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기사가 눈 깜짝할 사이 다가와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에 호산라는 나한과 함께 이동하지 않았다. 깡마른 남국인 청년이 기사의 등 뒤를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고는 다리를 절면서 달음박질침과 동시에, 나한은 망설임 없이 검 앞으로 몸을 던졌다. 기사가 검을 거두려 했으나 작정하고 달라붙는 이를 뿌리치기엔 늦은 상태였다.
살이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억눌린 숨소리가 겹쳤다.
나한은 자신의 배를 찌른 검을 붙잡은 채 모든 힘을 모아 능력을 사용했다.
일전에 대삼림에서 마주친 마병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를 상대로 어깨를 내주면서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통했다.
공격당하는 순간만큼은 적의 정신에 존재하는 단단한 벽이 잠시 어그러지고, 파고들어 갈 틈이 생겨난다.
그 틈을 타고서 사용된 능력이 넓게 퍼지며 순식간에 기사를 감싸 나한에게만 인식되는 불투명한 환상의 벽을 만들었다.
한때 유더 아일이 한 번 갇힌 적이 있던 공간이 또다시 완성되며, 기사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
나한은 제 배에 검을 찔러넣은 채 멈춰 선 기사를 바라보며 찌푸린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공간을 만드는 건 나한에게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다루는 환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능력에 당한 대상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환상이었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환상은 쉽다. 단순한 풍경 눈속임 정도라면 한계를 느끼기 어려울 만큼 잘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은 강한 자들과 마주치면 금세 쓸모를 잃었다.
반면 대상이 스스로 만들어 내게 하는 환상은 힘이 많이 드는 대신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의 경우 그 환상을 몇 초만 마주해도 순식간에 정신이 붕괴되고는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환상도 어렵지 않게 깰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이를 상대해야 할 때였다. 그런 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나한도 다소 특별한 공을 들여야만 했다.
지금껏 그 정도의 힘이 필요했던 자는 총 셋이었다.
유더 아일, 마병단장 키시아르, 그리고 눈앞의 기사였다.
앞의 둘과는 달리 세 번째 기사는 각성자조차 아니란 점이 나한의 분노를 자극했다.
“확실히, 한 방 먹었군.”
저를 상대로 비각성자를 연습이랍시고 내보낸 건 잠시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질이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는 오판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크읏.”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배에 찔린 검을 뽑아내자 피가 울컥 쏟아졌다. 나한은 배에 난 구멍을 대충 틀어막은 뒤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는 고요한 분노에 찬 눈으로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낸 능력의 결과물을 바라보았다.
공포가 거의 없어 보이는 인간이라도 결국 무언가는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제대로 형성되지도 못했던 약한 범위의 힘 정도야 마음대로 부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과연 유더 아일과 마병단장조차 걸려들었던 최고의 환상벽 앞에서는 어떨까.
나한은 피에 젖은 입술 끝을 들어올렸다.
“지금부터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헤쳐 주마. 그러고 나면 정체와 비밀도 알 수 있겠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끝을 벽에 대려던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충격과 두려움에 찬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나한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호산라?”
고개를 돌린 그의 뒤쪽에서 마치 시기를 맞추기라도 한 듯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폭발음이 들려왔다. 전투의 여파로 깨진 창문 너머, 선명히 밤하늘을 밝히며 수없이 펑펑 치솟는 새빨간 불 폭탄은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이 쏘아 올린 위험 신호였다.
빌름 남작의 저택을 뒤엎고 타이누의 기사들을 발견하는 대로 죽이기로 한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다급하고도 절망적인 신호.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답해 줄 이 없는 생각에 잠긴 나한은 제 곁에서 환상벽에 갇힌 기사의 손끝이 점차 움찔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돌렸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은 3층 복도 전체를 뚫고 터져 나간 새파란 오러의 불빛이었다.
***
“전하. 공작 전하. 깨어 계신지요?”
키시아르는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조금의 반응조차 없이 휴게실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다. 옆에 곱게 개어 둔 검은 예복 상의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듯 장난스럽고 무료했다.
잠시 멎었던 문 두드리는 소리는 시간이 조금 흐르자 또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전하. 들리지 않으시는지요? 펠레타 공작 전하!”
쿵쿵쿵, 쿵쿵쿵쿵. 거칠 것 없이 문을 두들기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다. 예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이번에도 그 부름을 무시했다. 그러자 다음에는 짜증과 분노를 가득 품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문틈을 타고 들려왔다.
“존경하는 펠레타 공작 전하. 혹 안에 들어가신 뒤로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아시는지요? 바깥 상황을 조금이라도 들으셨다면 저희를 위하여 몸소 먼저 나서 주심이 당연함에도, 여태 그곳에 계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자 마병단을 이끄신다는 분께서 이리 책임을 무시하심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이유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이번 말은 제법 인상이 깊었다. 키시아르는 한쪽 팔을 괸 채 누워 있던 그대로 바람 소리를 흘리며 짧게 웃었다.
