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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21화 (421/805)

421화

몇 발자국 앞서 나가던 에버의 시선이 유더가 보고 있는 이들 쪽을 향해 움직였다.

“저 사람들은 왜요?”

아무래도 그녀는 아페토 가 재판 때 보았던 자들의 얼굴까지는 다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저자들은 아페토 가의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재판 때 나왔던 대리인들, 기억합니까?”

“첫 번째 재판요? ……어? 그러고 보니 낯이 좀 익네요?”

그제야 에버의 얼굴에도 몹시 반가운 자들을 만난 이다운 웃음이 피어났다.

“세상에. 저 사람들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아봤어요?”

유더는 그들이 경매장에 늦게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찔리는 게 많아서 서부까지 도망쳐 왔나 보네요. 그런데도 당당히 여기에 올 생각을 다 하다니……. 이렇게 고맙고 반가울 수가.”

실로 동감이었다.

“저 사람들은 특별히 다른 곳에 격리해 가둬 두어야겠네요.”

그리고 잘만 하면 저들을 통해서 재판을 피해 도망친 다른 아페토 가 사람들의 꼬리도 잡을 수 있으리라. 몹시 즐거워하는 에버를 향해 유더는 작은 부탁을 하나 했다.

“그 전에, 저들을 잠깐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요?”

고개를 끄덕이는 유더의 모습을 본 에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슬쩍 마병단원들을 향해 손을 올렸다. 놓아주라는 수신호를 받은 단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슬쩍 손에서 힘을 풀자마자 아페토 가의 도망자들이 황급히 꽁지가 빠져라 정원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하려고요?”

“다른 이들은 먼저 치안 관리단으로 옮기되, 저자들만은 스스로 잡아 달라고 빌 때까지 대충 쫓는 척만 하고 내버려 두십시오.”

경매장을 둘러싼 거대한 정원은 이미 유더의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슬쩍 손을 아래로 뻗으며 땅의 힘을 움직이자 멀리서 육중한 울림이 발을 통해 우르릉거리며 울렸다.

“뭘 한 거죠?”

“정원의 구조를 조금 바꿨습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탈출로는 이미 다 막아 둔 상황이지만 유더는 거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미로를 조성해 두기로 했다.

이제 아페토의 도망자들은 저 안에서 태어나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들을 마주하게 되리라.

아무리 도망치고 도망쳐도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결국에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재차 쫓기는 공포를 저 귀한 이들이 과연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힘든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육신이 비명을 질러도 시중을 들어줄 이 따윈 이제 없다. 보드라운 옷이 찢어지도록 바닥을 기고 진창이 된 진흙 구덩이를 헤치며 울부짖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재판장에서 한없이 잘 돌아가던 세 치 혀는 저 정원 안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비참한 꼴이 되어 스스로 드높은 자존심을 꺾고서 제발 잡아가 달라고 빌 때까지 내버려 두라는 뜻을 알아차린 에버가 눈을 빛내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사냥당하는 기분을 맛보게 해 주겠단 거군요! 그냥 혼내 주는 것보다 훨씬 좋네요!”

에버는 즉시 단원 몇 명을 불러들여 상황을 설명하고 아페토 가의 도망자들을 적당히 쫓는 일을 맡겼다. 감히 재판에서 단장님을 모욕한 자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단원들은 순식간에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빠르게 정보를 전해 들은 다른 단원들도 주변에서 몰려들어 너도나도 참여하고 싶다고 손을 드는 통에, 결국에는 순서를 정하기 위한 토론과 싸움까지 벌어졌다.

누구 한 사람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더 도망자들을 잘 쫓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치열하게 싸워 대는 모습을 보면서, 유더는 그들이 처음 마병단에 들어왔던 때와는 어느새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키시아르를 진심으로 따르며 그를 위한 일에 망설임 없이 나서는 모습들이 제법 보기 좋기도 했다.

“아쉽네요. 유더가 만든 미로에서 사냥감 몰이하는 재미를 저도 느끼고 싶었는데.”

에버가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경매장 안으로 들어서서 떨어지고 부서진 물건들로 엉망이 된 복도를 걸었다.

“칸나는 창고가 있는 후문 쪽에 있어요.”

칸나와 로벨이 잡아들인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나 남국인 상인들을 따르던 일꾼들은 혹시 모를 위험 사태에 대비해 귀빈들과 같이 두지 않았다. 이송도 따로 하고, 가두는 장소도 따로 둘 예정이었다.

“칸나!”

“에버 언니, 유더!”

푸른 지붕을 올린 창고 앞에 나와 있던 칸나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곁에는 목과 팔에 천을 감은 로벨이 서 있었다. 유더는 그 뒤에서 마병단원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 십수 명의 낯선 사람들을 주의 깊게 훑으며 입을 열었다.

“로벨이 다쳤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저 녀석들에게서 명단을 사수하려다가 좀 스쳤을 뿐입니다. 명단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무사히 가져왔으니 걱정 마세요.”

로벨이 머쓱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칸나는 전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들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저 사람들이 자기 몸이 상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달려드는 바람에 좀 위험할 뻔했었는데, 로벨 씨가 도와주셨어. 그러다가 다친 거야.”

칸나와 로벨은 본래 명단을 먼저 찾아내고 나서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명단을 찾아냄과 동시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여겨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나그란의 별과 마주쳤고, 서로를 알아본 두 집단 사이에 대치가 벌어졌다.

