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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17화 (417/805)

417화

“나한!”

저택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다 호산라의 힘으로 들어온 이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마르손에게 들었어. 치안 관리단에 마병단이 있었다면서. 타인 공작 측이 우릴 잡으려고 이중으로 덫을 놓은 건가?”

“비겁한 놈들. 나한이 최소한의 인원만 데려간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마르손은 불꽃을 내뿜어 폭발시키는 능력을 지닌 그들의 동료로, 에르시와 함께 이번 일을 가장 적극적으로 진행했던 자였다. 예상치 못한 마병단의 등장 이후 마지막까지 에르시와 함께 도망치고자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한 그의 눈빛은 전보다 더욱 진한 증오로 일렁이는 상태였다.

“이중 덫인지, 아니면 마병단의 단독 행동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어. 다만 분명한 건 우리가 여기에 있는 한 에르시의 뜻은 아직 꺾이지 않으리란 것뿐이지.”

나한의 말에 모든 이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비록 아쉽게도 그곳에 있던 형제자매들은 함께 데려오지 못했지만, 나머지 형제자매들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어. 형제들은 어떻지?”

각성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침을 삼켰다. 그들은 이내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 우리는 네가 말해 준 진정한 낙원을 믿는다. 그러니 너의 뜻이 곧 우리의 뜻이야, 형제.”

에르시가 돌아오지 않았다 해서 뜻을 꺾을 이들은 여기에 없었다. 그들은 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 본래 살던 터전을 잃고 온갖 고생을 하다 서부의 끄트머리, 위험하기 짝이 없는 대삼림까지 흘러들어 온 이들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힘겹게 존재를 감추고 사는 동안 내내 억눌려 쌓이기만 하던 분노와 증오, 슬픔을 세상을 향해서 표출해도 된다고 말해 준 이는 오직 나한뿐이었다.

나한은 가진 능력을 제대로 쓸 곳을 찾지 못했던 그들을 이끌고 보란 듯이 타이누 곳곳을 부수었으며, 귀족들의 허를 찌르고 그들의 뱃속에서 정보를 빼냈다. 마병단을 만나 다친 팔이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임에도 그는 위축되거나 물러나지 않고 성심성의껏 에르시를 도왔다.

강하고도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오로지 각성자들을 위해 움직이는 사내.

그런 그와 함께하는 동안 각성자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강렬한 소속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물론 그들을 이해해 주지 않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결국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다른 이들 또한 이해하게 될 터였다.

각성자는 약자가 아니라는 진리를.

그들을 노예처럼, 괴물처럼 취급하던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 주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낙원을 세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지금쯤 경매장에 있을 형제들도 최선을 다해 우리의 피를 빨아먹던 자들의 웃음을 부숴 주고 있겠지. 우리도 곧 그들과 함께할 수 있을 거야.”

“가자!”

광기에 가까운 증오로 뭉친 이들이 가슴 속에 치밀던 일말의 두려움과 걱정을 없애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뒤 계획대로 흩어졌다.

잠시 후, 정원 곳곳에서 큰 소리가 나며 불길과 폭발음이 치솟았다.

대부분의 경비 인원이 집중되어 있던 정문 앞에서 일대 혼란이 벌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한은 낮게 웃었다.

“우습지 않나, 호산라?”

“무엇 말씀이신가요.”

“이미 한 번 우리가 이곳에 들어와 그자들의 일원을 죽였는데도 대부분의 경계가 오직 밖만 향하고 있다는 점이 말이야.”

아무도 없는 정원을 둘러보며 웃던 나한의 얼굴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슬프게도 전부 예상대로지. 그자들에게 그 일은 이미 없던 일이 되었을 테니까.”

없던 일. 유달리 힘이 들어간 말에 호산라의 눈빛 또한 안타깝게 가라앉았다. 호산라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기를 몇 번 반복한 뒤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마병단의 대부분은 이곳에 있을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마병단장이나 전에 보았던 그 검은 머리 마병단원도 여기 있을 거예요. 저는 도련님께서 혹 그들과 마주쳤다가 또 상처라도 입으실까 두렵습니다. 이곳은… 지나치게 위험해요.”

호산라가 나한의 팔을 걱정스레 훑었다. 옷으로 가리고는 있으나 그의 어깨는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세간에는 바보에 방탕한 자라고만 알려졌다기에 크게 위험하게 생각지 않았던 마병단장 펠레타 공작은 그 사건 이후 호산라에게 가장 꺼려지는 인물 중 하나로 낙인찍혔다.

