이 안에 들어선 이들을 본 순간 정반대로 일그러졌다. 기다렸던 이들이 아닌 탓이었다.

“……테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이 시간에 기별도 없이 무슨 일로 왔지?”

“이런, 전하.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집사는 그런 말을 하지 않던데… 바쁘시다면 다음에 다시 뵙는 쪽이 좋을지요?”

테오라도 황궁 기사단장의 곁에 서 있던 나이 든 노인이 짐짓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타인 공작의 먼 친척 중 한 사람으로, 전전대 공작의 곁에서 많은 일을 함께한 이라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자였다. 은퇴 후 남부의 별장에서 여생을 보내는 중이었다 들었는데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노인 외에도 테오라도와 함께 온 이들 모두가 타인 가의 일원들이었다.

이리 많은 이들이 왜 갑자기 한꺼번에 이곳까지 몰려왔는가.

그리 좋지 않은 예감이 찾아들었으나 공작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되었어. 들어오도록.”

허락과 함께 열이 넘는 이들이 일제히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타인 공작은 그들의 끝에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둘 발견했다.

공작을 닮은 붉은 머리칼을 지닌 두 젊은 남녀가 공작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프루엘레, 프리실라? 너희들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냐.”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희가 본저에 못 올 이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프루엘레가 흠잡을 곳 없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수도에 살면서도 타인 공작과 그의 자식들은 한집에 살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3구역의 다른 저택에서 남처럼 살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타인 가의 다른 이들과 함께 온 게 이상하지 않다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타인 공작은 테오라도와 다른 이들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의문과 경계심이 가득 찼다.

“공작 전하. 저희는 오늘 당신께서 몇 년 사이 타국의 사기꾼들에게 홀려 가문의 위신과 재정 상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으셨다는 가문 일각의 목소리에 대한 답을 듣고자 여기까지 왔습니다.”

공작의 눈빛을 마주한 노인이 조용히 답했다.

“처음에는 그저 뜬소문이길 바랐습니다만, 알아보니 정말로 타인 가의 가장 중요한 재산 절반 이상이 동의도 없이 담보로 잡혀 있거나 이미 넘어가 처분된 상태더군요.”

가문을 위해 일해야 할 정예 기사들은 몬스터 발생이 일어날 시기에 서부가 아니라 공작의 사업을 위한 의미 없는 장소에서 대부분 발이 묶여 있었고, 대대로 재산을 관리해 온 이들도 상당수가 몇 년 사이 갑자기 쫓겨났다. 그 외에도 타인 공작이 마음대로 휘두른 일들이 노인의 입에서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 건방진. 가문의 주인인 내가 하는 일을 감히 뒤에서 파헤쳤다고?”

공작이 날카롭게 반문했다.

“어이가 없군. 누구의 말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으나 내 사업에 대해 왈가왈부하러 온 거라면 당장 나가게!”

“해 주실 답은 그뿐이십니까?”

“답이고 뭐고, 내가 왜 자네들에게 이따위 모욕을 들어야 하느냔 말이야. 쫓겨난 자들이 그리 말하던가? 테오라도. 사정을 알고 있을 너까지 그 말을 믿고 동참한 거라면 정말 실망이 크구나. 아이들을 데려온 것도 너인가?”

테오라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이가 옆으로 나서서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저분들을 데려온 건 그 누구도 아닙니다. 그 반대이지요. 저분들께서 저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직접 불러 모으신 것입니다.”

“…누가, 불러?”

타인 공작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타인 가의 주인이신 분께서 가문의 전통과 법도를 모르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공작 전하께서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육체와 정신이 위중한 상태에 빠지셨다 판단될 경우, 그 후계자 자격을 지닌 분들께서는 저희를 소집할 수 있으시지요.”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프리실라 2공녀를 차기 후계자로 결정하는 회의가 열릴 것입니다.”

“……뭐?”

연속으로 이어지는 말에 타인 공작은 말을 잃었다. 깊은 충격을 받은 공작의 시선이 프루엘레와 그 곁에 선 딸 프리실라에게로 향했다. 분노로 가득한 눈이 자식들의 얼굴을 낯설게 훑었다.

