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마치 우리가 여기로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펠레타의 기사.”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우리를 찾아 타이누 곳곳을 돌아다니던 개들을 모를 수는 없지.”
도발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기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답을 들었으니 되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한은 재차 물었다.
“그래서, 답은 뭘까. 내가 먼저 질문을 했는데 말이야.”
“주군께서는 네가 반드시 이곳에 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기사가 꽉 다물렸던 입술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누구보다 사막의 일족다운 생김새인 주제에 몸에 두른 분위기는 겨울 호수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너희들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빌름 남작과 더불어 저 안에 있는 남작의 동생을 죽여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
“바깥에서 일으킨 소요는 눈속임일 뿐, 정말로 바라는 건 그자 쪽이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바라는 바를 몹시 잘 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겠지.”
나한은 조금도 동요를 내보이지 않고 답했으나, 등 뒤에 있던 호산라의 표정은 숨길 수 없이 희게 질렸다.
마병단장, 펠레타 공작이 추측한 바가 사실 조금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걸……?’
“그래. 그러면 마병단장이 우리가 이곳에 올 것을 알면서도 단원이 아닌 평범한 기사를 내보낸 이유는?”
“연습을 하라고 하시더군.”
“……연습?”
느리게 반문한 나한이 잠시 후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형제자매들도 아닌 자의 연습용 나무 인형 정도로 취급한 건가? 재미있는데. 그게 진짜 가능하리라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나?”
“해 보면 알겠지.”
낮고도 느릿하게 대답한 이가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바로 잡았다. 절도 있게 자세를 잡아 머리 위로 치켜올린 은빛 검신 위로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내렸다.
‘대체… 이 느낌은 뭐지? 그저 검을 들고 있을 뿐인데 무서워……. 이유를 모르겠어.’
기운 한 조각 보이지 않아 깨끗하기 그지없는 검을 보며 호산라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나한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기사라 그리 당당한가 싶었는데 왜 쓰지 않지? 혹시나 싶어 묻지만, 각성자인가?”
‘아, 그. 그래. 맞아. 마병단에는 오러처럼 보이는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다고 했었지.’
남자가 각성자라면 이 기이한 기분도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추측과 달리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 그러면 이쪽도 더 망설이지 않아도 되겠군.”
나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호산라. 이전에 근접전을 대비하여 훈련했던 대로만 한다. 준비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한이 호산라를 붙잡았다. 호산라는 기사가 검을 휘두르기 전 능력을 발해 나한과 자신을 기사의 등 뒤편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즉시 나한이 손을 내뻗어 기사의 뒤통수를 움켜쥐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능력을 발휘했다.
‘됐……! 아?’
그러나 기사는 여태까지 그들이 본 이들과는 전혀 달랐다. 비틀거리며 앞을 향해 허리를 숙인 사내를 바라보며 무심코 긴장을 풀려 했던 호산라는 눈을 한 번 깜빡이자마자 별안간 자신들을 향하여 찔러 들어오는 검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아……!”
검 끝이 호산라의 얼굴을 스치며 나한을 찌를 뻔한 것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이동 능력이 발휘되었다. 본래 있던 위치가 아닌 한 층 아래의 2층으로 내려온 호산라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나한을 보고 기겁했다.
“도련님!”
“…보통 놈은 확실히 아니군. 그 짧은 사이에 내가 설정한 능력 범위를 깼어.”
“예? 어떻게…….”
아무리 정신없이 움직인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검 하나로 그런 일이 가능한가.
여태까지 나한이 환상능력을 사용했을 때 그가 설정한 범위를 깬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고 들었다. 바로 그와 여러 번 마주쳤던 검은 머리칼의 마병단원, 유더 아일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물을 새도 없이 천장이 갈라지며 파편이 머리를 때렸다. 호산라는 다시 한 번 능력을 사용하며 뒤로 피했다.
