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티와 비슷한 경로로 경매장에 침입하는 데 성공한 로벨은 그곳에서 일하는 하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빌름 남작의 저택에 잠입해 하인 일을 했던 경험이 오늘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쓴웃음을 지은 그는 자신이 본 내부 정보를 차례차례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경매는 출품 물건의 종류에 따라 총 3부로 나뉘며, 귀빈들은 대부분 마지막 3부를 기대하고 왔다고 합니다. 귀한 마도구와 이곳에서 소량 풀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기대 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여러분이 여기에 오셨으니 헛된 기대로 끝나겠죠.”
빌름 남작은 인신매매 피해자들 일부를 여기서 먼저 팔아넘길 생각이었던 듯했다. 그러나 말이라는 모욕적인 암호로 취급되던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오늘 여기에 설 일은 없을 것이다. 경매의 책임자인 빌름 남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더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오르자 같은 생각을 한 듯한 마병단원들이 따라 웃었다.
“귀빈들은 거의 다 도착했고, 방문한 이들의 명부를 적던 상단 관계자의 얼굴과 위치도 확인했습니다. 사전에 전달받은 것 이외의 다른 출입구는 없어 보입니다.”
“출품 물건을 보관 중인 창고는?”
“본관 뒤쪽과 연결되어 있어 찾기 쉽습니다. 다만 출입구는 남국인들이 지키고 있어 저 같은 임시 하인들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더군요. 아, 그리고……. 저와 다른 구역에서 일하는 하인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들도 좀 발견했습니다.”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이죠?”
능력을 써서 이미 상황을 파악한 칸나가 묻자 로벨이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누구신지……?”
“칸나 완드라고 해요. 정과 부단장이죠. 타이누에 도착한 지 몇 시간 안 됐지만, 당신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요. 당신도 본래는 그쪽에 있던 분이었다고 했죠?”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한 칸나의 얼굴에서 여유와 자신감이 흘렀다. 그 기세에 압도된 듯 고개를 끄덕인 로벨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 네. 아무튼 말씀대로 이곳에 숨어 들어와 있는 녀석들은 모두 저와 같은 마을 출신 각성자들로, 나한의 뜻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하던 이들이기도 합니다. 공격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라 그들만으로도 이곳 정도는 충분히 부수고도 남지요.”
다행히 로벨 쪽에서 먼저 그들을 발견하고 몸을 피했기에 그의 정체는 들키지 않았다.
“몇 명 정도 발견했지?”
유더의 질문에 손가락을 꼽아 본 로벨이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만 일곱 정도.’ 라고 대답했다. 나한을 따르는 이들의 수가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니 나머지는 역시 파티장 쪽으로 보낸 모양이었다.
‘나한은 나와 키시아르가 파티장 쪽에 있는 줄 알 테니 그쪽으로 먼저 움직이진 않을 거라 예상했었는데……. 여태 조용한 걸 보면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렇다 하더라도 그쪽에는 대부분의 기사와 병사들이 몰려 있는 데다 힘을 쓰고 싶어 좀이 쑤실 마병단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는 중이었다. 더욱이 나단 주커만과 키시아르가 버티는 중이기도 하니 걱정은 전혀 안 되었다.
유더는 제가 벗어 두고 온 예복 상의를 팔에 걸고서 창 안에 서 있던 키시아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도 그곳에서 홀로 계속 유더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는 잠깐의 침묵 후 로벨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나서 단원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여기 끝까지 있을 수 없어. 본래 지휘하기로 한 에버가 조금 늦게 올 테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예정대로 창고와 출입구를 봉쇄하고, 방문자 명단을 확보하는 한편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야 해.”
각성자로 파악된 남국인 상인들과 이곳에 숨어들어와 있는 나그란의 별을 상대하면서 그 모든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을 터다. 유더는 에버를 두고 먼저 떠나올 때와 같은 기분으로 눈앞의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남국인 상인 측은 지금 창고에 있을 테고, 나한은 아직 위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능력을 써서 이곳 내부에 숨어 있거나 혹은 파티장 쪽으로 향했을 거야. 그들과 일대일로 접전을 벌이는 건 최대한 피하고, 혹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시에는……. 칸나. 네게 부탁할게.”