“나는 들은 적도, 동의한 적도 없는 회의를 열겠다니 무슨 소리냐. 너희들이 대체 무얼 안다고 이따위 짓을……!”

“알 만큼은 압니다, 아버지.”

프루엘레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지금 서부에서 날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 답이 결코 도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지요. 저 외에도 모두 말입니다.”

프루엘레가 동생의 어깨를 상냥하게 두드리며 웃었다. 긴 적발을 단정히 묶은 프리실라가 당당히 선 채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미쳤구나, 프루엘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미친 건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실지요. 제가 얼마 전 서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그곳에서 본 것들을 생각하면 저는 아직도 아버지가 어찌 이리 되셨는지 슬픔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그리 말하며 웃는 아들을 본 순간 심장이 미친 듯 크게 뛰어 댔다. 공작은 처음으로 제 자식들이 여태 인식하고 있던 그 작고 존재감 없는 꼬맹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아버지보다 키가 커진 아들과, 마주친 것만으로도 오싹한 눈빛을 할 줄 알게 된 딸.

알고 있다 생각했던 모든 것이 일시에 뒤집히는 감각에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타인 공작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때, 또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며 들어선 이들은 몇 년간 태양궁에서 벗어난 적이 없던 황제 직속 근위대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낯선 검은색 제복을 걸친 이들 또한 들어섰다.

당혹한 타인 공작과 달리, 다른 이들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이 올 줄 이미 알고 있던 듯한 모습이었다.

“타인 공작 전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전서입니다.”

타인 공작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감히 제국을 어지럽히려 한 남국인 출신 각성자들이 타인 공작과 함께 일을 모의했다는 정보가 입수된 바, 각성자와 관련된 일을 조사할 우선권을 지닌 마병단을 보내려 하니 막지 말라는 간결하고도 짧은 명이 담겨 있었다.

명을 시행할 시기는, 타인 공작이 그것을 확인한 즉시로 지정된 상태였다.

“……각성자? 대체 누가 각성자라는 거냐.”

“확인하셨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

타인 공작의 중얼거림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근위대가 고개를 숙이며 검은 제복을 걸친 이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타인 공작 전하. 저는 마병단 소속 술과 부단장 스티버 렌들리입니다. 지금부터 황제 폐하와 단장님의 명을 받들고자 귀하신 분을 잠시 모실 테니, 부디 실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나는 허락한 적이 없다. 대체 누가 각성자이며, 누가 나를 조사한단 말이냐! 당장 이놈들을 막아라, 테오라도! 테오!”

테오라도의 이름을 찢어지게 부르는 공작의 목소리가 거대한 저택 안을 울리며 흩어졌다.

그러나 그를 위해 달려와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조사는 모두 잘 끝내셨습니까?”

“그래. 예상대로 영양가 있는 말이 별로 없어서 빨리 끝났지.”

유더는 예상보다 빠르게 치안 관리단에서 돌아온 키시아르의 얼굴을 살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진 다음날, 그들은 누구보다 바쁜 하루를 보냈다.

키시아르가 치안 관리단에서 잡혀 들어온 귀족들을 불러다 조사하는 동안, 유더는 나그란의 별과 남국인 상인들이 데려온 일꾼들을 살폈다. 일꾼들은 남국인 상인들에 대해 아는 정보가 거의 없어 소득이 적었지만 나그란의 별 쪽은 조금 달랐다.

무려 그동안 그토록 애를 먹이던 이동능력자 호산라를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할 만했다.

‘비록 전부 다 잠든 모습뿐이긴 했지만.’

호산라는 글레힘 빌름을 죽이려 홀로 들어선 방에서, 그와 바꿔치기해 침대 안에 몰래 들어가 있던 핀 엘더의 변신 모습을 보고 놀라 까무러쳤다. 그 틈을 타 손쉽게 제압된 건 좋았지만 그때 핀이 퍼부은 수면제가 지나치게 많았는지 아직도 기절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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