하필 그때는 칸나와 로벨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이 잠시 흩어져 있던 상태였다. 가장 전투 능력이 떨어지던 두 사람만의 힘으로 명단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로벨은 자신을 알아보고서 아직 살아 있었느냐며 조롱하는 과거의 동료들에게 달려들어 싸우려 했다. 그들에게서 나한의 행방을 알아내어 마티의 복수를 하고 싶다는 일념이 미친 듯 치솟아 머릿속을 검게 만들었다.

하지만 분명 모르는 사이일 마티에 대한 정보를 큰소리로 외치는 칸나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일이 망할 바에야 차라리 이곳에서 자폭하겠다는 일념으로 힘을 발휘하는 나그란의 별 각성자 한 명을 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유더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도 몸을 던져 능력을 발휘했다.

본래는 바람을 약간 다룰 수 있다 여겼던 그의 미약한 능력은 그 순간 전에 없던 일을 일으켰다. 로벨은 무너지는 계단 아래로 추락할 뻔했던 칸나와 명단, 그리고 폭발 능력을 발휘하려 한 각성자까지 모두 모두 공중에 띄워 멀리 떨어트려 두는 데 성공했다.

대신 그가 파편과 공격에 맞아 굴러 떨어지면서 부상을 입었으나, 칸나는 무사히 명단을 지키고 동료 단원들과 합류해 나머지 나그란의 별을 모두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칸나 부단장님이 그때 마티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전 아마 유더 님의 말도 떠올리지 못한 채 복수만 하려다 일을 망쳤을 겁니다. 제 능력의 진짜 활용법도 깨닫지 못했겠죠. 그렇게 편안한 기분은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로벨은 상처투성이임에도 전과 달리 몹시 편안해 보였다. 여태까지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다소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 준 거야, 칸나? 마티 씨에 대해선 언제 파악했고?”

소리를 죽여 묻는 에버의 질문에 칸나가 씩 웃었다.

“로벨 씨가 메고 있던 저 짧은 타이가 마티란 분이 사전에 전달해 준 거였거든. 우연히 만졌을 때 정보가 좀 잘 읽혔어. 마티란 분이… 저분을 사실 많이 걱정하고 있었더라고.”

그 어떤 좋은 조언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잘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결국 감정이다. 칸나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능숙한 태도로 자신이 읽은 정보를 적시에 터트려 로벨을 멈추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건 무시무시한 무기나 건물 전체를 폭파할 수 있는 능력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강한 힘이었다.

“우리가 잡아 둔 사람들은 거의 기절 상태긴 하지만, 원하면 깨워서 질문해도 돼.”

“그건 괜찮아. 창고 안을 좀 보고 싶은데.”

유더는 닫혀 있는 창고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비밀 통로 때문에?”

무엇 때문에 보고 싶다고 말하는지 알았다는 듯 칸나가 그를 안내했다.

“여기야. 물건이 다 쏟아져 있으니까 조심해서 따라와. 음… 저 선반 아래쪽, 보여?”

가짜로 바꿔치기 된 출품 물건들이 마구 쏟아져 뒤엉킨 사이에, 비틀린 선반 아래쪽으로 난 작은 구멍이 보였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통로였다.

“바닥을 파서 만든 통로인데 뚜껑을 덮으면 감쪽같이 그냥 바닥 같아. 다행히 내 손에 걸려서 금방 알아냈지만.”

내부에 분명 있어야 할 이들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 뒤, 칸나는 즉시 능력을 사용했다. 아무리 감쪽같은 통로라도 그것을 이용한 이들의 사념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상 그녀의 능력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안은 들어가 봤어?”

“응. 경매장에서 좀 떨어진 북문 근처가 출구야. 이미 도망쳐 버린 것 같아서 다시 돌아왔어. 그 사람들의 정보가 지워지기 전에 좀 더 읽어 보려고 해. 못 잡아서 미안해.”

유더의 생각에 칸나는 미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급히 임무에 참여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누구보다 든든한 활약을 했는데 무엇이 미안할 일인가.

에버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칸나를 안고 토닥여 주었다.

“무슨 소리야. 본래는 내가 할 일이었는데 내가 늦었으니 내 탓이지. 칸나 네가 없었으면 저 통로가 있었다는 사실도 엄청 늦게 알아냈을 텐데 왜 그런 말을 해. 오히려 네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안에 있는 이들이 밖으로 못 나가게 막는 건 내 일이었어.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내 지분이 제일 크겠지.”

이어진 유더의 말까지 들은 칸나가 그제야 평소처럼 마냥 밝게 웃는 대신 눈썹을 누그러뜨리고는 입술 끝에 힘을 꾹 주었다. 표를 내지 않았어도 남국인 상인들을 놓친 일 때문에 사실 제법 울적했었던 모양이었다.

“고마워. 하지만 둘 다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 그런 말은 말아 줘.”

사실 남국인 상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이번에는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심지어는 가져간 칼라네사 가루조차 진짜가 아니었다.

칸나도 그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조금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기왕이면 귀환 보고를 하는 김에 더 잘하는 모습을 단장님께 보여 드리고 싶었단 말이야.”

실수한 게 두렵거나 혼날 일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그건 칸나가 키시아르를 단장으로서 얼마나 존경하고 믿고 있는지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이전 생과는 전혀 다른 그 믿음과 확신이 유더의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으로 가라앉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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