“응. 에버 언니가 올 때까지 자리를 대신하면 되는 거잖아. 문제없어. 걱정 말고 유더는 할 일을 한 다음에 단장님께 돌아가.”
유더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읽은 듯이 대답한 칸나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더없이 든든한 모습이었다.
유더는 그녀를 향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곧 지하 통로에 모여 있던 단원들이 유더를 남겨 두고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더는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답지 않게 망설이며 그를 돌아본 로벨의 눈빛 속에서 그가 어쩌면 처음부터 제일 묻고 싶었을 어떤 말을 느꼈다.
“저, 유더 님. 혹시……. 오시기 전에 파티장 쪽에서…….”
“마티는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을 것 같군요.”
“아, 네. 역시 그렇겠지요.”
선수를 쳐 대답해 주자 로벨의 얼굴에 머쓱함과 안도, 그리고 마티를 향한 아릿한 감정이 동시에 번져 나갔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전 이만…….”
“로벨.”
유더는 등을 돌리려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깨를 움찔 멈춘 로벨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마티를 되찾고 나한에게 복수하기 위해 우리에게 협력해 준 건 알지만, 저는 오늘 당신의 능력으로 나그란의 별 측을 상대하는 일보다는 명단 확보 쪽에 더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거기까지 가기 위한 안내야 당연히 잘해 드릴 예정입니다만… 아. 제 바람 능력이 그리 대단치 않아서 걱정하시나 보군요.”
로벨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유더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대답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능력은 바람 쪽보다는, 대상의 무게를 조절하는 쪽에 더욱 특화되어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으로는 고작해야 작은 물건 정도밖에 못 옮긴다고 스스로 한계를 규정지은 탓에 갇혀 있던 것뿐이겠죠.”
“……대상의 무게요?”
그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 되었다. 어차피 직접 겪어 본 뒤 느끼는 게 더 빠를 테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했다. 유더는 더 자세히 부연하지 않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 참석한 귀빈들의 명단을 확보하는 건 그들을 잡아들이는 일보다도 어쩌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잡아들인 이들에게 올바른 벌을 내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길 시에는 이 말을 떠올리고, 당신의 능력을 올바르게 써 주었으면 좋겠군요.”
물론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쪽이 훨씬 좋겠지만, 만약을 대비해 나쁠 일은 없을 터였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보잘것없는 능력은 없습니다.”
“…….”
로벨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제가 들은 말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지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유더는 그를 남겨 두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져 오니 어서 움직여야 했다.
그가 단원들과 다른 방향의 통로를 따라 걸어간 끝에 도착한 곳은 본관에서 가장 가까운 정원의 사각지대였다. 수십 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화려한 마차들이 조용히 자태를 뽐내며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더는 심호흡을 하며 몸 안의 힘을 고르려다, 막 뒤늦게 입구를 통과해 들어온 듯한 어느 마차를 발견하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어디에나 지각하는 이는 있는 법이었다.
“늦었어! 벌써 1부가 시작했단 말이다. 이 게으름뱅이 놈. 마차 바퀴를 진작 제대로 잘 정비해 두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
“죄송합니다.”
“수도에 있었을 적에 너 같은 놈이 내 마차를 몰았더라면 이미 목을 쳐 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너 따위 놈도 내가 명예를 잃고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요!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마차 안에서 애꿎은 마부에게 노성을 토해 내며 내린 이들의 얼굴을 본 순간, 유더는 잠시 멈칫했다.
‘저자들은……?’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 싶더니 바로 기억이 났다.
그들은 아페토 가의 재판이 열릴 때 아페토 측 대리인으로 서서 키시아르에게 온갖 말을 퍼붓던 자들이었다!
‘운이 좋군,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아페토 가의 치부와 관련된 일로 재판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 대부분의 죄지은 자들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지만 애매하게 관련된 자들 중에는 제 안위를 지키려 수도에서 몰래 빠져나간 이도 있었다.
그리고 말하는 모습을 보아서는 저들 또한 그 비슷한 경로로 수도를 떠나왔을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다.
하긴, 아페토 가에서 선택한 이들이니 안 봐도 삶의 궤적이 뻔했다.
‘그러니 이런 곳에 왔겠지만.’
유더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그들은 멀리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냥꾼 같은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채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경매장으로 들어섰다.