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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23화 (423/805)

423화

빌름 남작의 저택에 침입한 이들이 모두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던 키시아르의 앞에서 목청을 높인 귀족들과, 그 사이에서 드문 태도로 시선을 끌었다는 한 사람.

유더는 코엘트 남작이란 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키시아르의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보며 그가 남작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관심을 품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일을 마무리한 뒤 다른 귀족들을 슬쩍 찔러 그자에 대해 알아보았다네. 그랬더니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나.”

키시아르의 눈빛에서 어서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물어보아 달라는 기색이 강하게 느껴졌다. 유더는 그가 바라는 대로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하군요.”

“코엘트 남작가는 사실 빌름 남작가처럼 타인 공작가의 방계 중 한 곳이었어.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빌름 남작가와 더불어 타이누와 서부 곳곳을 관리하던 가문이었다더군.”

두 가문은 한때 타인 공작가와 함께 사이좋게 힘을 합쳐 서부를 이끌어 나가던 명문가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빌름 남작가가 홀로 권력을 독차지할 욕심을 키우게 되면서 그들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졌다. 전대 타인 공작의 시대쯤 이르러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고, 결국 코엘트 남작가는 본래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타이누를 오랫동안 관리하던 가문의 명성은 여전히 건재했다. 코엘트 남작가는 몰락한 후에도 서부를 위하여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현 코엘트 남작은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대대로 꾸준히 해 오던 영세한 신전들의 후원을 계속했고, 고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손 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는 제법 명성 높은 학자이기도 했다.

빌름 남작은 그런 그가 아직도 타이누에서 뭐나 된 줄 안다며 사석에서 자주 분통을 터트렸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교류를 아주 끊기보다는 이런 자리에 불러 면박을 주는 쪽을 더욱 즐겼다 하더군. 사실 무시당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온 것을 보면 코엘트 남작도 보통 고지식한 자가 아니기는 하지.”

코엘트 남작이 고지식하다 말하면서도 키시아르의 눈빛 속에는 마음에 드는 인재를 만난 이다운 감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그래 보이나?”

미소를 지은 키시아르가 앉아 있던 의자 등에 괸 팔을 움직여 유더의 앞머리칼을 쓸었다.

“맞아. 나는 그런 자들을 좋아하지. 그것도 아주.”

“…….”

그가 언급한 ‘그런 자들’에는 유더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을 숨기지도 않는 솔직한 눈빛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이 갑자기 묘하게 들린 탓에 유더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기울이며 보란 듯 방긋방긋 웃던 사내가 그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몹시 흡족해했다.

“아무튼, 그래. 나는 사실 코엘트 남작이 프루엘레 반 타인의 비밀정보 출처 중 한 곳이 아닐까도 생각 중이네. 그 부분은 좀 더 알아보면 확실해지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높겠군요.”

프루엘레는 그간 이곳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연을 맺은 타이누의 지인들을 통하여 많은 정보를 얻어 왔었다. 정확히 누가 알려 주었는지까지는 비밀로 했지만 지금껏 그가 알아 온 정보의 높은 질과 빠른 속도를 보아서는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의 도움을 받은 건 아닐 확률이 컸다.

“그러면 그분에 대해 좀 더 알아내신 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써먹어야지.”

키시아르가 즉답했다.

“마침 빌름 남작의 손이 떠난 뒤 서부에서 일해 줄 이로 어떤 이를 추천해야 할지 굉장히 망설이던 중이었거든. 폐하께 보낼 편지에 쓸 이름이 없어 면목이 없었는데 이제야 자신 있게 답을 쓸 수 있을 듯해 얼마나 기쁜지.”

붉은 눈 속에 만족스러운 감정이 넘쳐흘렀다. 유더는 그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것까지도 이전 생과는 정말 완전히 달라지는군.’

이전 생의 서부는 몬스터의 대량 발생 때문에 산산이 부서졌다. 서부를 무역으로 다시 재건하겠다던 카치안 황제의 정책이 실패한 탓에 회복은 한없이 더뎌졌고, 그 정책으로 돈을 번 소수의 귀족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삶의 터전과 재산을 잃는 처지가 되었다.

사정이 어려워진 이들이 많아진 서부는 이후 골칫덩어리 같은 범죄의 온상지로 전락했다. 서부에서 대대로 살던 귀족들조차 관리를 어려워하니, 새로이 그 일에 자원하려 드는 이를 찾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타이누는 정도가 심했다. 타인 공작이 자신의 본영지인 타이누를 대신 관리해 줄 적절한 인물을 찾지 못하여 골치를 썩는다는 말이 잊을 만하면 들려오고는 했다.

