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24화 (424/805)

424화

“많이 지쳐 보이는데, 포도주라도 마시겠나?”

빌름 남작은 키시아르가 들어 보인 잔을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목이 바짝바짝 탔지만 그보다는 이 상황에 대해 무어라도 더 알아내는 쪽이 중요했다.

“되었습니다. 그보다 공작 전하. 제가 어째서 이곳에 갇히게 된 것입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자선 파티장에 있었어야 할 자네가 어째서 어젯밤 이곳에 침입한 괴한들과 함께 있었던 거지?”

키시아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타이누를 관리하는 제가 치안 관리단에 온 것이 무어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급한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고 이곳에 왔다가 그자들과 마주친 것뿐입니다.”

“급한 일이라.”

키시아르가 빌름 남작의 말을 반복하여 되뇌었다.

“그것이 자네가 하인과 함께 감옥에서 데리고 나왔다던 다른 이들과도 관련이 있는가? 이야기를 들어본 바에 의하면 그들은 아무 죄도 없이 오랫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다던데.”

그건 노예로 팔아넘기기 위해 가두어 두었던 ‘말’들에 대한 질문이었다. 남국인 상인에게 제대로 넘기기만 했어도 그 이상 신경 쓸 일조차 없었을 자들.

‘역시 그것 때문에 나를 가둔 것인가.’

빌름 남작은 잠시 마른 침을 삼킨 뒤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생각한 변명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지금 설마 공작 전하와 마병단을 누구보다 성심을 다해 모신 저보다 그 죄수들의 말을 믿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자들은 타국에서 제국으로 몰래 들어오려 한 범죄자들입니다! 제가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그자들이 괴한들과 더불어 손을 잡고 탈출을 시도한 것입니다. 저는 어젯밤 그자들의 손에 죽을 뻔했단 말입니다!”

어찌 사실 관계를 양측에 모두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자신을 다짜고짜 옥에 가둘 수 있는가. 이 일이 알려지면 마병단의 명예는 곧바로 물거품처럼 꺼질 것이며, 책임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침을 튀기며 외친 남작은 숨을 몰아쉬며 겨우 입을 다물었다.

남작의 말을 모두 들은 키시아르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타이누 기사단과 마병단에게도 알리지 않고 파티 도중 이곳에 혼자 와야만 한 그 급한 일이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나 침입자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하필 자네가 이곳에 왔을 때 아주 우연히도 그자들이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괴한들은 그것을 도우러 왔던 것뿐이다?”

이쯤 했으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일 줄 알았는데, 자꾸만 무언가를 확인하듯 되묻는 펠레타 공작의 웃는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지나치게 여유로운 그 모습에 빌름 남작은 스멀스멀 뒷덜미를 타고 오르는 까닭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그러면 그토록 급했던 그 일이란 건 대체 무엇이었나?”

“그것은… 타이누 내부의 기밀입니다. 타인 공작 전하의 말씀 없이는 외부에 발설할 수 없습니다.”

“그래? 내가 그 답을 알 것 같다 해도?”

빌름 남작은 뜻이 분명치 않은 질문으로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뜻을 전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키시아르가 곁에 아무렇지 않게 쌓아 두고 있던 어떤 서류뭉치를 들어 보란 듯 펄럭이며 넘기기 시작한 게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 말할 수 있었을 터였다.

‘……저건?’

서류의 앞에 쓰인 글을 본 빌름 남작은 대경실색하여 그대로 벌린 입을 멈추고 말았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건 분명 경매장을 위해 마련한 명단이었다.

직접 확인하고 승인까지 했으니 몰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펠레타 공작의 손에 저 명단이 들어간 것인가?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기절한 채 감옥으로 실려 들어오던 아페토 가의 귀족들이 떠오르며 일순 소름이 끼친 빌름 남작의 핏발 선 시선을 느낀 듯 눈을 든 키시아르가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어젯밤 자네가 이곳에서 잡힌 직후, 파티장을 비롯하여 근처에 있는 오래된 저택에도 괴한들이 침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네. 타이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달려간 나의 충직한 단원들은 그곳에서 너무나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고 말았어. 무려 서부의 고명한 이들이 수도 없이 모여 제국의 법을 면전에서 어기는 불법 경매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겠나?”

“파, 파티장에도 괴한들이 침입했다는 말씀입니까? 제 가족들은 괜찮습니까? 손님들은 어떻게…….”

“어떤 이들은 괴한들의 손에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으나, 자네의 부인과 딸들은 다행히 무사해.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네.”

“중요치 않다니요!”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린 게 무색하게도, 키시아르는 손에 든 종이 뭉치를 다시 펼쳤다.

“나는 자네가 이 서류에 적힌 것들과 몹시 밀접한 이유로 어젯밤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거든. 내 추측이 틀리다면 말해 주겠나?”