“그렇다는데, 내 보좌가 남기고 간 옷은 어떻게 생각하지?”
키시아르의 손에 잡힌 유더의 예복 상의는 당연히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나를 신검의 진짜 주인이라 보기 힘든 이유를 백 가지 정도는 대며 비꼬던 이들이 갑자기 신검의 주인이 지켜야 할 책임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이 퍽 재미있지 않나.”
저들은 이 위험한 상황에서 펠레타 공작을 위하려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다. 표면상으로는 저들보다 높을지 몰라도, 누구도 실제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내를 불러내 자신들 대신 밀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예의의 탈조차 제대로 쓰지 않은 무례한 어투가 대단히 인상 깊었다.
긴 손가락 끝이 또다시 장난스레 유더의 예복 소매 끝을 잡았다. 춤이라도 추듯 느리게 소매를 흔들던 키시아르는 또다시 바깥에서 들려온 큰 소리를 무시하려다, 그 내용이 예상을 벗어난 까닭에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모엣 자작. 저 안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잊었습니까? 애초 이 상황을 제일 먼저 책임져야 할 이는 우리를 두고 사라진 빌름 남작인데 누구더러 자꾸 책임을 지라 말하는 것입니까. 황가의 피를 이으신 분께서는 본디 가장 안전한 곳에 계심이 마땅하며, 작위를 받은 자는 의무에 따라 그 곁을 지켜야 한다는 맹세를 모르오?”
“무슨 옛 건국시대 때나 나올 소릴 하고 있는 거요? 남작은 없고 남작 부인은 기절하였는데 그러면 대체 누가 나서야 한단 말입니까! 아무도 용기를 내지 않으니 내가 낸 것이오! 나는 당장 이곳에서 나가고 싶단 말이오!”
“그렇다면 아까 먼저 밖으로 나간 용감한 다른 이들처럼 당신도 나가면 됩니다. 애초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곳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근 이도 당신이 아니었소?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나가서 싸울 용기는 없고, 쉬시러 들어간 분께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드리는 건 용기라니 그 용기 참 우습군.”
“무어?”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뜯어말리는 소리가 났다. 소란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도 모엣 자작이란 자는 미친 듯 화를 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본래 스스로 켕기는 부분을 찔린 자들이 더 화를 내는 법이었다.
“코엘트 남작. 옛 명성만 남았을 뿐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자가 이 자리에 운 좋게 초대받았다 하여 기고만장하는가……!”
코엘트라. 그 이름을 되뇌어 본 키시아르는 기억 속에서 그가 오늘 인사 외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곁에 다가오지 않고 홀로 미술품 감상만 하던 귀족 사내임을 알아냈다.
붉은 눈동자 속에 처음으로 흥미로운 빛이 돈 그 순간, 열려 있던 창밖에서 갑자기 시끄럽게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도 놀라지 않고서 고개를 돌린 키시아르는 잠시 후 보다 아래쪽을 향하여 시선을 옮겼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빠르고도 짧은 푸른 빛이 번득이며 밤하늘을 물들이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는 바닥 아래가 진동으로 떨리는 감각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나단 녀석. 너무 요란한데.”
작은 중얼거림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잠시 후 키시아르가 누워 있던 침대 위로 작은 쪽지 하나가 빛을 내며 툭 떨어졌다.
‘존경하는 단장님께. 이쪽은 다 잡았습니다! 핀 엘더 올림.’
약간 비뚤지만 시원시원하게 적은 글자가 쓴 이의 성정 그대로를 느끼게 했다. 키시아르는 쪽지를 살짝 뒤집어 보았다. 그러자 앞쪽보다 더 급히 쓴 듯한 추신이 눈에 들어왔다.
‘-나한 도주.’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짧은 한 줄의 추신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이윽고 그것을 가볍게 쥐어 구겼다. 다시 편 손안에는 한 줌의 재만이 들어 있었다.
아쉽군. 입 안으로 되뇐 말이 사라지기도 전에 일어난 키시아르는 제 키보다 작아 비좁기 그지없던 침대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내밀자 앞에 몰려들어 있던 이들이 일제히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펠레타 공작은 제가 지금까지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보란 듯 하품을 하는 얼굴은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를 머금은 탓에 지나칠 정도로 성적인 매력을 내뿜었고, 헐벗은 상체에 대충 걸친 셔츠는 단추를 잠그지 않아 맨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잔뜩 주름져 구겨진 하의는 또 어떠한가. 어디를 보나 문을 열기 직전에야 겨우 다시 입은 모양새였다.