그건 지금과 달리 그때의 타인 공작가가 서부에서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코엘트 남작 같은 이가 대신 타이누를 관리하게 된다면, 프루엘레의 동생이 이어받을 타인 공작가와 더불어 그때보다 훨씬 좋은 곳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곳에는 몬스터의 침략도, 부서진 도시도, 그리고 이득에 눈이 멀어 무엇이든 사고 팔려 하는 자들도 없을 테니까.

“…그렇군요. 그렇게 된다면 이곳 분들에게는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유더는 비로소 오랫동안 어깨를 누르던 돌이 조금 가벼워진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입술 끝을 올렸다.

“서부에 정이 그간 굉장히 많이 든 모양이군? 그리 기뻐하는 것을 보니.”

키시아르가 나직하게 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고요히 맞부딪쳤다.

‘아. 그렇군.’

유더는 자신이 느끼는 기쁨의 진정한 원인을 지금의 키시아르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새삼스레 깨달았다.

당연한 일임에도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느껴지며 기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그런 모양입니다.”

붉은 눈동자가 평정을 되찾은 입술 끝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거기 누구 없느냐? 날 꺼내 다오!”

치안 관리단의 지하감옥 3층에 갇힌 빌름 남작은 밤새도록 목청이 터져라 외쳤음에도 아무도 오지 않는 상황에 다소 기가 꺾인 상태였다.

어젯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끔찍했다. 타인 공작이 맡긴 ‘말’들을 이동시키려던 찰나 나타나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괴한들, 저를 두고 도망친 배은망덕한 남국인 상인, 그리고 서슴없이 자신을 기절시켜 이곳에 처넣은 마병단.

그중 가장 남작을 분노케 한 건 당연히 마지막 쪽이었다.

“빌어먹을 천한 놈들. 어떻게 감히 나를 여기에……!”

다소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자신은 이 타이누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자이자 귀족이었다. 조사를 받을 만한 상황이라 해도 당장은 집에 돌려보내 주는 쪽이 이치에 맞았다. 이런 대접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최악이었다.

남작은 이곳에서 나가는 즉시 할 말들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들어 줄 상대가 없는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노력이었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 옥이 너무 추웠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드나든 곳인데도 이 옥이 이토록 추운 줄 전에는 알지 못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새는지 아무리 망토를 여며도 냉기가 가시지 않았고, 침구로 쓸 만한 짚 하나 없는 돌바닥은 닿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아프고 딱딱했다. 돌아다니는 병사 하나 보이지 않아 소리를 지르고 또 질러도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물어볼 만한 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타인 공작께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경매는 제가 없어도 어떻게든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설령 마병단 놈들이 ‘말’들을 잡아다 저에 대해 들었다 해도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그까짓 평민들의 말 따위로 감히 제게 이래서는 안 되었다.

‘타인 공작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기만 한다면…….’

몸을 웅크린 채 떨면서 오직 그 생각만 하고 있던 찰나, 드디어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들려오는 발소리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흠칫 몸을 떤 남작은 재빨리 창살을 붙잡고 고래고래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갇힌 곳으로 다가온 이들을 확인한 빌름 남작은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이, 이게 무슨……?”

“…….”

반쯤 기절한 채 흙투성이가 되어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온 이들은 빌름 남작이 아는 자들이었다.

아페토 가의 방계 출신 귀족들로, 최근 수도에서 생긴 불미스런 일로 인해 잠시 몸을 피하여 타이누에 머물던 자들. 분명 어제 경매에 오기로 했었던 이들이 왜 저런 꼴이 되어 여기로 왔단 말인가?

빌름 남작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들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다른 구역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옥에 그들을 가둔 병사들이 다시 되돌아왔다. 남작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철창을 흔들었다.

“이봐! 이보거라! 어서 나를 풀어 다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나는 빌름 남작가의 주인이다!”

그러자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한 병사가 냉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기다리시면 차례가 될 테니 다른 이들이 올 것입니다.”

“뭐? 기다려? 무얼 기다리란 말이냐! 풀어 달라니까! 펠레타 공작께서는, 아니. 타이누 기사단장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가 여기에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 오질 않아!”

역정을 내는 그를 내려다보던 병사들이 이내 대답조차 해 주지 않고서 걸음을 옮겨 사라져 갔다.

제가 주는 돈을 받고 사는 놈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기가 막혀 어서 돌아오라 외쳤지만 그들의 발소리는 순식간에 멀리 사라졌다. 남작은 다시 홀로 남겨졌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는데, 알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신경을 미치도록 갉아먹었다.

남작은 불안함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경으로 창살을 움켜쥐었다.

그가 다른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감옥을 나선 건 그로부터 영겁 같은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이런. 하룻밤만에 꼴이 말이 아니군.”

취조를 위해 마련된 치안관리단 내부의 공간을 방만한 자세로 차지하고 앉아 있던 펠레타 공작이 빌름 남작을 돌아보며 실로 불길하고도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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