남작은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평소 매끄럽게 잘 돌아가던 잔머리조차 이 순간에는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지끈거려 그저 앉고만 싶었지만 이곳에는 제가 앉을 의자조차 없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직 자기 자신뿐인 상황에 빌름 남작은 익숙지 않았다.

‘무조건 잡아떼어야 한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펠레타 공작이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타인 가와는 관련 없는 일로 만들어야 했다. 일을 실패한 건 그렇다 쳐도 타인 공작과 조금의 관련이라도 생기게 만드는 순간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서류에 무엇이 적혔는지도 모릅니다. 하물며 경매라니요?”

“그곳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자네의 이름을 말하던데, 그래도 모르겠나?”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이 명단 안에는 경매를 준비한 이들의 이름 또한 자세히 적혀 있네. 자네의 이름은 없지만, 자네와 관련된 붉은사슴 상단의 이름과 승인 도장은 가장 위쪽에 찍혀 있지. 이런데도 계속 모른다고 말하겠는가?”

“그 상단 쪽은 어디까지나 글레힘이 맡은 일이었기에, 저는 정말로 잘 모릅니다. 상단이 문제라면 글레힘을 먼저 잡아 가두셔야 하는 일이 아닌지요?”

“흠.”

그제야 펠레타 공작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빌름 남작의 부인과 딸들은 무사하다 말하였으나, 각성자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이후 정신이 쇠약해져 남작의 저택에 머물던 글레힘 빌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휘말려 무슨 일을 당한 것일까? 혹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죽지 않았더라도 그는 붉은사슴 상단과 가장 깊이 관련된 자이자 빌름 남작과 일을 함께 하던 유일한 혈육이기도 했다.

그리 생각한 순간 남작의 머릿속에 이 일을 떠넘기기 가장 좋은 상대는 자신의 동생 글레힘이라는 판단이 번개처럼 섰다. 땀에 젖은 남작의 눈빛이 빛났다.

“불행한 일을 당한 동생이라 여겨 아무것도 묻지 않고 거두었으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이 요즘 들어 제게도 비밀로 하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짓을 하는 듯하기는 했습니다.”

그게 모두 형인 자신의 눈을 피해 불법 경매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한참 주장한 뒤에 빌름 남작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사적인 욕심을 위해 일한 적이 없습니다. 타이누에서 그런 간악무도한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았더라면 저를 믿고 이곳의 일을 맡겨 주신 타인 공작 전하를 위해서라도 이미 뿌리를 뽑았을 것입니다.”

하필 제가 일을 하기 위해 급히 나선 때를 노려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진 건 분명 누군가의 모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모함에는 분명 제 동생 글레힘 빌름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앞뒤가 참으로 잘 들어맞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사실은 사실 아닌가. 타인 공작을 위하여 일하였을 뿐, 나를 위하여 일한 적이 없는데 어찌 나에게 죄를 묻겠나.’

동생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일단 자신과 타인 공작이 먼저 살고 봐야 할 일이 아닌가. 일이 일이니만큼 동생이 죄를 뒤집어쓰고 책임지겠다는 뜻을 밝히면 타인 공작도 그를 못 본 체하지는 않을 터였다.

모두를 위해서, 역시 그편이 최선이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글레힘을 제가 직접 심문하여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타인 공작 전하의 신뢰를 배반한 그 녀석을…….”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한창 말을 잇던 도중 들려온 키시아르의 질문에, 빌름 남작은 멈칫 굳었다. 이어진 문을 열고서 병사들에게 부축당하듯 이끌려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방금까지 그가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했던 바로 그 동생, 글레힘 빌름이었다.

거멓게 물든 눈이 형형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을 보며 남작은 일순 숨을 삼켰다. 목이 졸린 듯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글레힘.”

“경매장에 있던 다른 이들과 더불어 자네의 동생 또한 오늘 새벽 같은 자리에 서서 모든 일이 자네의 지시 때문이라 증언하던데. 둘 중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

“…….”

남작의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글레힘 빌름은 어젯밤 본래 머물던 본저에서 마병단의 손에 의해 별저로 빼돌림당한 뒤, 사제 루산의 뛰어난 신성력을 받고서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찾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형제는 참으로 거울처럼 똑같은 판단을 내려 서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했다. 키시아르는 서로 닮은 얼굴을 한 채 굳어 있는 형제를 바라보며 친절한 미소를 보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조사가 진행되기 힘들 듯해 잠시 시간을 줄 테니, 형제끼리 대화를 잘 나누어 보게.”

옥에서 말이네. 펠레타 공작이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병사들이 두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빌름 남작은 머리를 내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타인 공작 전하께서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두고 보시리라 생각지 마십시오!”

“그래. 나도 이 소식을 들은 타인 공작의 반응이 기대되는군.”

키시아르가 미소와 함께 태연하게 대답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