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20화 (420/805)
  • 420화

    “……예?”

    키시아르의 동조에 겨우 핏기를 되찾던 모엣 자작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안하지만 나와 함께 있는 이는 내 보좌이자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신 명예로운 성을 지닌 유더 아일 경뿐이라서 말이네. 알 경이라는 자는 알지 못해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울 듯해. 아무래도 나는 다시 쉬어야겠군.”

    부드럽게 같은 답을 한 키시아르가 도로 문을 닫아 버렸다. 침묵 속에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모엣 자작은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사색이 되었다.

    평민의 이름과 성 따위를 기억하는 게 무어 그리 중요하겠냐마는, 황제가 내려 준 것이라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누구나 몇 년 이내에 황좌의 주인이 바뀌리란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해도 일단 아직까지는 케일루사 황제가 황좌에 앉아 있었으며 저 문 안의 존재는 황제의 유일한 친동생이자 공작인 자였다.

    그런 이가 제 작은 실수를 꼬투리 잡아 황제를 모욕하고자 하는 고의적인 의도로 크게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몹시 곤란했다.

    “전하, 전하! 제가 경황이 없어 말씀을 잘못 드렸습니다. 저의 말은 전하의 보좌인 유…더 아일 경이 이 사태를 위하여 나서 주었으면 한다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는 뜻이었사온데 혹 오해하셨다면……!”

    “흠. 그래. 내 보좌 유더 아일 말이지.”

    다시 문이 빼꼼 열리며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모엣 자작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도 영 이해가 안 되는군. 아무리 경황이 없다 해도 부탁하고자 하는 상대의 이름을 그리 기억을 못 할 수가 있는가?”

    펠레타 공작 자신은 머리도 품행도 좋지 못해 황자 시절 가르치던 스승들이 한 달마다 바뀌었다는 소문이 온 제국에 파다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몹시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모엣 자작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그것은… 기억 문제가 아니오라 요즘 제가 몸이 좋지 않은 탓에 간혹 귀가 어두워질 때가 있어…….”

    “그래? 귀가 어두워지고 노망이 날 만한 나이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상당한 동안이었나 보군. 가는 세월을 잡을 수야 없는 법이니 이해하겠네. 진작 말하지 그랬나?”

    키시아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뻔뻔하게 답했다.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단어 선택이 실로 미묘했다. 모엣 자작의 턱에 난 수염이 모욕감으로 인해 사정없이 부들대다가 멎기를 몇 번 반복했다.

    “예……. 정말로 그저 귀가 어두워 실수하였을 뿐입니다. 감히 폐하의 뜻을 왜곡하거나 감히 모욕하려 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어 감읍합…니다. 그러면 이제… 저희의 부탁을 받아들여 주시는 것인지요?”

    “글쎄…….”

    미소를 지은 펠레타 공작이 다시 문을 더 크게 열고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바깥 상황을 잠시 확인하고 오는 정도에 굳이 내 보좌가 나갈 필요까지야 있겠나?”

    “예?…….”

    “그 정도야 내가 하면 그만인 것을. 지금 다녀오겠네.”

    키시아르가 밤마실을 다녀오겠다는 말보다 더 가볍고 산뜻한 답과 함께 문을 닫고서 앞으로 나섰다. 흐트러진 예복 차림에 신조차 신지 않은 맨발로 자신들의 앞을 지나는 공작을 보며 귀족들이 일제히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 공작 전하! 그대로는 아니되십니다!”

    “저희의 부탁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전하!”

    키시아르가 제 뒤를 쫓는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여나 그가 자신들과 함께 가자고 말할까 놀란 이들이 일제히 움찔하며 물러섰다. 키시아르는 그 우스운 꼴들을 향하여 밝게 웃었다.

    “아. 그렇지. 그냥 확인하면 재미가 없으니 혹 내기라도 하겠나? 나는 용맹한 내 단원들과 기사들 덕분에 바깥 상황이 자네들의 생각만큼 위험하거나 심각해지지는 않았다는 데 5천을 걸겠네. 자네는?”

    “저, 저는.”

    모엣 자작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키시아르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이런. 이곳에는 내기의 재미를 모르는 이들 뿐인가? 어쩔 수 없군. 그러면 이제 문을 열겠다.”

    “전하! 안 됩니다!”

    귀족들이 다가가 홀 입구를 막아 둔 의자와 테이블을 치우려 드는 키시아르를 황급히 붙잡았다.

    “바깥에 괴한들이 이미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죽게 될 겁니다! 전하!”

    “모두 공작 전하를 막으시오!”

    그러나 망나니다운 차림새의 젊은 공작은 저를 막으려 드는 손길 따위는 간지럽다는 듯 손쉽게 뿌리치고 하하 웃으며 순식간에 가구를 모두 밀어내 버렸다.