이후 몇 분 동안 눈에 보이지 않을 만한 속도의 공방이 벌어졌다. 기사는 철저하게 3층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그들을 상대했다. 호산라가 3층에서 2층으로, 다시 3층으로 이동하며 시간을 조금씩 버는 동안 나한은 계속해서 기사에게 능력을 발휘하려 했지만, 이쪽의 공격은 한 발 차이로 비껴 나가면서 기다렸다는 듯 반격을 하는 통에 도무지 능력을 쓸 틈을 얻기가 어려웠다.
공포를 불러 일으키며 순식간에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드는 환상 능력에 한 번 당할 뻔했었다고는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예리함이었다.
‘저렇게 평범해 보이는 검이… 대체 왜 이렇게 무서운 거야. 대체 뭐냐고!’
기사의 검이 다가오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몸이 떨렸다. 나한이 능력을 쓸 때와는 다른 이유로 육신이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려 했다.
그것을 견뎌내고서 반복하여 단거리 이동 능력을 사용하는 동안 호산라의 눈에도 점차 힘을 과하게 사용한 여파로 인한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그간 나한과 함께 단거리 이동으로 공격을 피하는 훈련을 해 본 적은 많았지만, 그것을 이토록 단숨에 많은 횟수로 사용해 본 건 처음이었다. 스스로도 제가 이렇게까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을 정도였다. 머리와 눈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고통스러워 이대로 멈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제가 멈추면 저만 죽는 게 아니라 나한 또한 죽기 때문이었다.
“…호산라. 느껴지나?”
다시 한 번 층을 건너 이동한 사이 나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자는 정말로 지금 나를 상대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
“…….”
나한의 힘은 그에게 가까운 위치일수록, 그리고 대상의 육신과 정신이 약한 상태일수록 큰 효력을 발휘했다. 움직이는 상태에서 쓰는 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쓸 때보다 훨씬 어려워 깨지기도 쉬웠다.
기사가 무슨 힘을 더 숨기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 번 시도가 좌절된 나한 쪽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신중을 기하기 시작한 것과 반대로, 기사가 내보이는 공격 속도와 움직임은 처음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적에 대한 의문이나 두려움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간 여러 번 마병단을 상대하셨으니 뭔가를 알아낸 걸지도 몰라요. 혹은 가일과 두일이…….”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닐 거야. 저자는…….”
그 순간 또다시 기사가 모습을 드러내어 공격을 날렸다. 뒤쪽으로 이동하여 피한 호산라의 곁에서 나한이 씹어 뱉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자에게는, 숨겨 놓은 힘 이전에 두려움이란 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어.”
“……예?”
호산라는 고개를 돌렸다. 슬슬 헐떡이는 숨 너머로 비릿한 맛이 나기 시작했지만 도무지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움이 없는 자라니. 그런 자가 존재할 수 있는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던 나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전에 저자의 주인을 상대했을 때처럼 나도 뭔가를 내주는 수밖에 없겠군. 이동 능력은 이제 그만 써라, 호산라.”
“안 돼요!”
“이대로는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네 힘이 다해 모두 다 도망칠 수 없게 될 거야.”
“…하지만!”
“호산라.”
호산라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을 타고 흐른 핏줄기를 가볍게 닦아낸 나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자는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너는 3층에서 목표를 찾아. 찾는 즉시 죽이고, 나와 함께 빠져나간다. 할 수 있겠지?”
“하지, 만.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 없다 해서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건 아니지. 내가 지금 가진 유일한 방법은 너뿐이야.”
한쪽 얼굴이 화상으로 뒤덮인 사내의 말에는 무겁고도 두려운 울림이 있었다. 호산라는 그의 흰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움켜쥔 손이 차가워지며 마구 떨렸다.
“…호산라.”
“……알겠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얼굴 앞에서, 답할 수 있었던 말은 그저 그뿐이었다.
호산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메여 오는 목을 울리며 다시 한 번 이동 능력을 썼다.
3층 복도로 향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듯 서 있던 기사가 여태까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야말로 인간이라기보다는 방어벽에 더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