“주제넘은 생각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호산라?”

“…죄송합니다.”

호산라는 즉시 나한의 팔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나한이 겉옷을 여미며 입을 열었다.

“마병단은 저번 일로 인해 마병단의 일원이 옥에 갇혔다는 정보가 들릴 만큼 타인 공작 측과 갈등을 빚었지. 대부분의 그쪽 형제자매들은 내부에서 보초 일에나 신경을 쓰고 있을 거야. 황제와 귀족들의 개와 같은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것뿐일 테니 안타까운 일이지.”

귀족들의 개라는 말을 내뱉는 사내의 눈빛은 일견 지극히 침착하여 오히려 끝없는 어둠을 느끼게 했다.

“그렇기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이지만.”

“…….”

침묵 속에서 또다시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렸다. 바삐 뛰는 이들의 발소리를 들으니 드디어 느리디 느린 기사들이 뛰쳐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한은 호산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능력을 발했다. 그들의 근처까지 온 기사들은 바로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도 의심 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벌써 여러 번 보았음에도, 호산라는 매번 숨을 삼키고는 했다.

“자, 들어가자. 형제들이 벌어 준 틈을 아껴 써야 하니까.”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본저에 다다른 나한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이미 이곳에서 한바탕 싸웠는지, 아름다웠던 정원수 몇 개가 부서져 나뒹구는 중이었다.

“어서 마차를 대기시키지 못해!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느냐.”

“지금은 위험합니다. 용맹한 기사분들과 마병단원들이 나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사태가 진정된 후에……!”

나한은 본관의 정문 안에서 하인들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귀족을 싸늘히 바라보며 그들의 뒤쪽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응? 방금 뭔가…… 억!”

분이 풀리지 않아 하인을 두들겨 패던 귀족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낯선 이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한이 그의 머리를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놔라! 누가 감히 이몸에게 손을…… 무, 뭐. 뭐야. 끄아아악!”

화려한 예복 차림의 젊은 귀족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일그러지며 뇌를 통해 파고드는 끔찍한 환상에 비명을 질렀다. 나한이 손을 떼어낸 뒤에도 그는 제 머리를 붙잡고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다, 급기야는 벽과 바닥에 미친 듯 이마를 찧으며 뒹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지나친 힘을 이기지 못한 머리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힘을 잃은 몸뚱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리고 있던 호산라가 겨우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죽은 귀족을 보고 정신을 차린 하인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괴, 괴물. 괴물이야!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

나한이 한 번 더 힘을 발휘하자, 하인의 눈이 빙글 돌았다.

“붉은사슴 상단을 책임지던 빌름 남작의 동생은 지금 어디 있지?”

“……끄으윽. 글레, 글레힘, 님은… 3층… 3층에…….”

원하던 정보를 얻어낸 뒤 나한이 손을 휘저으며 하인에게 보여 주던 환상의 내용을 바꾸었다. 잠시 후 하인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일을 끝낸 나한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표정한 얼굴로 호산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호산라는 입술을 깨물고 재차 그의 뒤를 따랐다.

이후에도 운이 없는 몇 명이 나한과 마주쳐 새로운 희생자가 되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동안에도 곳곳에서 혼란 가득한 폭발음과 싸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이 지나친 곳은 고요하기만 했다.

문득 나한이 더 나아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3층이 시작되는 복도 입구에 서서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어느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는 붉은 피부에 짙은 머리칼을 지닌 남국계였으나 오르 제국의 기사들이 흔히 걸치는 경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고요하고도 묵묵하게 검을 뽑아 든 채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나한과 호산라를 마주한 순간, 평범한 이였다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법한 무거운 예기가 복도를 휩쓸었다. 검의 극의에 다다른 이만이 내뿜을 수 있는 기운이었다.

소드마스터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호산라조차 순간 상대가 보통 기사가 아님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나한 님.”

호산라가 떨리는 손으로 나한을 붙잡으려 했으나 나한은 그를 향해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한 기사라 할지라도 각성자가 아닌 이상은 제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단호한 뜻이었다.

“역시, 네가 나한인가.”

과묵한 기사가 천천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었다.

“주군의 뜻에 따라, 이 앞으로는 누구도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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