    “왜들 이러나. 다들 나를 너무 걱정하니 만인의 사랑을 받는 데 익숙하다 여긴 이 몸조차 약간 부끄러울 정도군. 이럴 필요 없다는데도?”

    그가 그리 힘주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귀족들은 억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고 날아가 뒹굴기 바빴다. 멀리서 보면 그야말로 한 편의 촌극이었다.

    모엣 자작은 키시아르의 팔뚝을 붙잡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간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을 벌렸다.

    미친 자. 펠레타 공작은 정녕 미친 놈이었다.

    그가 수도 사교계에서 온갖 기행을 벌였다는 소문을 암암리에 듣기는 했으나,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행각을 보면 그건 오히려 실제를 제대로 담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건 기행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겁을 상실하고 미친 사람이 아닌가.

    외모는 조금 반반할지 몰라도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라 키시아르를 우습게 여겼던 서부의 귀족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동안 결국 모든 장애물이 사라졌고, 문이 열렸다.

    “안 돼!”

    모엣 자작을 포함한 대부분의 귀족들이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웅크리거나 등을 돌려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달음박질쳤다.

    곧 무도한 침입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잔혹한 피 냄새가 코를 찌르고, 꽉 닫힌 문 덕에 들리지 않았던 비명이 귀를 파고들리라!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한 상황에 당혹한 귀족들이 잠시 후 하나둘 숨었던 곳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내 누구라 할 것 없이 눈을 크게 홉떴다.

    펠레타 공작이 연 문 앞에 그들이 예상했던 시체나 피는 보이지 않았다.

    열린 문 앞에 선 맨발의 공작은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가슴에 올려 경례를 하고 있는 검은 옷의 마병단원들과 기사들, 그리고 묶인 채 쓰러져 있는 몇 명의 사람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긴급상황을 모두 정리하고 이곳에 침입한 자들을 잡아들였음을 보고드립니다, 단장님!”

    마병단원 중 가장 앞에 있던 푸른 머리칼의 소년이 카랑카랑하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른 단원들 또한 동시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반복했다. 그들은 펠레타 공작의 차림새 따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음, 내기는 내가 이겼군. 하지만 받을 것이 없으니 어쩐다?”

    키시아르가 화사한 눈웃음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의 뒤에서 고개를 든 소년의 흰 뺨에 튀어 있는 핏자국을 본 귀족들은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유더! 경매장에 참석한 귀빈들은 대충 다 찾았대요. 이제 칸나 쪽만 확인하고 돌아가요.”

    “알겠습니다.”

    유더는 땅의 힘을 멈추고도 만약에 대비해 계속 올라가 있던 나무에서 뛰어내려 에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스스로 장담한 대로 에르시를 이긴 뒤 이곳에 와 바로 경매장 내의 상황을 파악하고 단원들을 지휘하는 임무까지 막 마친 참이었다.

    유더는 드러난 살갗마다 얇은 칼에 베인 듯한 상처가 가득함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에버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에르시 쪽은 나보다 더한 상태거든요.”

    시선이 어디에 닿았는지 알아차린 듯한 에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들어 핏자국을 슥슥 훔쳤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던 상황이 사실 마병단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귀빈들 중 몇은 아직도 소리를 지르며 반항해 댔지만 마병단원들은 개 짖는 소리보다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그들을 연행해 마차에 실었다.

    “칸나 쪽은 잘 끝냈다고 합니까?”

    “그렇다고 들었어요. 나그란의 별은 그쪽에서 다 잡았다는데, 창고 쪽에 있다던 남국인 상인들을 다 못 잡아 둔 건 좀 아깝네요.”

    유더가 혼자서 끊임없이 땅의 힘을 일으키면서 외부로 나가는 길을 막고 있는 동안, 단원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지정된 이들을 잡아들였다.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생각하여 당혹한 이들의 허를 찌르는 작전은 예상대로 잘 통했지만 창고에 있던 남국인 상인들이 내부에 있던 제3의 비밀 탈출로를 이용하여 도망쳤다는 게 문제였다.

    프루엘레와 로벨의 정보로 이곳에 그들이 아는 것 이외의 다른 탈출로는 없을 줄 알았는데, 남국인들 이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던 창고 내부가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용했다.

    유더와 싸웠던 남국인은 물론, 여관에서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던 다른 남국인 몇 명도 비밀 통로를 통해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가지고 간 건 바꿔치기 된 칼라네사 가루가 담긴 포대 하나뿐이었다.

    “이놈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놔!”

    그때, 유더의 주변에서 어느 귀빈이 또 발버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유더는 그자가 제가 찾던 귀빈임을 알고 걸음을 멈추었다.

    “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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