눈치가 빠른 몇몇 이들은 아주 조금 드러난 문틈 사이로 카펫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술병과 옷가지들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등불을 아주 희미하게 밝혀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공작의 등 뒤에 있는 침대 위로 누군가 누워 자고 있는 듯이 뭉쳐진 이불 더미가 슬쩍 드러난 듯도 했다.
쏟아진 술 냄새가 지독했던 탓에 정사의 비린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몰려든 이들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파티장이 엉망이 된 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는데 펠레타 공작은 정말로 제 부하와 계속해서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보다 더 음탕한 작태에 기막혀하면서도 사람들은 홀린 듯 키시아르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짐짓 긴 한숨을 흘린 키시아르가 드디어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대체 왜 이리들 시끄럽게 구는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군.”
“전하. 왜 이제야 나오시는 것입니까! 바깥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시는지요.”
아까부터 가쁘게 문을 두드려 댔던 모엣 자작이 재빨리 나서서 소리를 쳤다. 저보다 높은 이를 향하기에는 대단히 무례한 어조였으나 키시아르는 눈썹만 한 번 올렸을 뿐 딱히 그자를 탓하지 않고 태연히 반문했다.
“상황? 다들 여기까지 몰려온 걸 보니… 다른 휴게실이 모두 꽉 차기라도 했나? 하하.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좀 더 이곳을 써야겠는데.”
“아닙니다! 누구도 거기에 들어가고자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모엣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흠? 그러면?”
“바깥에서 내내 큰 소리가 났는데, 정말 상황을 모르십니까? 저희는 지금 괴한들의 침입 때문에 이곳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갇혔다?”
“네. 기사들이 밖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저희를 위하여 이 상황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신검의 주인이시자 마병단을 이끄시는 전하뿐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
모엣 자작의 말에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동의의 뜻을 밝혔다. 다만 그와 싸웠던 코엘트 남작이란 자만은 주먹을 쥔 채 키시아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린 자식이 몇 있을 법한 나이대의 온화해 보이는 사내가 안경 너머로 노을 같은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서 서 있는 모습이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학자나 선생을 연상케 하는 인상에서 제 형님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키시아르는 코엘트 남작을 향하여 느긋하게 질문했다.
“그런데 자네는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어 보이는군. 뭐지?”
남작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현재 이곳에 갇힌 상황임은 맞으나, 그것은 외부 요인 때문이 아니라 안에서 모든 문과 창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입니다. 해결을 위해서는 전하께서 나서 주심을 바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잠근 문을 열고 바깥의 하인과 기사들을 불러들이는 쪽이 우선이 아닐지요.”
“코엘트 남작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전하!”
고함을 지르며 고개를 든 모엣 자작이 코엘트 남작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안전을 위하여 닫은 문을 사태가 해결되기 전 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하며 주변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그들 대부분은 모엣 자작의 의견에 동조하는 중이었다.
하기는 지금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 이들이라면 기본적으로 경매가 열린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사교계에서 뒤처진 자들일 테고, 그중에서도 특히 겁이 아주 많은 자들일 터였다.
아주 극소수, 저 코엘트 남작과 같은 자를 빼고는.
키시아르는 잠시 미소를 흘리다 분위기가 또다시 험악해지기 전에 목소리를 냈다.
“그래.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네. 닫힌 문을 열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내게 책임을 지고 그대들을 위하여 나서 달라 부탁함은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나?”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는 얼마 전 신검의 새로운 주인으로 인정받으셨으며, 밖에 있을 마병단을 이끄시는 분이기도 하시지 않사옵니까?”
“그런데?”
“힘이 없는 저희들은 불가능하겠으나, 전하를 보필 중인 대삼림의 영웅 유데 알 경은 분명 여기서 나가 쉽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테니…….”
말을 잇던 모엣 자작이 키시아르의 등 뒤, 어둠에 묻혀 있는 침대 쪽을 향하여 눈을 굴렸다. 그리고는 아마도 거기에 누워 있으리라 생각한 검은 머리칼의 평민 사내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부디 명을 내려 주십사 부탁드리려 하였습니다!”
“…….”
키시아르의 표정은 말을 듣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정욕이 다 꺼지지 않은 방탕한 사내답게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입가에 습관적으로 띤 미소 또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순간적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한기를 느꼈다.
하늘이 쏟아져 자신을 깔아뭉개는 듯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엉덩방아를 찧은 모엣 자작은, 잠시 후 거짓말처럼 사라진 감각에 몸서리치며 숨을 헐떡였다.
“바, 방금, 무…….”
“오. 괜찮은가? 그래서야 바깥 소식을 알아보기도 전에 쓰러지겠군.”
다정하게 염려의 말을 건넨 키시아르가 모엣 자작을 향해 말을 이었다.
“자네들의 염려는 모두 타당하네. 위험한 상황에서 주인이 자리를 비웠으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이네. 나는 유데 알이란 자를 몰라서 명을 내려 줄 수가 없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